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13화 (113/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3화

31. 카티야

은빛 호수를 배경으로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하얀 피부와 보랏빛 눈, 신이 정교한 솜씨로 세공한 듯한 이마와 코와 턱선.

전에 이 사람을 봤을 때 메밀꽃의 정령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겨울 호수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눈의 여신 같네.

여자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면서 산호빛 입술을 열었다.

“왜 그래? 반갑지 않아?”

“반갑습니다. 반갑고말고요. 너무 반가워요. 카티야 씨.”

제이든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한동안 같이 다니면서 적응됐었는데 몇 달 만에 본다고 그새 또 적응이 안 되는 미모라니.

처음 봤을 때는 남들이 부르는 대로 카티야 양이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본신을 알게 된 후로는 쉽게 부를 수가 없어서 결국 카티야 씨가 되었다.

카티야가 정자에 앉으면서 제이든의 가슴에 걸린 은화를 바라보았다.

“잘 갖고 다니네.”

“예, 덕분에 목숨을 구했답니다.”

제이든은 은화가 화살을 막아 준 일을 이야기했다.

“헤어진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많은 일이 있었네?”

“그러게요.”

베로데인에서 카티야와 헤어졌던 것은 시월 중순이고 지금은 정월 중순이다.

겨우 석 달 만인데 무척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레타논에서 오는 길이야?”

“예.”

“기연을 만난 모양인데?”

카티야가 냄새를 맡듯이 그의 얼굴을 향해 얼굴을 숙이는 바람에 제이든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세요! 그렇게 생긴 얼굴을 남의 얼굴에 무턱대고 들이밀면 심장에 해롭다고요.

제이든의 얼굴이 빨개진 걸 본 카티야가 그의 뺨에 닿을 듯 숙였던 코를 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종을 울리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호수 위로 퍼졌다.

“에우카의 냄새가 나.”

“에우카를 아세요?”

그녀는 레타논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물론 알지. 내가 원래 북방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레타논보다 더 위쪽이 내 고향이야. 에우카와는 안면이 있어.”

그렇지 참, 카티야는 원래 북부의 영수였지.

그녀는 따뜻한 눈으로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를 바라보았다.

“에우카는 어둠의 마법에 걸려 지하에 갇혔었지. 언젠가 인연 있는 자가 오면 풀릴 거라고 했는데 그게 너였구나.”

카티야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어. 위대한 자의 손길이 닿은 고양이와 행운의 포에니 토끼를 데리고 있는 걸 보고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다시 제이든을 주시했다.

“영수에게 걸린 흑마법을 벗겨내고 자유를 줄 수 있다니. 너야말로 약속의 아이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약속의 아이요?”

“그런 게 있어. 세시온 다미에르가 그 약속의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진정한 약속의 아이는 그 후인인 모양이네.”

카티야는 제이든에게 물었다.

“에우카의 저주를 풀었다면 레타논에서 찾은 유물이 있겠지?”

“예.”

“레칸도르의 금척이니?”

제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티야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구나. 금척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그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카티야가 낮게 말했다.

“내가 말해주면 좋겠지만, 아직은 이르거든. 네가 스스로 알아내야 해.”

그녀는 무릎에 안은 포이를 토닥이고 손을 뻗어 제이든 옆에 앉은 아실리의 머리를 쓸어주더니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아무래도 춥지? 내게는 추억이 있는 장소이긴 해도 오랫동안 오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들렀더니 네가 왔네.”

“우연히 제가 들를 때 계셔서 너무 다행이네요. 그냥 섬만 보고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이든이 따라 일어나자 그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대접할 만한 게 없지만 구경은 시켜 줄게. 한 바퀴만 돌고 나가자.”

카티야가 포이를 내려놓고 앞장서자 제이든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실리와 포이도 그들 주변을 깡충거리며 따라왔다.

“전이랑 분위기가 좀 변하신 것 같아요.”

“응?”

“전에는 이렇게 말씀도 많이 안 하셨고, 조금 더 딱딱하셨던 것 같은데.”

앞에서 걸어가던 카티야가 걸음을 늦추고 제이든과 보조를 맞추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는 아주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나갔거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말을 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좀 어색했어.”

“그랬군요.”

“인간 친구를 만들지 않을 생각이기도 했고.”

카티야는 몸을 굽혀 작은 나뭇가지에 맺힌 얼음을 털어 주었다.

눈과 얼음 송이가 무거운 듯 휘어져 있던 작은 가지가 살짝 몸을 폈다.

“티아룬 호수의 겨울은 무척 아름답지만 늦은 봄 무렵에도 한번 와 보렴. 그때도 정말 아름답단다. 이 조그만 나무는 아주 예쁜 꽃을 피우지.”

“지금도 동화 속 나라 같은데요.”

눈과 얼음이 살짝 내려앉아 수정과 은으로 만든 세계처럼 반짝이는 섬에 눈의 요정 같은 카티야가 있으니 그 자체로 동화 같았다.

자그마한 섬이라 카티야를 따라 천천히 도는 동안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왔다.

카티야는 정자 위에 가지를 펼친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켰다.

“이 나무는 대륙에서 오로지 이 섬에만 있는 나무야. 나의 나무지.”

“이름이 있는 나무인가요?”

“아마릴리세 폴리타스테리.”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녀는 제이든을 보며 생긋 웃었다.

“‘아마릴리스와 폴리토스의 별’이라는 뜻이란다.”

“아…….”

“늦봄에 별을 닮은 꽃이 피거든.”

그 앞부분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라고 제이든은 생각했지만 눈치 있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오렴. 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니까.”

두 그루 나무가 정자 위에 펼친 나뭇가지는 끝부분이 서로 가볍게 얽혀서 마치 손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낮은 나뭇가지 두어 가닥이 정자 안까지 들어와 있었는데 카티야가 그 끝부분 쪽을 손으로 살짝 감쌌다.

그녀의 손 안에서 나뭇가지가 살짝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한동안 나뭇가지를 감싸고 있던 그녀가 손을 떼고는 제이든의 눈앞에 손을 펴 보였다.

흰 손바닥 안에는 은빛 광채를 띤 열매가 한 알 있었다.

보통 열매처럼 둥근 모양이 아니고 육각형 주사위처럼 각이 져 있어서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은 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밤톨 정도의 크기인데 은은한 향기가 났다.

“제철이 아니지만 내 나무니까 한 알 정도는 열리게 할 수 있어. 손 좀 줘 보렴.”

제이든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제이든의 손에 열매를 놓고 그의 손을 접어 주었다.

“선물이다. 이거 가지고 있으면 건강에 좋아. 그리고…….”

그녀는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 먹으면 살 수도 있어. 먹어야 할 일이 안 생겨야겠지만, 널 보아하니 어쩌면 한 번쯤은 써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어.”

그녀는 제이든의 손을 꽉 쥐면서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 다른 사람 먹이지 말고 꼭 네가 먹어야 해. 알았지?”

“예…….”

제이든이 대답하자 그녀는 생긋 웃었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얼굴도 봤고 선물도 줬으니까 이만 가보렴.”

“벌써요? 카티야 씨는 어디로 가시나요?”

“아, 오랜만에 에우카의 소식을 들었으니 레타논에 가서 에우카나 한번 만나볼까 하고.”

그녀는 장난스럽게 코 끝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가서 에우카랑 네 흉을 봐야지.”

카티야는 썰매까지 제이든을 따라와서 아실리와 포이를 직접 안아서 썰매에 넣어 주었다.

“우리 꼬맹이들도 오랜만에 반가웠다. 조만간 다시 보자.”

“이렇게 잠깐 얼굴만 보고 헤어지는 건 서운한데요.”

“또 볼 날이 있을 거야. 내 섬을 보러 와 줘서 고맙구나. 그냥 지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제이든이 말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 잠깐만.”

막 출발하려는 제이든에게 카티야가 손짓을 했고 제이든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자 얼굴을 가까이 댄 그녀가 귓속말을 했다.

“사실은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달큰한 향기를 풍기는 입술이 그의 뺨에 스쳤다가 떨어졌다.

카티야가 말의 옆구리를 두드리자 썰매가 출발했고 제이든은 얼떨떨하게 혼미한 상태로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흔들고 있는 카티야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진다 싶더니 호수 위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데 섬이 있는 쪽만 마치 흰 꽃비처럼 눈보라가 이는 듯 풍경이 흐려졌다.

안개처럼 흐려진 풍경 속에서 아름답고 커다란 은빛 동물의 형태가 아른아른 보였다.

은빛 표범의 그림자가 호수 위를 가로지르면서 북쪽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 * *

“어서 옵쇼!”

티아룬 호수에서 반나절 썰매를 달려 콜레디오바의 변경 지역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는데도 여관 주인은 활기찬 어조로 그들을 맞았다.

“이렇게 늦은 밤에 어디서 오십니까? 레타논 쪽이라고요? 아이구, 그쪽부터 여기까지는 인가가 하나도 없는데 고생하셨겠습니다. 목적지는 어디? 아, 콜레디오바 성이요? 그러면 또 하루를 꼬박 가셔야 되겠네요.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면 저녁 늦게 도착하실 겁니다.”

주인은 말을 쉬지 않는 도중에도 잽싸게 몸을 움직이면서 썰매를 뒤쪽 주차구역으로 인도하고 말을 마구간에 넣은 뒤 제이든 일행을 실내로 안내했다.

얼마 전 칼리스타와 함께 이 길을 지나갔을 때는 이 여관에 들르지 않고 바로 전 마을에서 하룻밤 묵었다.

그 여관에는 손님도 거의 없고 침울하고 한적한 분위기였는데 이쪽은 전혀 달랐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까?”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일 층의 식당이 시끌벅적했던 것이다.

손님이 많다 해도 이 시간이면 대부분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허허, 아닙니다. 요즘 콜레디오바와 센디니온에 경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들 들떠서 그렇지요. 외부 손님도 많고.”

“거기 젊은 손님도 이쪽으로 앉으시오. 아니 고양이랑 토끼가 있네? 야옹아, 이리 오렴, 고기 좀 줄까?”

“아니야, 야옹아, 이쪽으로 와라. 술 한잔 줄게.”

“이 사람이 미쳤나, 고양이가 술을 어떻게 마셔?”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웃었다.

-못 마실 건 없지만.

아실리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난 빨리 올라가서 포이를 재워야겠어. 제이든은 저 사람들 얘기 좀 듣고 와.

“그래.”

방을 정한 뒤 짐을 풀고 아실리와 포이를 방에 둔 뒤 제이든이 식당에 내려왔을 때에도 식당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젊은이, 이리 오쇼. 우리가 한턱 낼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암, 있다마다! 그동안 우리 콜레디오바를 개판으로 말아먹고 있던 영주가 마약 건에 걸려서 수도로 잡혀간 걸 혹시 아시오?”

“예, 알고 있습니다.”

“오호, 외지인 같은데 소식이 빠르구려. 미켈레 대공이 잡혀간 후 안젤리카 공녀가 자리를 이어받기로 했는데, 아 참! 우리 공녀님이 센디니온의 공자와 혼인하셨다오! 세상에 쥐도 새도 모르게 센디니온 공자와 혼인하시다니! 맨날 갇혀 살았다고 들었는데 대단한 아가씨 아니오?”

“예, 맞습니다.”

제이든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치자 말하던 사내들은 더 신이 나서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센디니온 쪽도 후계 구도가 좀 혼란스러웠는데 키리안 공자가 나이는 어려도 수완이 대단하더란 말이지. 혼인하자마자 싹 정리를 하고 영주 자리에 올랐더라고.”

“두 분이 혼인을 하시고 콜레디오바와 센디니온을 함께 다스리겠다고 황궁에 신청했는데 오늘 아침에 황궁에서 허가가 떨어졌다는군.”

“이런 일이 빨리 처리되는 일이 아주 드물다는데 신청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되었다잖아?”

“축하의 뜻으로 세금도 감면되고 마을 단위로 식량과 포목 지원도 나오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선대 대공 때는 살기 좋았는데 미켈레 대공이 영주가 된 후 얼마나 살기가 팍팍해졌어? 난 가산 다 정리해서 중부 쪽으로 이사를 갈까 고민했다고.”

“정리할 가산이나 있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콜레디오바와 센디니온을 키리안과 안젤리카 부부가 공동으로 다스리게 되는 모양이었다.

황궁의 승인도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되었고 영지민들의 기대가 잔뜩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