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5화
32. 수상한 노인(2)
제이든이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콜레디오바의 후계 책봉식에 칼리스타가 나타났을 때였다.
콜레디오바의 상자 모조품을 봤을 때 칼리스타는 그렇게 말했었다.
만든 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모조품 위에 마법 처리를 한 것은 세르지오 아르카니오 같다고.
그때 경황없는 중에도 어디선가 들은 이름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곰곰 생각해 보니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는지가 떠올랐다.
소네트 경매 이후 밤의 경매를 일망타진할 적에, 니콜레타가 사라진 금고를 되돌리느라 마력을 소진한 후 침대에서 끙끙 앓으며 탄식했었다.
“그때 니콜레타 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그놈의 세르지오 녀석 잡기만 하면 가만 안 둘 것이야. 밤의 경매를 위한 금고를 설계하다니 그 아까운 재주를 그런 데다 쓰고, 아르카니오 마법사의 수치야!”
제이든의 말을 들은 칼리스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네 기억력이 상당히 좋군? 사람 흉내도 잘 내고, 니콜레타 님 말투랑 정말 비슷한데?”
“정말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하신 걸 그대로 기억하다니!”
감탄하는 칼리스타와 오레스를 보면서 아실리가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기억력이 안 좋은 감정사도 있나? 게다가 우리 제이든은 내가 훈련시켰는데, 그 정도 말이야 토씨 하나 안 빼고 기억해야지!
하기야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 감정사이긴 하다.
제이든은 원래 권재인이던 시절에도 기억력이 좋았는데 카이엔으로 넘어와 숨겨진 계곡에서 세시온의 축복을 받은 이후 기억력이 훨씬 더 좋아지고 학습 속도도 몇 배나 빨라졌다.
-그리고 나도 붙어 있고.
그렇지, 거기다 아실리라는 일타강사 고양이까지 붙어 있으니 학습 속도가 빠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력을 많이 했겠지만 타고난 재능도 있었겠지. 세시온 님 이후로 젊은 감정사들 중에서 재능만으로 보면 우리 오레스와 엘리노어 유스틴이 최고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네.”
칼리스타가 감탄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바람에 제이든은 좀 민망했다.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한 건 사실이지만 세시온 다미에르의 서재와 아실리라는 사기 캐릭터가 뒷받침이 되고 있었으니까.
-사기라면 진품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진짜 사기적 재능이지. 답안지 먼저 보고 풀이를 공부하는 거나 같잖아.
아실리는 괜히 새초롬하게 종알거리고 있지만 내심 칼리스타와 오레스가 제이든을 인정해 주는 게 기쁜지 기분 좋게 목을 골골거리면서 수염을 흔들었다.
“아실리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고르릉거리는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칼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는 마법 왕국 아르카니오 출신의 정통 마법사들 중 한 명이라네. 성을 보면 알겠지만 옛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데다 니콜레타 님과는 먼 친척이기도 하고.”
칼리스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자이기도 했지.”
마법 왕국 아르카니오에는 대대로 훌륭한 마법사들이 많았다.
왕족은 기본적으로 마법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일반 귀족이나 평민들 중에서도 뛰어난 마법사들이 심심찮게 나왔다.
일곱 왕국 중 가장 마법이 발달했던 곳이니만큼 마법 교육도 가장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륙전쟁으로 일곱 왕국이 통일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마탑의 탑주도 아르카니오 출신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륙전쟁 후 카이엔이 통일된 후 세월이 흐르고 외지인과의 교류나 혼인이 많아지면서 아르카니오에 전해져 내려오던 마법의 혈통도 많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른 지방에 비해 마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세르지오는 방계이긴 해도 옛 아르카니오 왕가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에는 왕궁의 대마법사를 지낸 사람도 있었다고 했고 현재의 아르카니오 지역 대영주도 옛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세르지오의 부친은 평범한 하급 관리였다.
왕가의 혈통이라고 해도 워낙 먼 방계여서인지 세르지오의 조부나 부친은 모두 마법의 재능을 아주 미미하게 갖고 있을 뿐이라 모두 마법과는 관계없는 직종에 종사했다.
그런데 세르지오는 대여섯 살 되었을 때 이미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마법의 재능을 나타냈다.
다섯 살짜리 세르지오가 보모의 감독하에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날, 사색이 된 보모는 물론이고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샅샅이 찾았지만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숨은 곳에서 잠이 들어 버렸던 아이가 네 시간 만에 눈을 비비며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 아무도 세르지오를 찾지 못했는데 정작 세르지오는 바로 집 앞의 화단 구석에 숨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결계를 치고 환영 마법으로 풍경을 바꾸었기에 아무도 눈앞에 있는 아이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세르지오 스스로도 어떻게 했는지 설명하지 못했지만 아이는 원하기만 하면 자기 모습이나 물건을 감쪽같이 감출 수 있었다.
어설프기는 해도 라벤더베리를 사과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었고 강아지를 고양이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마법 재능이 차차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세르지오에게 체계적인 마법 교육을 시키라고 부모에게 권했고 마법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교육기관에 보내기는 너무 어려서 보류했고 친척 중에 있던 마법사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찾아와 기초 마법을 가르쳤지만 그 외에도 세르지오의 재능에 관심을 보이고 찾아오는 마법사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좋은 제자를 구하고 싶은 마법사들이 찾아와서 세르지오를 시험해 보곤 했다.
세르지오의 마법 소양은 기관진식이나 환영 쪽에 치중되어 있어서 그쪽 계통 마법사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를 제자로 들이고 싶어 찾아온 마법사들 중에는 명망 있는 마법사부터 세상에 나서지 않고 있던 은둔자까지 다양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르지오의 부모는 고심 끝에 세르지오를 어느 한 마법사에게 맡기는 것보다 마탑에 보내기로 했다.
마탑의 교육생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세르지오는 열두 살에 마탑의 시험에 합격해 견습 마법사가 되었다.
당시 마탑의 견습 마법사들 중 세르지오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노마법사들의 귀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니콜레타 님이 많이 아끼셨지, 개인 제자로 들이신 건 아니어도 따로 많이 챙겨주시고 가르침도 주신 걸로 안다네.”
칼리스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도 세르지오와는 안면이 있는데 밤의 경매용 금고를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설계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조금 삐딱한 데가 있긴 했지만 그런 길로 빠질 거라곤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아이였거든.”
세르지오는 밤의 경매 건 이후로 마탑의 소환을 거부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마탑에서 수배령을 내렸는데 그의 흔적을 여기 콜레디오바에서 찾게 될 줄은 몰랐지. 그 상자에 세르지오 특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고 나도 놀랐다네.”
“그 수상한 노인이 만든 상자에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마법을 입혔다면 두 사람 사이에 연관이 있을 텐데요. 세르지오가 그 노인에게 세뇌를 당했을 가능성도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그 노인이 일반인을 세뇌하는 건 쉬울 수도 있지만 세르지오처럼 뛰어난 마법사를 세뇌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네.”
칼리스타는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아마 두 가지 경우겠지. 그 노인이 정말로 강력한 흑마법사거나, 세르지오의 마음속에 그 흑마법사가 비집고 들어갈 만큼 아주 커다란 구멍이 있었거나.”
잠시 모두 말을 멈추고 조용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아실리가 조그맣게 야옹 울었다.
-둘 다일 수도 있고.
* * *
콜레디오바의 성에 도착해 보니 키리안과 안젤리카는 공동 통치에 대한 황궁의 승인서를 지참하고 센디니온에 가고 없었으나 원로인 제논과 바르톨로가 제이든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미켈레가 수도로 압송되고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가신들의 조직이 안정적으로 재정비된 것이 보였다.
“제이든 씨가 언제 돌아오실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오스틴 씨가 기다리고 싶어 했지만 리마타운의 치안대에 복귀해야 해서 먼저 떠나셨습니다.”
레타논까지 타고 갔던 썰매는 콜레디오바에서 내준 것이라 돌려주고 마구간에 가 보니 세렌토에서 타고 왔던 썰매가 한 대 남아 있었다.
레노아는 상자를 가지고 마탑으로 갔고, 세렌토에서 붙여 줬던 사람들은 오스틴과 함께 세렌토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혹시 공간이동 포탈을 사용할 수 있을까 싶어 물어보니 제논이 난색을 표했다.
“공용 공간이동 포탈은 없고, 영주님이 쓰시는 전용 포탈이 있긴 합니다만 지금은 쓸 수가 없습니다.”
콜레디오바 성의 공간이동 포탈은 4대 전 영주 시절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영주 전용이라고는 해도 영지에 긴급한 일이 생기면 가신들도 사용하곤 했다는데 미켈레가 영주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탈을 구성하는 마법진에 문제가 생겨 사용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법사에게 들으니 포탈의 마법진도 오래되면 구성 요소나 마석을 바꿔 주고 수리를 해야 한다는데.”
제논은 주름진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 저, 미켈레 대공이 영지의 살림살이에 신경을 제대로 못 썼던지라 그냥 방치했었습니다.”
외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려니 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영주관의 포탈이라면 멀쩡하다고 해도 지금은 못 쓸 거야. 작동시켜 줄 영주가 없지 않나?”
칼리스타가 말했다.
“썰매로 며칠 걸리긴 하겠지만 세렌토로 가야겠네. 세렌토에는 공용 포탈이 있어. 내가 써 본 적이 있거든.”
“칼리스타 님도 같이 가십니까?”
제이든이 묻자 그녀는 아쉬운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가긴 가야지, 세렌토에서도 수상한 노인이 등장했었다니 가서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우선 브릴로를 좀 더 살펴봐야겠어. 내가 이래 봬도 마약관리국 일을 봐주고 있잖나.”
“예, 알겠습니다.”
“수상한 노인에 대한 소식을 뭔가 알게 되면 비둘기를 보내겠네. 자네도 뭔가 정보를 듣게 되면 내 사서함으로 비둘기를 보내게.”
“예, 그러겠습니다.”
* * *
콜레디오바의 성에서 하루 쉰 제이든은 다음 날 썰매를 바꿔 타고 세렌토로 출발했다.
-제이든, 그거 좀 꺼내 봐.
잠깐 커피를 마시면서 쉬느라 썰매를 멈췄을 때 아실리가 제이든의 소매를 당기며 야옹 울었다.
“응?”
-칼리스타에게서 받은 그림 말이야.
“아, 그 몽타주, 아니 초상화?”
제이든은 주섬주섬 두 장의 그림을 꺼냈다.
떠나기 전 칼리스타가 건네준 것이었는데 하나는 파비오의 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수상한 노인의 초상화였고 두 번째는 세르지오 아르카니오의 초상화였다.
제이든이 그림을 펼쳐 놓자 아실 리가 초상화 위에 찹쌀떡 같은 앞발을 올려놓은 채 골똘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