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11화 (111/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1화

30. 레타논의 회색곰(3)

“그럼, 이 구멍으로 샘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제이든이 묻자 에우카는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구멍 옆에 앞발을 가져다 댔다.

자, 날 믿고 한번 들어가 보세요! 하는 듯한 자세였다.

일어서서 배낭도 다시 정리하고 옷도 추스른 제이든이 실타래를 다시 감았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고 유적 안에 늘어뜨렸던 실타래를 감아들인 후 잠시 망설이던 제이든은 에우카를 믿고 실타래를 끊었다.

공간의 왜곡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바깥과 연결된 실타래를 그대로 지니고 들어갔다가 뭔가 문제라도 생길까 싶어서.

“보자, 그리고 이건 이대로 감고 가기 좀 찜찜한데.”

팔꿈치에서부터 손목까지 촘촘하게 감겨서 반짝이고 있는 레칸도르의 금척이 좀 마음에 걸렸다.

함부로 사람들 눈앞에 내놓을 수 없는 물건인데 이렇게 자랑스럽게 팔에 감고 다녔다간 팔 한 짝 베어 가겠다고 덤비는 자들이 속출할 터였다.

“저 혼자 알아서 두루루 감기던데 푸는 건 어떻게 하지?”

손목에 단단히 감긴 금척의 한쪽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자 의외로 쉽게 풀렸다.

길쭉한 금빛 뱀처럼 늘어진 금척을 들고 이걸 어떻게 배낭에 넣어야 하나, 한번 말아볼까 하는데 아기 곰 에우카가 제이든의 허리를 톡톡 쳤다.

“허리?”

고개를 끄덕이는 에우카를 본 제이든이 입고 있던 웃옷을 들치고 금척을 허리에 감아 보았다.

한쪽 끝이 허리에 닿자마자 마치 여기가 내 자리라는 듯 금척이 알아서 허리에 착 감겼다.

원래 허리띠로 나온 것처럼 허리에 딱 맞게 감긴 금척을 보며 아실리가 감탄했다.

-그거 길이 조정도 되나 봐.

“응, 알아서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하는 것 같아.”

제단의 테두리로 있을 때와 제이든의 팔에 감겼을 때, 허리에 감겼을 때 금척의 길이가 다 달라졌던 것이다.

“그럼 이제 가볼까.”

웃옷을 금척 위로 내린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품에 안았다.

“에우카, 너도 가니?”

설마 이 지하에 혼자 남는 건 아니겠지 싶어 에우카를 보니 아기 곰은 먼저 가라고 손짓, 아니 앞발짓을 했다.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혹시라도 공간 이동 중에 놓치기라도 할까 싶어 아실리와 포이를 꼭 껴안은 제이든이 벽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 뛰어든 것처럼 몸이 부유했다. 그동안 써 본 공간 이동 장치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일렁거리는 물안개 속에서 슬슬 숨이 답답해진다고 느낄 때쯤 시야가 툭 터지면서 마치 공간이 그들을 뱉어내듯이 어딘가로 떨어뜨렸다.

춥다.

갑자기 밀려드는 한기 때문에 제이든은 후르르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무릎 밑에 눈이 쌓인 게 보였다. 찬바람에 순식간에 뺨이 싸늘해지면서 등에 소름이 돋았다.

컹컹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우우우 늑대가 화답하는 듯한 울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거 샘물 바깥이 아니네. 완전히 떠도는 섬 바깥으로 나온 것 같은데?

그들은 유적 바깥 황무지에 나와 있었다.

하늘이 희끄무레한 게 날이 밝을 무렵인 듯했다.

머리 위의 공중,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일렁거리면서 열리더니 은회색 덩어리가 쿵 떨어졌다.

꾸애앵!

에우카가 눈밭에 엉덩방아를 찧고는 뒤뚱뒤뚱 일어나서 앞발로 엉덩이를 만졌다.

“에우카도 왔구나, 어우, 갑자기 바깥으로 나오니까 너무 춥다.”

제이든이 몸을 떨자 에우카가 팔을 벌리더니 뒷발로 서서 그의 허리를 폭 감싸 안았다.

곰이 감싸 안은 자리로부터 따스한 온기가 배어 나와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어라? 이제 춥지 않네?”

“꾸우웅!”

“실리, 어때?”

-금방 따뜻해졌어. 에우카의 힘인가 봐.

추운 걸 싫어해서 잔뜩 몸을 움츠리고 제이든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아실리가 몸을 펴면서 말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컹, 컹, 짖는 소리가 나면서 저만치 언덕 모퉁이를 돌아온 회색 물체가 점점 커졌다.

“쥬노!”

달려온 늑대는 에우카를 보고 경계하듯이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쥬노, 괜찮아, 친구야, 친구.”

제이든이 쥬노를 달랬고 에우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지막하게 쿠웅쿠웅 울었다.

몇 번의 으르렁거림이 서로 오가더니 쥬노는 납득한 모양이었다.

온순해진 늑대는 꼬리를 흔들면서 에우카를 받아들이고 돌아서서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눈 덮인 나지막한 언덕 하나를 돌아가니 세워 둔 썰매와 그 옆 화롯불 옆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페트로가 보였다.

“아니, 어떻게 그쪽에서 오쇼?”

페트로가 제이든 쪽으로 오다가 에우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면서 창을 잡았다.

“웬 아기 곰까지 달고, 설마 유적에서 곰을 찾은 건 아니겠지.”

“곰을 찾은 거 맞아요.”

제이든이 말했다.

“유적 안에 있더라고요. 몰래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나 봐요. 얘 따라서 나왔더니 저쪽, 언덕 뒤였어요.”

“쥬노가 갑자기 뛰어가길래 뭐가 나왔나 했더니, 세상에, 그럼 떠도는 섬의 통로가 또 있었단 말이오? 어디, 어디요? 내가 좀 봐야지.”

길잡이 본능이 발동한 페트로가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가려는 걸 제이든이 말렸다.

“나오자마자 통로가 사라졌어요. 못 찾을 거예요.”

그래도 페트로는 테살리온의 낚싯대를 든 채 제이든 일행이 떨어진 자리까지 가보았다.

“흠, 엉덩방아 찧은 자국이랑 발자국이 여기서 시작된 걸 보면 통로가 여기 열렸던 게 맞는데.”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고 눈 쌓인 바닥까지 헤쳐보는 페트로를 보며 내심 미안했지만 에우카의 힘으로 공간이 열린 걸 설명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입구를 찾지 못한 페트로는 못내 아쉬워하면서 날 좋을 때 다시 와 잘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썰매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이제 퇴각해도 되는 거요?”

“예. 탐사는 성공적이었고 제가 원하던 건 다 봤습니다.”

“레타논에 곰이 다시 나타나다니,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겠네.”

페트로는 길잡이지만 사냥꾼이기도 해서 아기 곰에게 눈독을 들이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친근하게 아기 곰에게 빵을 나눠주고 귀한 말린 과일까지 주었다.

“이건 나도 정말 아껴 먹는 건데, 눈보라 속에서 노숙할 때나 기력 보존하려고 조금씩 먹는 건데, 옛다, 인심 썼다!”

꿀에 절여 말린 라벤더베리와 이름 모르는 과일을 에우카에게 주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그를 제이든이 신기하게 보자 페트로가 말했다.

“외지인은 모르겠지만 레타논에선 곰을 행운의 동물로 보거든. 그래서 옛날부터 곰 사냥은 금지였다오. 워낙 곰이 나타난 지가 오래되어서 사냥할 곰도 없었지만 곰이 나타나면 레타논이 다시 풍요로워질 거라는 옛이야기도 있고.”

에우카를 바라보고 있던 페트로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런데 저 곰은 공격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네. 저래 가지고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려나. 토끼에게 밥을 뺏기는데?”

포이가 에우카에게 다가가서 애교 있게 간식을 요구하자 에우카가 순순히 간식을 나눠 주는 걸 보고 하는 말이었다.

은회색 아기 곰과 하얀 아기 토끼는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말린 과일을 나눠 먹더니 눈밭을 뛰기 시작했다.

에우카는 겅중겅중 뛰고 포이는 깡충깡충 뛰고 거기에 쥬노가 합세했다.

곰과 늑대와 토끼가 눈밭에서 뛰고 구르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면서 아실리는 화로 곁의 모포 속으로 기어들었다.

-어린 것들이라 기운이 넘치네. 역시 겨울이 어울리는 애들이야.

페트로와 제이든은 양철 컵에 따른 뜨거운 음료를 마시면서 세 마리가 뛰고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자유를 얻은 에우카가 눈밭을 신나게 뛰는 모습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유적 탐사도 성공적으로 하신 것 같고.”

페트로가 어깨를 추스르고는 제이든 쪽을 보았다.

출발 때보다 그를 보는 눈빛이 좋았다.

“감정사나 마법사는 고리타분한 책상물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배우는군. 체력이나 정신력도 만만치 않으신 것 같고. 마법 화로가 있다고는 해도 외지인이 이런 추위에 불평 한마디 안 하는 건 보기 드문데.”

아, 그건……. 제이든은 말을 삼켰다.

레노아의 마법 화로도 도움이 되지만 아까 에우카가 끌어안았던 이후로 확실히 추위가 덜 느껴졌다.

짐을 정리해서 썰매에 싣고 황금연못 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 포이가 서운한 듯 에우카의 발을 껴안았다.

“에우카는 어떻게 하지?”

제이든이 망설이자 페트로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곰이 감정사님을 잘 따르는데 같이 데리고 가면 어떻소? 레타논의 사람들이라면 아기 곰을 반가워할 거요.”

“지금이야 아기 곰이니까 마을의 마스코트처럼 대할지 몰라도 나중에 커지면 어떻게 해요?”

제이든은 망설였다. 야생 동물을 사람이 키우는 것은 서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게다가 에우카는 일반 야생 동물도 아니다. 영력을 지닌 영수인데 마을에 살려고 할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에우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숲 쪽으로 몇 발 걸음을 떼었다.

“꾸우우웅!”

곰은 인사하듯 밝은 소리로 울었다.

“숲으로 돌아가려나 봐요.”

“흠,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하는 짓 보면 꽤 영리한 것 같고, 몸도 건강하고 영양도 충분해 보이니 어딘가 부모가 있을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던 페트로가 화들짝 놀라며 제이든을 돌아봤다.

“빨리 갑시다. 괜히 어미 곰이라도 만나면 큰일이요.”

그럴 리는 없지만 말 나온 김에 잘 되었다 싶어 제이든도 썰매에 배낭을 올렸다.

아직 에우카 옆에 있는 포이를 데리러 가서 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잘 지내, 에우카, 도와줘서 고마워. 꼭 영력을 모두 회복하길.”

에우카는 고양이처럼 목에서 골골 울리는 소리를 내며 제이든의 가슴에 머리를 비빈 후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아실리와 포이에게도 코를 비비고는 숲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겨울 나무들 사이로 아기 곰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썰매로 돌아왔다.

“그새 정이 드셨나 봅니다.”

“예. 생명의 은인인걸요. 저 아기 곰이 없었다면 유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페트로는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유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역시 관록 있는 길잡이답게 입이 무거워서 좋았다.

썰매의 포장을 치고 휴대용 난로를 끌어안고 모포를 덮자 긴장이 풀려서 잠이 왔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제이든은 어느새 까무룩 잠 속에 빠져들었다.

꿈속에 황금연못 마을이 보였다.

같은 마을이지만 어제 본 황량한 마을이 아니었다. 집이 서른 채도 넘게 들어서 있었고 식당이며 여관, 가게처럼 보이는 건물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몇 명 거리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마을 외곽으로 밭이 형성되어 있고 길도 닦여 있었다.

여름인지 숲이 푸르다. 나무가 많이 늘어 있었고 작은 시내가 흐르는 것도 보였다. 어제 지나면서 봤을 때는 물이 말라붙은 지 오래되어 강의 흔적만 있던 곳이었다.

제이든의 시야가 마을을 떠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숲이 무성해져 있었다.

숲을 헤치고 안쪽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동안 토끼며 사슴, 여우 등의 동물들이 지나갔고 나무 밑둥을 긁으며 먹이를 찾는 멧돼지도 보였다.

숲의 가장 깊은 곳, 커다란 나무 등걸 뒤에서 에우카가 나타났다.

조금 전 헤어졌을 때보다 거의 두 배 가깝게 커져 있었다.

에우카는 높은 바위 언덕 위로 올라갔다.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마을까지 보이는 곳이었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숲과 마을을 바라보며 에우카는 하늘을 향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와 함께 영력이 에우카의 몸을 채우자 회색곰은 기분 좋게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레타논의 황무지에 생명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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