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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17화 (11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7화

33. 산간 마을(2)

말린 과일 한 조각을 막 입에 넣으려던 포이가 깜짝 놀라며 동작을 멈췄다.

영문을 모르는 까만 눈망울이 도록도록 구르면서 제이든을 쳐다봤다.

제이든이 과일 한 조각을 집어서 코 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고 그 모습을 본 아실리도 접시에 코를 대고 냄새를 살짝 맡았다.

“냄새는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좀 찜찜하지?

“응, 확실해지기 전에는 먹지 말자. 포이, 그거 내려놔. 형이 다른 거 줄게.”

포이는 아쉬운 눈치였지만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앞발로 잡고 있던 말린 과일을 얌전하게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래, 착하다. 우리 포이. 세상이 험하니까 낯선 사람이 주는 거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지구에서 어린 조카들에게 주의를 주던 말을 다른 세상에 와서 토끼에게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동안 카이엔에서 여행 다닐 때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음식도 나눠 먹고 민박도 하고 그랬었는데.

제이든은 씁쓸하게 혀를 차면서 접시를 주방에 갖다 놓았다.

주방에는 소박한 나무 식탁이 하나 있고, 간소한 주방 살림이 갖춰져 있었다.

-사용감이 너무 없는데?

제이든을 따라와서 주방을 둘러본 아실리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거실도 그렇고 주방도 그렇고 꼭 필요한 살림살이는 갖춰져 있지만 사용감이 너무 없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집처럼.

“그런데 집은 오래된 것 같은데?”

제이든이 문틀을 살짝 두드려 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낡은 집에 새 살림살이를 갖춰 넣은 듯한 느낌이네.

아실리와 함께 거실로 돌아오자 포이가 문간에 나가 서 있었다.

“포이, 밖에 나가면 안 돼.”

“포이잉!”

열린 문간에 서 있던 포이가 앞발로 밖을 가리켰다.

“응?”

안개가 느린 바람처럼 흘러가는 길에 서서 포이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가 제이든이 나가자 놀란 토끼처럼 깡충 뛰면서 뒤로 물러섰다.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였다.

“얘, 잠깐 뭐 좀 물어볼 수 있을까?”

한껏 상냥하게 말을 걸었지만 여자아이는 까맣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면서 외투 소맷자락을 몇 번 쥐어 비틀더니 얼른 돌아서서 달아나 버렸다.

“쯧! 내가 무섭나?”

제이든이 억울한 얼굴을 하자 아실리가 살짝 웃었다.

-쟤도 낯선 사람하고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나 보지.

안개가 짙어졌다 옅어졌다 하면서 길을 감싸고 흘러가는데 데릭은 돌아오지 않았다.

배낭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꺼내 간단하게 요기를 한 후 제이든은 마구간에서 말을 데리고 나와 썰매에 묶었다.

“그냥 가자, 얼른 세렌토로 가는 게 낫겠어.”

만약 데릭이 정말 친절하게 그들을 집에서 쉬게 해 준 주민이라면 인사도 않고 가는 게 미안한 일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계속 머물러 있기가 찜찜했다.

해가 높아지면서 안개가 좀 옅어진 김에 마을을 빠져나가는 게 나을 듯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썰매를 몰고 가는데 양쪽의 집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그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이 몇 명 있었다.

한결같이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제이든과 눈이 마주치면 찔끔해서 얼굴을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외지인이라고 적의는 없어 보이는데 되게 부끄럼 많은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네.”

집 앞에서 함지박에 물을 담아 놓고 뭔가를 씻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가 대답도 못 듣고 뻘쭘해진 제이든이 말했다.

-그러게, 확실히 특이하긴 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아주머니가 저렇게 숨나? 제이든이 뭐 위협적으로 생긴 것도 아닌데.

함지박 뒤쪽으로 숨어 버린 아주머니를 곁눈으로 보면서 아실리도 말했다.

“어쩌다 한두 명이 그러는 건 있을 수 있지만 전체 마을 사람들이 다 이런 건 좀 특이하네.”

제이든이 아스토시엔 산을 내려와 감정 활동을 시작한 지도 몇 년 되었고 그동안 카이엔의 이곳저곳을 꽤나 다녀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카이엔 사람들은 대체로 인심이 좋고 외지인에 대한 적대감도 별로 없다.

지방에 따라서는 외지인을 꺼리는 곳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대부분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몇 채 되지 않는 집 사이를 빠져나가자 큰 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쪽으로 작은 시내가 있었다.

산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듯한 시내는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물을 쓰기 위해 깨었는지 가장자리 쪽의 살얼음이 둥그렇게 깨져 있고 그 아래로 흐르는 물이 보였다.

“지도랑은 마을의 위치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무튼 냇물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될 것 같네.”

얼어 있는 시내를 따라 아래쪽으로 산길을 내려가는데 안개가 다시 짙어졌다.

“또 눈이 오려나.”

조금씩 더 짙어지는 안개 속에서 제이든이 걱정스럽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눈길인데 안개가 너무 짙다. 여기다 눈까지 오면 길을 계속 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더욱 자욱해졌다.

“마을로 돌아가야 하나?”

뒤를 돌아보니 마을 어귀에 서 있던 큰 나무가 눈과 안개 속에서 어른어른 보였다.

“어? 실리, 저거 보여? 저기 나무에 누가 있지 않아?”

방금 지나쳐 온 나무인데, 그새 그 위에 누군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 같은데 덩치가 너무 작다. 어린애인가?

제이든이 썰매에서 내려 그쪽으로 걸어가자 아실리가 바로 따라와서 옆에 붙었다.

나무 위에 있는 아이는 회색 털옷을 입은 남자아이로 아까 마을 안에서 본 소녀보다도 조금 더 어려 보였다.

“얘, 너 이 마을에 사니? 눈 오는데 위험하니까 내려오렴.”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보더니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이 길로 가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거 맞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실리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아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럼 어디로 가야 되니?”

제이든이 물었지만 아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한 번 더 젓더니 마을 안쪽으로 도르르 굴러가듯 뛰어가 버렸다.

“아니, 이것 참.”

아이의 뒤꽁무니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썰매로 돌아오는데 마을 쪽에서 남자 한 명이 달려왔다. 데릭이었다.

“이봐요, 젊은이.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

뛰어온 데릭은 썰매를 붙잡았다.

“큰일 날 뻔했네. 이쪽 길은 벼랑으로 이어진다오. 길도 좁고 위험해서 지금처럼 눈도 오고 안개도 낀 날은 못 가요.”

“아니, 아저씨는 어디 다녀오셨어요? 마구간에 말도 없던데.”

“출산을 앞둔 말은 저기 비니스 형님댁 마구간에 있거든. 우리 마구간은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튼 들어갑시다. 지금은 못 가요. 안개가 좀 걷히면 내가 다른 길을 알려주겠소.”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건 사실이었던지라 제이든은 미심쩍은 대로 데릭을 따라 다시 마을로 들어섰다.

“우리 집에 가 있어요. 내가 비니스 형님댁 아주머니께 점심 준비를 부탁할 테니.”

마을의 중간쯤에 있는 집으로 또 뛰어가는 데릭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이든은 아침에 들어왔던 길 쪽으로 썰매를 몰았다.

-저 사람 집으로 가게?

데릭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실 리가 고개를 들었고 제이든이 대답했다.

“아니, 아침에 들어왔던 쪽으로 나가 보려고.”

그들은 데릭의 집을 지나쳐서 아침에 들어왔던 길 쪽으로 마을을 빠져나갔다.

* * *

-왠지 이럴 것 같더라.

“그러게.”

제이든은 썰매를 멈춰 놓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대로라면 마을 입구에서 모퉁이 두 개만 돌면 어제 노숙했던 자리가 나와야 했다.

그런데 모퉁이를 하나 돌자마자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이 나와 막다른 길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마법진에 빠진 것 같아.”

제이든이 마부석에서 썰매 안쪽으로 들어와 포이를 무릎에 끌어안았다.

“실리, 그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라는 사람이 기관이나 진식, 환영 마법의 대가라고 하지 않았어? 설마 우리…….”

-잠깐만.

뭔가 생각하는 듯 조그만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던 아실리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제이든이 인기척을 듣고 먼저 깼잖아.

“응.”

-난 못 들었단 말야. 만약 사람이나 동물이 가까이 오면서 소리를 냈다면 내가 먼저 들었을 텐데. 암만 깊이 잠들었어도 내가 제이든보다는 귀가 밝잖아?

“뭐, 그렇긴 하지.”

제이든은 순순히 인정했다.

-근데 난 못 들었거든. 그게 좀 이상해. 그리고 그 데릭이라는 아저씨, 화로 옆에 오지 않았었지?

“음……, 그러네. 화로의 간격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아.”

그때는 몰랐는데 곰곰 다시 돌이켜보니 확실히 데릭은 화로의 불빛이 닿는 반경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레노아의 화로는 빛과 열을 공급해 주는 것 외에도 화로의 주인에게 공격 의사를 가진 야생 동물이나 악의를 가진 자의 접근을 막는다.

데릭이 썰매에 가까이 온 것은 제이든이 화로를 끄고 썰매에 실은 뒤였다.

“실리, 혹시 그 사람이 세르지오라든지…….”

-그건 아닌 것 같아.

아실리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내가 이래 봬도 마법사를 꽤나 많이 만나봤거든. 그 데릭이라는 사람한테는 마법사 특유의 아우라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아니, 아우라는 감출 수 있다 해도…….

아실리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상해, 아우라도 감출 수 있고 환영 마법으로 모습도 바꿀 수 있지만 사람 자체의 생기를 없앨 수는 없는데.

“?”

-데릭에게선 특별한 악의나 적의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아서 나도 방심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생기를 못 느꼈어. 그냥 아무것도 안 느껴졌어. 맞아, 그래서 내가 모르고 그냥 잤던 거야.

* * *

아실리의 말을 듣고 좀 무서워진 제이든은 이쪽저쪽으로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였다. 마을 안쪽에서는 눈도 오지 않고 안개도 옅은 편인데 마을 밖으로만 나가면 짙은 안개가 앞을 가리거나 눈이 쏟아지거나 절벽이나 벼랑이 나타나곤 했다.

데릭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채 나타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만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숨곤 했다.

-진법 공부를 좀 더 해 둘걸.

아실리가 탄식했다.

“실리, 주민들은 어때? 저 사람들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

제이든이 주민들을 가리키자 아실리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어. 가까이 있지 않으면 알 수 없거든. 근데 아까 포이 바로 앞에까지 왔던 여자아이 있잖아? 걔는 분명히 생기가 있었어. 그리고 나무에 있던 남자아이도.

아실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침 그 여자아이가 바로 근처에 있던 집에서 쏙 나왔다.

“얘, 잠깐만. 잠깐만.”

제이든이 불렀지만 소녀는 깜짝 놀란 듯 집 뒤쪽으로 총총총 뛰어갔다.

“앗, 포이! 포이야!”

포이가 썰매에서 깡충 뛰어내리더니 여자아이를 따라 달려갔다.

제이든이 따라 내리려고 마부석에서 일어서는 순간 말이 뭔가에 놀랐는지 히히힝 소리를 지르며 뛰기 시작하는 바람에 제이든은 썰매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실리가 뛰어내려 포이를 따라갔고 제이든은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고삐를 당기면서 땀을 뺐다.

잠시 후 겨우 진정된 말과 함께 제자리로 썰매를 몰고 오자 집 뒤에서 아실리와 포이가 길 쪽으로 나왔다.

“포이잉!”

포이가 집 뒤쪽을 보고 손짓을 하자 먼저 갈색 머리가 잠깐 나왔다 들어가더니 여자아이가 주춤주춤 밖으로 나왔다.

“포잉!”

포이가 깡충거리며 몇 발짝 앞으로 나와 소녀를 돌아보자 소녀가 포이를 따라오듯이 앞으로 나왔다.

“어……, 안녕?”

혹시 아이를 놀라게 할까 봐 최대한 상냥하게 인사를 하자 제이든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가 머리를 까딱 숙였다.

아실리가 제이든의 옷자락을 잡더니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의 귀에다 입을 갖다댄 아실리가 조그맣게 미야옹 속삭였다.

-포이가 그러는데, 저 애가 이 마을 나가는 방법을 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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