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2화
30. 레타논의 회색곰(4)
“그만 일어나요. 마을에 다 왔소.”
페트로가 깨우는 바람에 제이든은 눈을 떴다. 이미 날이 훤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오. 썰매가 덜컹거려도 셋 다 죽은 듯이 자던데. 숙소에 가서 씻고 요기하고 주무시오.”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보니 아실리와 포이도 그제야 눈을 비비며 머리를 드는 중이었다.
흔들리는 썰매에서 자느라 몸은 뻐근했지만 정신은 아주 맑고 머리가 개운했다.
꿈에서 본 건 아마도 이 마을, 그리고 레타논의 미래였을 것이다.
레타논을 지켜주는 영수 에우카가 저주에서 풀려난 덕분에 사람이 살 수 없던 황무지에 다시 생기가 돌아오게 된 모양이었다.
잘됐다. 에우카. 아니, 아직 잘된 건 아니지만 앞으로 잘될 걸 봐서 기분이 좋네.
머리카락 속부터 옷 속의 맨살까지 온통 모래가루가 들어차 있었는데 숙소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니 살 것 같았다.
씻고 나와서 아실리와 포이를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 준 뒤 털을 빗기고 있는데 여관 주인이 죽과 수프, 부드러운 빵과 삶은 감자 등을 가지고 올라왔다.
“페트로 말을 들으니 밤새 유적 안에서 고생했다면서. 따뜻한 거 좀 들고 주무시오.”
“고맙습니다.”
“푹 주무시고 나서 아래층에서 사람들한테 곰 이야기 좀 해주시구려. 오랜만에 레타논에 곰이 돌아왔다고 해서 어르신들이 흥분했거든. 진짜 곰을 본 게 맞냐고 페트로를 쪼아대는 중이지.”
“아, 네.”
“옛날에는 곰을 신으로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라, 아직도 그런 풍토가 좀 남아 있으니 양해하시고.”
주인은 웃으면서 문을 닫아 주었고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는 이번에야말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제이든은 황금연못 마을에서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했다.
이제 콜레디오바를 거쳐 다시 집을 향해 남하해야 했다. 콜레디오바에 공용 공간 이동 포탈이 있으려나? 세렌토에는 있는 것 같던데. 콜레디오바에 없으면 세렌토까지는 썰매를 타고 거기서 공간 이동 포탈로 갈아타야지.
전날 저녁 황금연못 마을의 몇 안 되는 주민들은 다들 여관 일 층의 식당에 모여 제이든에게 곰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에우카의 이야기를 제대로 다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유적 속에서 발견한 아기 곰이고, 사람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 곰을 따라 유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 정도를 이야기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상당히 흥분했다.
“은빛 털의 곰이라니, 내가 증조할아버지께 들은 말이랑 같다니까.”
“곰이 돌아오면 레타논이 다시 살아난다는 그 얘기 말이여? 나도 알지.”
“에이, 그냥 회색곰 아니에요? 레타논에 사람 안 사는 게 오래되니까 짐승들이 늘어난 게지, 저기 다하르 쪽 산에서 사냥꾼들을 피해 내려왔나 보죠.”
“어허, 젊은 것들은 모른다니까. 보통 곰이 사람을 안내해서 지하에서 빠져나오게 해주겠어? 곰의 신은 옛날부터 레타논의 주인이었다고.”
“주인은 무슨, 곰이 돌아오면 뭘 해요. 다 늙은 사람들 몇 명 빼고는 토박이 주민도 없는데.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치안대 빼고는 아무도 안 남을걸요.”
노인들의 말에 어깃장을 놓는 젊은이는 레타논에 몇 명 없다는 젊은 주민이었다.
그는 레타논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이미 소년 시절에 레타논을 떠나서 외지로 돌아다니다가 삼 년 전에 돌아와서 상단의 안내자 일도 하고 사냥꾼 일도 하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전 이번 봄에 남쪽으로 떠날 거니까요. 이번에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젊은이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일찌감치 자리를 떴고 남은 사람들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하기는 밭에 농작물을 심어도 잘 자라지 않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여기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는데, 우리 죽고 나서 이 마을까지 없어지면 근무자로 오는 치안대 빼고는 아무도 안 남을지도 모르지.”
노인 한 사람이 자조하듯 탄식했고 식당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몇 사람 되지 않는 주민들의 한숨 소리만 들릴 뿐.
“아닙니다. 어르신, 레타논은 꼭 다시 좋아질 겁니다. 주민들도 늘고 농작물도 잘 자라는 좋은 곳이 될 거예요.”
정적을 뚫고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젊은이 덕담이야 고맙소만 그걸 누가 믿겠소.”
“제가 보는 눈이 좀 있습니다. 지하 유적 안에서 신비한 곰도 만났잖습니까?”
제이든이 싱긋 웃으면서 노인의 손등을 상냥하게 두드렸다.
“유물 감정사라고 유물만 잘 보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장담하는데, 유적 안에서 만난 곰은 보통 곰이 아니에요. 레타논에 활기가 다시 생길 겁니다. 몇 년만 참고 기다려 보세요.”
“그러고 보니 그 곰이 유난히 이 감정사 양반을 따르는 게 놀랍더라고. 보통 사람은 아니다 싶더군.”
길잡이 페트로가 제이든을 보며 말했다.
“그래? 정말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듣기가 좋네. 젊은이 말을 믿고 오는 봄에는 밭에 뭐 좀 심어 볼까.”
시무룩해 있던 노인도 그 말을 듣고 조금 기운이 나는지 웃음을 되찾았다.
-제이든, 혹시 꿈을 꿨어?
방에 돌아왔을 때 아실리가 물었다.
“응, 떠도는 섬에서 돌아올 적에 썰매에서 꿈을 꿨는데 레타논이 다시 발전하는 꿈을 꿨어. 주민들도 늘고. 많이 커진 에우카가 숲에 있었어. 난 이거 에우카가 보여준 예지몽이라고 믿어.”
-나도 믿어. 나도 같은 꿈을 꿨거든.
아실리가 초록색 눈으로 제이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너도 그런 꿈을 꿨어?”
-응, 제이든에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아직 말할 틈이 없어서 못 했어. 나도 예지몽이라고 생각했어.
“신기하네. 너까지 같은 꿈을 꾸다니.”
제이든과 아실리는 포이를 바라보았다.
“혹시 포이도 그런 꿈을 꿨니?”
“포잇, 포잇!”
까만 귀를 흔들며 폴짝폴짝 뛰는 포이를 보니 꿈을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비슷한 꿈을 꾼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 나중에 다시 에우카를 만나러 와 보자. 그때는 레타논이 더 좋아져 있을 거라고 믿어.”
“야옹!”
“포잇!”
* * *
간밤에 또 눈이 와서 세상이 온통 은세계였다.
얼어붙은 티아룬 호수는 여전히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고 에우카가 잠들어 있었던 신목도 그대로 서 있었다.
레타논을 떠난 제이든 일행은 콜레디오바 쪽을 향해 남하하는 중이었다.
“실리, 잠깐 멈춰서 포장 치고 갈게.”
숲을 빠져나와서 호수 위로 들어서며 제이든이 말했다.
호수는 사방이 완전히 트여 있는 데다 얼음판이라 숲이나 언덕 지대를 지나올 때보다 훨씬 춥다.
포이는 워낙 추위를 타지 않지만 아실리는 고양이라 추운 걸 싫어하니까 여기서 썰매에 포장도 치고 모포와 난로 단속도 한 번 더 하고 가는 게 좋을 듯했다.
-아니, 괜찮아.
“정말?”
제이든이 놀라 돌아보자 썰매 안쪽의 모포 속에서 아실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에우카가 안아줬던 날 이후로 많이 안 춥게 됐어. 난로 있으니까 견딜 만해. 포이가 바깥 보면서 가고 싶어 하니까 포장 안 쳐도 돼.
포이는 아예 뒷발로 선 채 썰매 가장자리에 앞발을 걸치고 바깥 구경을 하고 있었다. 올 때도 본 풍경인데 다시 봐도 좋은가.
제이든도 에우카가 안아줬던 날 이후로 확실히 추위를 덜 느끼게 됐는데 아실리와 포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포이야 원래도 추위를 안 타긴 했지만.
“그럼 우리 저쪽 섬 한번 보고 갈래?”
티아룬 호수의 가운데에는 연인들의 결혼을 축복한다는 섬이 있다.
안젤리카 콜레디오바와 키리안 센디니온이 세렌토에서 혼례식을 허락받지 못한다면 여기 와서 혼례를 올리려고 했던 섬.
이 섬이 카티야의 축복을 받은 섬이라 해서 제이든은 북상할 때도 들러 보고 싶었지만 추운 겨울날 길을 제법 돌아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냥 지나쳤었다.
에우카 덕분에 아실리도 추위를 많이 느끼지 않게 됐으니 한번 들러 보고 갈까. 언제 여기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아실리와 포이가 동의하자 제이든은 썰매를 호수 중앙 쪽으로 몰았다.
거북 모양의 섬이 멀리 보였다.
마법 결계 때문에 섬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는데, 사람을 가리는 기준이 뭔지는 모르지만 만약 오를 수 없다면 그냥 밖에서라도 섬을 한번 보고 갈 참이었다.
고요한 겨울 공기 속에서 썰매가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말의 겨울신이 따각따각 얼음을 두드리는 소리가 호수 위로 퍼져 나갔다.
이 호수 밑에는 마탑의 요양 시설인 운디니움이 있는데, 오레스 씨는 무사히 퇴원했으려나? 아니면 아직 여기 있으려나.
포이도 운디니움에서 물고기들을 보며 떠다니던 생각이 났는지 머리를 썰매 밖으로 빼고 호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포이, 떨어질라. 조심해.”
“포잇!”
거북 모양의 섬은 아주 작았다.
축구장 절반 크기보다 조금 클 정도일까. 한쪽 끝에서 다른 쪽이 보일 정도였다.
섬이 사람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섬 가장자리에서 더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는데 제이든의 썰매는 아무 문제 없이 섬 가장자리까지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만 부두가 호수 쪽으로 뻗어 있었다. 제이든은 썰매에서 내려 물이 얼지 않았을 때라면 배를 묶을 듯한 말뚝에 말고삐를 묶었다.
섬에는 큰 나무도 없고 사람의 가슴에서 허리 정도 올라오는 키 작은 나무들과 무릎 정도까지 올라오는 더 작은 식물들이 잔잔하게 펼쳐진 채 하얀 눈송이들을 꽃처럼 달고 있는 게 동화 속 공간처럼 예뻤다.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섬 중앙의 낮은 언덕 위에 하얀 정자가 서 있었다.
큰 나무는 딱 두 그루, 섬 한가운데 있는 정자 양쪽으로 제법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정자를 감싸는 것처럼 서서 가지를 정자의 지붕처럼 펼치고 있었다.
제이든이 천천히 섬 가운데 쪽으로 발을 옮기는데 포이가 갑자기 깡충깡충 뛰면서 정자를 향해 달려갔다.
“포이, 기다려, 같이 가.”
처음 와 보는 곳인데 혼자 달려가는 게 걱정이 되어 제이든과 아실리도 걸음을 빨리했다.
정자에 사람이 있었다. 머리까지 덮는 옅은 갈색 외투를 입은 사람이 제이든 일행에게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호수에 배나 썰매도 없었는데 이 넓은 호수 중간의 정자에 사람이 있을 수 있나?
“포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정자를 향해 달려가다니!
놀란 제이든이 포이를 부르며 쫓아가는데 정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머리를 이쪽으로 돌렸다.
일어서더니 가까이 오는 포이를 향해 몸을 굽히고 손을 내민다.
“포이, 잠깐만.”
제이든보다 앞서 포이를 쫓아간 아실리가 멈춰 서더니 안심한 듯 그 사람의 발치에 살짝 머리를 비볐고 그 사람이 포이를 안아 올렸다.
외투에 달린 큼직한 모자를 뒤로 넘기자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바람이 불고, 정자 위 나무에 맺혀 있던 눈송이들이 흰 꽃보라처럼 정자 위로 날렸다.
포이가 꺄르륵 반가운 듯 소리를 내며 그 사람의 뺨에 머리를 비볐고 눈꽃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가운데 신비스러운 보랏빛 눈이 제이든을 향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제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