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4화
32. 수상한 노인(1)
제이든이 방으로 올라온 이후에도 사람들은 잠들지 않고 한밤중이 넘도록 식당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지 인기척이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 영주의 성이 있는 코르티카 시로 향하면서 보니 콜레디오바 전체가 들뜬 분위기였다.
점심 때쯤 도착한 브릴로는 콜레디오바에서 코르티카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사시사철 운영되는 장터 거리가 있는 상업 도시라 원래 유동 인구가 많은 편이지만 거리는 마치 축제를 앞둔 것처럼 들썩거렸다.
식사를 위해 들렀던 식당에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센디니온도 비슷한 분위기라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브릴로의 명물인 장터 거리를 통과하는데 사람이 많이 나와 있고 전체적으로 활발한 분위기였다.
“귀여운 야옹이가 썰매를 타고 가네, 이거 먹어라!”
지나가는 사람이 웃으면서 썰매를 향해 던진 말린 생선포를 날렵하게 낚아챈 아실리가 어포를 씹으면서 종알거렸다.
-다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가 봐.
“그러게, 미켈레가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잖아? 세금도 계속 올렸다고 했고 영지를 제대로 다스릴 능력도 관심도 없었던 것 같았으니까.”
새로 영지를 다스리게 된 젊은 영주 부부에 대해 기대를 잔뜩 하고 있는 영지민들을 보니 흐뭇하다가도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안젤리카 공녀나 키리안 공자나 둘 다 아직 어린데, 전임자가 말아먹은 일처리 뒷수습에다 영지민들 안정시키고 하려면 힘들겠다.”
영주라면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좋은 영주가 되려면 얼마나 할 일이 많고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것인가.
게다가 양쪽 다 강경한 수단으로 전임자를 몰아내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니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였다.
새 시대를 향한 영지민들의 기대가 높은 만큼 부담도 클 테고.
둘 다 아직 어린데 부담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즐길 날은 벌써 끝났다 싶어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가신들이 있으니까 잘할 거야. 둘 다 야무지기도 하고.
어포를 오물거리는 아실리의 말을 들으며 제이든은 마부석 쪽으로 기어 올라와서 썰매 밖으로 머리를 내민 포이를 잡아당겼다.
“포이, 떨어질라, 뭘 그렇게 봐?”
“포이잉.”
포이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 저편을 향해 앞발을 까딱거렸다.
“저쪽에 뭐가 있어?”
거리를 통과하느라 썰매를 느리게 몰고 있던 제이든이 이마에 손을 대고 그쪽을 바라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아니, 있네.
뒤늦게 낯익은 그림자를 발견한 제이든이 소리를 쳤다.
“칼리스타 님!”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키가 훤칠하고 자세가 당당한 여자가 썰매를 향해 머리를 돌리더니 반갑게 웃었다.
“오, 제이든 군!”
한낮이라고는 해도 정월의 콜레디오바는 춥다. 애당초 겨울이면 마차가 아니라 썰매가 대중교통일 만큼 눈과 얼음의 세상이다.
그런데 성큼성큼 걸어오는 칼리스타 클론은 별로 두꺼워 보이지도 않는 외투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앞을 여미지도 않은 채로.
반면에 그녀의 옆을 따르는 남자는 모자에 목도리에 두툼한 외투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칼리스타가 남자의 팔을 잡은 채 사람들을 헤치고 길 쪽으로 나와 썰매를 향해 가까이 왔다.
“레타논에 다녀오는 길인가? 오늘 사람도 많은데 뒤통수만 보고도 용케 알아봤네?”
“예. 사실 칼리스타 님을 알아본 건 제가 아니고 포이입니다.”
“요런 기특한 토깽이를 봤나!”
칼리스타가 썰매 위로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포이의 귀 사이를 긁어 주자 포이가 꺄르륵거리며 웃었다.
“그래, 보려던 건 봤나?”
“예, 덕분에 잘 봤습니다. 오레스 씨도 계셨네요? 벌써 이렇게 밖에 나오셔도 됩니까?”
오레스는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감싼 목도리를 내리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
“예, 제이든 씨가 떠난 후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좋아지긴 뭘. 정신만 들었지 몸은 아직 회복이 덜 됐는데 이 녀석이 어찌나 나와 보고 싶어 하는지 할 수 없이 데리고 나왔다네. 애도 아니고 원.”
칼리스타는 투덜거리면서 오레스가 내린 목도리를 얼른 다시 코 위까지 올려주었다.
“아휴, 스승님, 그렇게 꽁꽁 싸매시면 숨도 못 쉰다니까요.”
오레스는 목도리를 느슨하게 늦추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8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라, 세상이 그리 많이 바뀐 것 같진 않은데도 자꾸 낯설게 느껴지네요.”
오레스는 마치 새로 눈을 뜬 어린 짐승처럼 생경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수상태에 8년이나 빠져 있다 깨어난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어 제이든이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는데 칼리스타가 제이든의 무릎을 톡톡 쳤다.
“마침 잘 만났네. 영주관으로 가는 길이지? 좀 태워 줄 수 있겠나?”
그녀는 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콩콩 두드렸다.
“옐로우 코우치의 썰매를 타고 왔는데 말발굽에 약간 문제가 있어서 내렸거든. 다른 썰매를 대여하러 갈 참이었는데 마침 자네를 만났네.”
“괜찮고말고요. 어서 타세요.”
오레스를 부축해 함께 썰매에 오른 칼리스타의 호탕하게 웃는 얼굴은 그대로 제이든에게 낮게 속삭였다.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오른쪽 길로 천천히 빠지게.”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훑고 있었다.
제이든은 천천히 말을 몰면서 말을 계속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일이 많았나 봐요.”
“콜레디오바와 센디니온의 공동 통치가 이례적으로 빨리 승인되었거든. 영지민들도 거부감 없이 환영하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들뜬 분위기인가요?”
“그렇지. 다들 기대감이 잔뜩이야.”
“레노아 양도 성에 있나요?”
“아니, 레노아는 마탑에 갔다네. 그 가짜 상자를 가지고 갔지. 검사가 필요해서.”
썰매가 오른쪽 길로 빠져서 복잡한 장터를 벗어나자 칼리스타는 말을 멈추고 어깨를 펴면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제이든이 묻자 오레스가 먼저 대답했다.
“아까부터 누가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이젠 그 눈길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군, 역시 그 장터에 있던 인물이 맞아.”
이제 썰매 가까이에 사람이 없는데도 칼리스타는 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실은 제자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 준다는 건 핑계고, 뭘 좀 조사하러 나왔거든.”
그녀는 굽슬굽슬한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말했다.
“셀리나 부인에게 마약으로 정제한 필레니아의 즙을 전해 준 사람이 약혼자였던 파비오의 부친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나?”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부친이 산간 지역의 주술사에게서 얻었다고 했었지요?”
“그래, 10년의 수명을 대가로 주었다고 했지.”
“예…….”
말만 들어도 흑마법이 관련된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비오 레노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냥꾼이었는데, 직업상 산간 지역 주민들과 안면이 있다지만 그 정도의 흑마법을 쓸 수 있는 주술사와 거래를 할 수 있었다는 게 이상하더군. 애당초 그런 주술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칼리스타는 파비오의 부친을 찾아가 말을 들어 보았다.
나이에 비해 놀랄 만큼 늙고 병들어 있던 그는 순순히 필레니아를 구한 경로를 털어놓았다.
늙은 사냥꾼은 시커멓게 그늘진 눈을 쓸면서 말했다.
“나도 마약에 손대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오. 게다가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십 년의 수명을 대가로 내놓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소?”
“…….”
“그래도 그때는 미켈레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때였거든. 생때같은 내 아들을 참혹하게 찢어 죽이고 내 딸이나 마찬가지인 셀리나를 억지로 첩으로 들인 놈이야. 그놈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을 마왕에게 팔 수도 있었소.”
그의 그늘진 눈 안쪽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소. 그놈이 마약에 중독되어 오늘내일 한다지? 수도로 압송되어 가서 처벌을 받는다는데, 부디 저절로 죽기 전에 최대한 중한 형을 받았으면 좋겠소.”
사냥꾼은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그놈에게 마약을 전해준 게 죄가 된다면 처벌은 달게 받겠소. 다 내 잘못이니 셀리나는 부디 용서해 주시오. 그 애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오.”
“그 주술사를 원래 알고 있었나요?”
칼리스타의 말에 사냥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그런 흑마법사를 알고 지낼 일이 뭐가 있겠소? 실은 브릴로의 장터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이 알려주었다오.”
아들이 죽고 어릴 때부터 딸처럼 예뻐했던 셀리나가 미켈레의 성에 끌려간 후 실의에 찬 그는 한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칩거했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위로도 있고, 자신보다 더 절망에 빠진 아내를 보며 억지로 힘을 내서 다시 생활을 시작했지만 가슴에 찬 울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브릴로의 장터에 나갔을 때 그에게 접근한 노인이 한 사람 있었다.
“골동품 노점을 펴 놓고 있던 노인인데, 날 안다고 하더군. 파비오와 셀리나의 소문을 들었다면서.”
그를 위로하고 미켈레의 악행에 함께 분노하던 노인이 은근히 말을 건네왔다.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그 사람이 영험한 주술사를 안다고 했소. 대가가 크지만 대신 틀림없는 방법을 내줄 거라고. 내 마음이 허해서 그랬겠지만 그 노인 말이 정말 그럴듯하게 들리더라고.”
칼리스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이야기가 낯설지가 않았다.
제이든의 표정을 본 칼리스타가 말했다.
“자네도 좀 이상하지? 이 얘기를 했더니 레노아도 꼭 자네 같은 표정을 짓더라고.”
칼리스타가 말을 이었다.
“그 상자, 콜레디오바의 상자 말인데, 책봉식 날 미켈레가 어떤 노인 이야기를 했었는데 혹시 기억나나?”
제이든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랬다. 너무 어수선한 와중에 미켈레가 내뱉은 말이라 잊고 있었지만 책봉식 날 미켈레는 가짜 상자를 만들어 준 게 골동품상 노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 생각납니다.”
“레노아에게 들으니 자네가 세렌토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던데.”
“예, 뭐 조금…….”
“그때도 골동품상 노인 이야기가 나왔다던데?”
“맞습니다. 저도 방금 그 생각을 했어요.”
세렌토의 딜런 경에게 붉은 손의 단검을 팔러 왔다던 골동품상 노인.
딜런도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노인의 말을 듣고 있으면 홀린 듯 그 말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미켈레나 파비오의 부친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약점을 뚫고 들어가서 말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 사기꾼들의 수법이긴 하지만 이 노인의 경우는 그 이상인 것 같지?”
“제가 듣기에도 뭔가 세뇌 마법 같은 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칼리스타와 제이든의 말을 듣고 있던 오레스 역시 무거운 말투로 끼어들었고 칼리스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어 답답해하는 오레스에게 바깥 바람도 쐬어 줄 겸 브릴로에 나와서 골동품상을 돌아 보는 중이었는데 자꾸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뭔가.”
오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후 왠지 감각이 많이 예민해졌습니다. 저도 누군가 지켜보는 눈길을 느끼겠더라고요. 그런데 장터의 어딘가라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디의 누군지는 짚을 수가 없었어요.”
이야기를 듣던 제이든이 썰매의 속도를 조금 높이면서 칼리스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관련이 있을까 해서 여쭤 보는데 세르지오 아르카니오라는 마법사는 누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