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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18화 (118/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8화

33. 산간 마을(3)

소녀는 포이의 뒤에 숨어서 눈을 깜빡이며 제이든을 쳐다봤다.

아이의 몸집이 작다 해도 포이보다는 훨씬 크니까 숨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몸을 움츠린 채 포이의 뒤에 선 모습이 꼭 포이의 뒤에 숨은 것 같았다.

“저기, 꼬마 아가씨, 여길 나가는 방법을 안다고?”

소녀는 입을 꼭 다문 채 포이의 눈치를 보았다.

아실리가 꼬리로 제이든의 다리를 톡톡 쳤다.

-나한테도 말을 안 했어. 포이랑만 속닥속닥하던데, 포이랑 의사소통이 되는 걸 보면 토끼 수인이려나?

아, 그런가?

예전에 라파엘도 토끼 수인의 피가 흐른다더니 포이랑 말이 통했었지.

그럼 이 마을의 주민들은 수인인 건가. 겉으로 보기엔 다 그냥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런데 수인들은 사람 말을 할 수 있잖아?”

-응, 못 하는 수인도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 형태에 이렇게 가까운 수인들은 대부분 다 말을 하는데 쟤는 못 하네?

아실리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앞발로 수염을 만졌다.

제이든은 포이에게 말했다.

“포이, 그 친구한테 잘 좀 부탁해 보렴. 해 지기 전에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할 텐데.”

포이가 소녀를 향해 귀를 쫑긋거리고 코를 발름거리면서 손짓 발짓을 하자 소녀가 포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뭔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되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제이든 일행이 소녀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소녀가 나온 집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여자가 한 사람 뛰어나왔다.

엄마인 듯한 여자는 소녀를 낚아채듯이 끌어안고 집안으로 끌어들이고는 문을 탁 닫아 버렸다.

“아! 잠시만요. 아주머니, 아주머니!”

놀란 제이든이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니, 이거 참, 어떻게 해야 하지?”

난감해진 제이든이 뒤통수를 긁고, 아실리는 못마땅한 듯이 목을 울리면서 문 앞 계단 아래에 서 있었는데 잠시 후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겁먹은 여자의 얼굴이 빼꼼 나와서 밖을 살피자 포이가 깡충 앞으로 나섰다.

“포잉!”

문 앞의 낮은 계단에 포이가 깡충 뛰어오르자 문틈에서 여자아이가 쏙 빠져나오더니 계단을 도도도 내려와 포이의 앞발을 잡았다.

둘이서 깡충깡충 뛰는 걸 본 여자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와서 포이를 한참 보고 있더니 계단을 내려왔다.

“저기, 아주머니, 저희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은…….”

제이든이 말을 붙이려고 하자 여자는 제이든을 쳐다보며 손을 제 입에 대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도 말을 못 하나 봐.

여자는 딸과 마찬가지로 동그랗고 순해 보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말고삐를 잡고 썰매를 집 뒤쪽으로 몰고 갔다.

뒷문 앞 계단의 난간에 말고삐를 묶은 여자는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길을 알려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 소녀와 포이가 나란히 따라가고 제이든과 아실리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마을 가운데 난 길이 아니라 집 뒤쪽을 따라서 걸어갔다.

안개가 점점 짙어져서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제이든은 혹시 서로 흩어질까 두려워서 포이를 어깨에 올리고 아실리를 품에 안았다.

앞서가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붙어 가는데도 순간 앞사람의 등이 사라져 버렸다.

방향을 잃은 제이든이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는데 안개 속에서 작은 손이 뻗어나오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아, 고마워.”

소녀의 손을 잡은 채 안개 속을 한동안 헤치고 가자 마침내 여자와 소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멈춘 곳은 작은 우물가였다.

카이엔에서 우물을 마을 중심부에 두는 형태가 많은 걸 생각하면 여기가 아마 마을의 중앙 부분이지 싶었다.

사방에 안개가 깔리고 인기척도 없었지만 여자는 경계하는 듯이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소녀가 우물 주변을 깡충깡충 돌았다.

“포이, 포이잇.”

포이가 아실리를 향해 앞발을 흔들었다.

-여기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고 그러는데.

아실리가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제이든을 향했다.

-음. 마법진을 구성할 때 진의 핵심이 되는 마법 물품을 그 중심부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찾아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마을이나 거리에 진을 칠 때는 중심부의 사거리 교차점에 마법 물품을 묻거나 숨기는 경우가 많은데.

아실리의 말을 듣고 보니 제이든도 세시온의 서재에 있는 책 중에서 그런 이야기를 봤던 기억이 났다.

이 마을이야 하도 조그마하니 사거리 교차로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길도 하나뿐인걸.

그러면 이 우물 주변에 뭔가 마법 진의 핵심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겠지?

눈치를 보니 여자와 소녀는 그 물건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마을에 걸린 진을 풀려면 내가 여기서 어떤 물건을 찾아야 되는 거죠, 맞아요?”

제이든이 묻자 여자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쫑긋거리다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딸이나 엄마나 순하고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입을 오물거리는 게 꼭 우리 포이 같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찾나.

만약 마나석 같은 거라면 마법사가 아닌 제이든으로서는 찾기 어려운데. 사거리라면 교차점을 파보겠지만 우물이라니.

제이든은 마법진의 핵심 물품이 부디 옛 유물이기를 기대하며 안력을 돋우고 눈에 기를 모았다.

우물 위를 가린 허술한 지붕으로부터 네 개의 기둥을 꼼꼼히 살피고 우물 벽을 쌓은 벽돌과 우물 주변에 깔린 돌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법진의 핵심이 될 정도의 유물이라면 분명히 뭔가 느낌이 있을 텐데.

“유물이 아닐지도 몰라. 마법사가 만든 마나석 같은 거라면 난 못 찾을 텐데.”

한참이나 우물 주변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해 풀이 죽은 제이든이 힘없이 중얼거리면서 마지막으로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

우물 안의 어두운 물속에서 뭔가 파르스름한 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저건가?

제이든은 눈에 힘을 주고 물속을 노려보았다.

거의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시선을 집중하고 온 정신을 한 점에 모으자 물속에서 어렴풋이 푸른 아우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제이든!

아실리가 제이든의 발목을 앞발로 꽉 붙잡았다.

“아야야, 너 발톱도 안 집어넣고!”

-우물에 빠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정신을 차린 제이든이 우물 가장자리를 붙잡았던 손을 놓고 일어섰다.

“저 안에 뭔가 있어. 아우라가 있는 물건이야. 마법진의 핵심이 이 우물에 있는 거라면 저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꺼내지…….”

배낭에 밧줄이 있긴 하지만 이 추운 겨울날 우물 속에 들어갔다 무사히 나올 자신이 없었다.

이 마법진을 만든 사람이 우물 속에 뭔가 저 물건을 보호하는 장치를 해놓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저 물건이 마법진의 핵심이 아닐 수도 있고.

망설이던 제이든이 우물 옆에 선 여자와 소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들은 몹시 간절한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마을에 걸린 진이 풀리는 것을 제이든 못지않게 바라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에이, 어떻게 되겠지.”

에우카의 포옹을 받은 이후로 추위를 그다지 안 느끼게 됐으니까 어쩌면 겨울 우물 속에서도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제이든, 정말 우물에 들어가 볼 생각이야?

“발부터 조금 담가 보고 혹시 정 못 견디겠다 싶으면 그냥 올라올게.”

배낭에서 주섬주섬 밧줄을 꺼내서 허리에 감으려고 하는데 허리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응?”

허리에 감아 둔 채 잊고 있었던 레칸도르의 금척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 이게 왜…….”

제이든이 허리띠처럼 감고 있던 금척에 손을 대자 금척은 살아 있는 금빛 뱀처럼 제이든의 손목을 타고 올랐다.

지난번처럼 팔찌 형태로 팔을 감는 건가 했는데 금척은 한쪽 끝을 그의 손목에 감은 채 다른 쪽 끝을 우물로 향했다.

-그거, 우물로 내려가려는 것 같은데?

아실리의 말을 들은 제이든이 긴가민가하면서 팔을 우물 가장자리에 걸치자 금척이 가볍게 흔들리며 우물 속으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늘어나는데?”

팔이나 다리에 딱 맞게 길이 조정이 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길게 늘어나기까지 하다니!

처음 봤을 땐 막대자 같았고 팔이나 허리에 감길 때는 줄자 같았는데 우물 속으로 드리우니 이제 밧줄 같았다.

금척이 물속으로 들어간 후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아실리와 포이는 물론 여자와 소녀까지 궁금한 얼굴로 우물 가장자리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봤다.

“포이, 빠질라. 좀 뒤로 물러나.”

제이든이 우물 가장자리에 고개를 숙이려는 포이를 뒤로 밀어내자 여자도 똑같이 딸을 뒤쪽으로 끌어냈다.

잠시 후 금척이 피리링 떨리더니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을 빠져나온 금척의 끝에는 갸름한 팔각형의 검은 물체가 걸려 있었다.

“이거, 아르카니오산 흑수정 팔각병이네. 사백 년쯤 전에 유행했던 양식인데.”

아르카니오의 흑수정 팔각병이라면 감정사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 팔각병이 일반적인 골동품 팔각병과 다른 건 표면에 마법 술식이 잔뜩 새겨져 있는 거였다.

장갑부터 꺼내 낀 제이든이 검은 팔각병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다.

팔각 형태의 길쭉한 조롱박을 잘라 놓은 것처럼 생긴 검은 병에는 복잡한 문양과 술식이 빼곡히 새겨져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고 마개가 단단히 막혀 있었다.

아르카니오의 흑수정은 대륙전쟁 이전부터 아름답기로 유명했지만 내구성이 약해서 가공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팔각병으로 조각해 내려면 상당한 장인의 솜씨가 필요했고 깨지지 않게 보존하려면 특수한 유약 처리를 해야 했다.

제작시기가 오래될수록 골동품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흑수정이 특히 귀한 대접을 받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내구성이 약한 만큼 보존이 쉽지 않아서 희귀성이 있고, 둘째는 이 흑수정이 마법 도구로 사용될 때 효과가 굉장히 좋다는 점이었다.

같은 술식을 새겨도 다른 마나석에 비해 효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매우 선호하는 재료였다.

하지만 그만큼 술식 새기기가 쉽지 않은 재료인데 이 팔각병은 빽빽하게 술식과 문양을 새긴 데다가 우물 속에 넣기까지 한 걸 보면 사용한 마법사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이든이 팔각병을 들어 올리자 주변의 안개가 마치 바람에 날리듯 흩어지면서 주위가 점점 밝아졌다. 여자가 짧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팔각병이 제이든의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안개가 점점 옅어졌다.

여자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제이든에게 손짓을 했다. 병을 깨라는 것 같았다.

제이든은 잠깐 망설였다.

이 정도로 잘 만든 흑수정 팔각병은 황궁 박물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깨뜨려야 하다니!

예술품을 파괴한다는 것에 감정사로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귀중한 예술품이라도 흑마법의 매개체로 쓰인 이상 부수는 게 맞는 거지!

제이든은 팔각병을 들어 올렸다가 우물 옆의 돌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수정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고 안쪽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와 돌바닥 위를 끈적하게 적셨다.

갑자기 주위가 뿌옇게 변하더니 환한 빛이 어디선가 뿜어져 나오듯 그들을 둘러쌌다.

눈이 부셔서 손으로 눈을 가렸던 제이든이 잠시 후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언제 안개가 끼었더냐는 듯 맑고 깨끗한 날씨 속에서 작은 우물을 비롯해 주변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여자와 소녀는 온데간데 없었다.

아실리와 포이, 그리고 유순한 얼굴을 한 커다란 갈색 토끼 한 마리와 조그만 아기 토끼 한 마리가 우물가에 동그마니 앉아서 저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이든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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