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6화
33. 산간 마을(1)
노인의 초상화는 한국에서도 가끔 봤던 몽타주 형태의 그림이었다.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것이라 평면적인 느낌의 스케치였는데 너무 흔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잖아도 노인들의 얼굴은 서로 비슷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말로만 듣고 그린 스케치인 데다 그림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주름이 많고, 눈이 가늘고 입술이 얇은 편이고, 피부색은 어두운 편이었다고 했지? 그거 말곤 뭔가 뚜렷한 특징이 없어서 아쉽네. 이런 얼굴이라면 너무 많지 않아?”
이 그림과 비슷한 노인은 너무 많아서 실제로 길에서 만난다 해도 긴가민가할 터였다.
-그러게, 제이든이 한 번이라도 봤다면 좋았을 텐데. 똑같이 그려냈을 텐데 말야.
아실리가 아쉬운 듯 앞발을 그림에서 떼었다.
-혹시라도 내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일까 해서 열심히 봤는데 모르겠어. 유명한 마법사는 아닌가 봐.
고양이는 영리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깜박이면서 옆에 다가온 포이의 머리를 핥아 주었다.
포이는 까만 귀를 까딱까딱 흔들면서 아실리와 제이든이 보던 그림에 앞발을 톡 올려놓고 자기도 열심히 보는 시늉을 했다.
“포이야, 넌 봐도 몰라. 실리, 유명한 마법사들은 다 알아?”
-얼굴이 공개되지 않은 흑마법사는 모르지만, 일반 마법사들 중에서 이름 좀 있는 사람은 다 알지. 세시온의 서재에 마법사 인명록도 있고 마탑에서 발행하는 잡지나 황궁의 관보도 열심히 읽었는걸.
아실리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삼십여 년 전까지만. 그 이후에 유명해진 사람은 잘 몰라.
그러니까 세시온 다미에르가 죽고 아실리가 숨겨진 계곡에 칩거하기 전까지의 사람들만 안다는 거군.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도 이름 얻은 지 삼십 년은 안 됐나 봐. 모르는 얼굴이야. 그치만 이 초상화는 아주 잘 그려서 이 사람은 어디서 보든 확실히 알아볼 수 있겠어.
아실리가 가리킨 두 번째 그림은 마탑에서 발행한 정식 수배서였고 정밀하게 잘 그린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의 초상화가 첨부되어 있었다.
“좀 느끼해 보이지만 멀쩡하게 잘 생겼네.”
초상화 속의 남자는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굽이치는 적갈색 곱슬머리가 감싸고 있는 얼굴은 지구라면 이탈리아계 미남이라고 할 듯한 이목구비였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 눈과 우뚝한 콧날, 맵시 있게 기른 턱수염을 바라보며 아실리가 말했다.
-아르카니오 왕실의 피가 흐른다는 말은 맞나 봐. 전형적인 아르카니오 왕실 사람처럼 생겼어. 요즘은 피가 많이 섞여서 이렇게 뚜렷한 회색 눈에 적갈색 머리 조합이 많이 없는데.
“흠, 그래?”
아실리만큼 카이엔인들의 역사적 용모에 밝지 못한 제이든은 포이와 나란히 수배서를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은 환영 마법이 특기라니까 모습을 바꿨을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얼굴 잘 기억해 둬. 환영 마법을 영구적으로 지속할 순 없으니까. 1급 감정사나 높은 수준의 마법사라면 환영 마법을 꿰뚫어 볼 수도 있고.
아실리는 앞발을 들어서 포이를 토닥였다.
-일 년 넘게 유지 가능한 환영 마법을 쓰려면 니콜레타 님 정도는 돼야 해.
“포잉?”
포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아실리를 쳐다봤고 제이든이 수배서 위에 올라간 포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우리 포이에게 니콜레타 님이 걸어주신 마법도 나중에 풀리는 거야?”
-응, 원래 살아 있는 것에 덧씌우는 환영 마법은 지속 기간이 짧아. 나도 쓸 수 있지만 한 시간도 못 가잖아. 니콜레타 님은 워낙 대마법사니까 포이의 환영 마법은 넉넉잡고 일 년 정도는 버티겠지만 보통 마법사들의 환영 마법은 이삼일 버티면 길게 가는 거야. 그때그때 반복해서 새로 걸어야 돼.
“그렇구나. 아무튼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그새 또 수배서 위에 올라가서 깡충거리고 있는 포이를 밀어낸 뒤 제이든이 세르지오의 수배서와 노인의 몽타주를 돌돌 말았다.
“세렌토에서 공간이동 포탈을 쓰면 집에 금방 갈 수 있겠지만 일단 세렌토까지 열흘 넘게 걸리니까 마음이 좀 불안하네.”
-그거 때문에 그러지?
아실리가 제이든의 허리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응, 이런 걸 갖고 다니려니까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외투와 긴 스웨터 안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그의 허리춤에는 전설급 보물이 감겨 있는 것이다.
에트루리안의 서보다는 좀 못하다고 하지만 제이든의 입장에선 이것이나 그것이나 갖고 다니기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산을 넘지 않고 외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도 그래서였다.
세렌토에서 콜레디오바로 올 때 택했던 산길로 가면 열흘 거리인데, 최대한 깊은 산을 피하고 산기슭 쪽의 관도 위주로 돌아서 가면 사흘쯤 더 걸렸다.
“금척이 없었으면 그냥 산을 넘어갔을 텐데 이런 걸 갖고 다니니까 아무래도 안전한 길이 낫겠지 싶어서 말야.”
-응, 계속 썰매에서 자는 것도 그렇고.
“그래, 마을이 멀지 않으니까 오늘은 여관에서 잘 수 있겠다.”
짐 정리를 한 제이든이 화로의 불을 끄고 썰매에 넣은 다음 다시 출발했다.
* * *
순조롭게 세렌토로 향한 지 닷새째가 되던 날 밤.
“어라? 지도가 잘못됐나?”
제이든은 지도를 꺼내서 램프 불 아래에 비춰 보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주변이 괴괴했다.
지도상으로는 여기쯤 분명히 작은 산간 마을이 있어야 했는데 겨울 나무들만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을 뿐 마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지도에도 마을이 있고, 어젯밤 묵었던 여관에서도 하루거리에 마을이 있다고 했는데.”
-길을 잘못 든 거 아냐?
아실리가 마부석에 앞발을 올려놓으면서 미야옹 울었고 포이도 덩달아 마부석 쪽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산 아래쪽 길로 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산 위쪽으로 많이 올라온 것 같아. 아까 고목이 서 있던 갈림길에서 잘못 들어온 건가.”
제이든은 지도를 펴서 다시 봤지만 어둡기도 하고 산길이라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어려웠다.
“안전한 길로 온다고 온 게 오히려 산속으로 들어와 버렸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날 밝으면 길을 찾자.”
되도록 노숙을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야생동물 방비를 위해서 레노아에게 받은 화로를 피우고 말을 썰매에서 풀어 쉬게 해준 뒤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제이든이 썰매 안에서 잠을 청한 후였다.
* * *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제이든이 눈을 비볐다.
산길에서 노숙 중이다 보니 아무래도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깬다.
머리를 들어 보니 아실리도 그냥 자고 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잘못 들었나보다 하고 다시 머리를 베개 대용으로 쓰던 방석에 내려놓는데 밖에서 또 한 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움직이다 나뭇가지라도 밟았나 싶었지만 확인해 보려고 포장을 들치는데 그제야 눈을 뜬 아실리가 졸음에 겨운 미야옹 소리를 냈다.
-왜? 제이든?
“무슨 소리가 나서.”
-난 못 들었는데?
아실리가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고 제이든이 옆에 놓아두었던 삼단봉을 쥐고 조심스레 썰매 밖을 살펴보았다.
“어? 뭐지?”
썰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화로의 불빛이 닿는 간격 가장자리쯤에서 노란 불빛 하나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사람인데?
제이든의 옆으로 머리를 내민 아실 리가 말했다.
아실리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역시 등불을 든 사람이었다.
두건이 달린 짙은 색 외투를 입고 있어서 언뜻 등불만 보였던 것이다.
제이든이 썰매의 포장을 젖히고 몸을 내밀자 그쪽에서도 흠칫 놀란 듯 몇 발 물러섰다.
“뉘신데 여기서 노숙 중이오?”
늙수그레한 남자가 경계하는 듯 썰매에서 좀 떨어진 채 등불을 들어 올렸다.
“길 가던 사람입니다만…….”
제이든이 말을 흐리자 남자는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인데 왜 굳이 여기서? 날도 추운데 마을에 들어가시지 않고.”
“아, 마을이 가깝습니까?”
썰매에서 제이든이 내려서자 그를 본 남자는 등불을 내리고 한결 편안한 자세가 되었다.
“모퉁이 두 개만 돌면 마을이오. 걸어서 가도 금방이야. 그런데 바로 마을 코앞에서 안 들어가고 노숙을 하고 있어서 이상하다 했지.”
“초행길이라 마을을 못 찾았어요. 길을 잘못 든 줄 알았습니다.”
반색을 하는 제이든을 보고 남자가 웃었다.
“뒤쪽에도 마을이 하나 있고 앞에도 마을이 있는데 용케 그 사이로 비켜 오신 모양이로군.”
이름이 데릭이라는 남자는 뒤쪽 마을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웬만하면 밤길은 걷지 않지만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 날 밝기 전에 돌아왔지. 이제 해 뜰 때도 다 됐으니 나랑 함께 마을로 가시면 되겠네.”
“그러시지요. 이쪽으로 타십시오.”
썰매에 오른 데릭은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고양이와 토끼를 데리고 여행을 하시나?”
“예, 그렇게 됐습니다.”
아실리는 침착하게 데릭을 훑어볼 뿐이었지만 포이는 아실리의 등 뒤로 숨었다.
“토끼는 낯을 좀 가립니다. 그냥 모르는 척해 주세요.”
제이든의 말을 들은 데릭은 흥미롭다는 듯 포이를 보았지만 별말 없이 앞쪽을 바라보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썰매가 출발할 때는 이미 희뿌옇게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데릭의 말대로 마을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데 있는 걸 모르고 거기서 노숙을 했네요.”
모퉁이를 돌자마자 앞에 나오는 마을을 보며 제이든이 허탈하게 웃자 데릭도 껄껄거리며 썰매에서 뛰어내렸다.
“아직 다들 자는 것 같으니 이쪽으로 오시오. 여긴 여관 같은 게 없어요. 그냥 우리 집에서 좀 쉬었다 가쇼.”
마을은 아주 작았다. 레타논의 황금연못처럼 겨우 열 집 남짓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썰매를 집 앞에 세우고 제이든을 안으로 안내한 데릭은 주방에서 말린 과일을 한 접시 내오더니 말했다.
“이거나 들면서 좀 쉬고 있어요. 난 우리 말이 새끼를 낳을 때가 돼서 빨리 온 거라 마구간 좀 보고 올 테니까. 댁네 말도 마구간에 넣어 놓겠소.”
“감사합니다.”
데릭 혼자 사는지 집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포이, 물 줄까?”
배낭에서 물병을 꺼낸 제이든이 아실리와 포이에게 물을 주고 문간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떴지만 날이 흐려서 그런지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는지 안개 속에서 물동이를 인 여자가 지나갔고 잠시 후에는 나뭇단을 진 남자가 한 명 지나갔다.
문간에 선 제이든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살짝 목례를 했지만 남자는 못 봤는지 그냥 가버렸다.
“안에 있어. 나는 말 좀 보고 올게.”
제이든의 말을 데릭이 데려갔는데, 생각해 보니 이 집 말이 새끼를 낳는다면 옆에 낯선 말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지 않았다.
말을 옮겨 줘야겠다 싶어 집 앞에 세워 둔 썰매에서 말에게 줄 건초를 꺼내 들고 집 뒤로 돌아가니 자그마한 마구간이 붙어 있었다.
마구간 안에는 제이든의 썰매를 끌고 온 말이 혼자 서 있었다.
“왜 아무도 없지?”
새끼를 낳는다는 말이 있는 마구간이 여기가 아닌가?
제이든은 어리둥절해서 일단 말에게 건초를 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말도 없었고 데릭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집 앞으로 돌아와 보니 안개가 그새 더 짙어져서 건너편 집이 잘 안 보일 정도였다.
아실리와 포이는 투박한 소파에서 졸고 있다가 제이든이 들어오자 눈을 떴다.
“삐잉?”
탁자 위에 놓인 말린 과일을 가리키며 포이가 제이든을 쳐다봤다. 먹어도 되느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제이든은 얼른 머리를 저었다.
“포이, 잠깐만. 그거 먹지 말고 기다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