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10화
30. 레타논의 회색곰(2)
“위험해!”
제이든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아기 곰에게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아기 곰은 만세를 부르듯 두 앞발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채 쿠애앵 제 딴에는 힘껏 포효했다.
그 앙증맞은 포효가 무슨 위협이 될까 싶은데 놀랍게도 덮쳐 들어오던 회색 괴수가 주술에라도 걸린 듯 앞으로 덮치는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위, 위험……하지 않나?”
제이든이 그 모습을 보면서 말을 더듬자 아기 곰은 제이든을 향해 머리를 돌리더니 눈을 살짝 접으면서 입꼬리를 방긋 올렸다.
곰이 웃네.
“포이잇!”
아실리의 목덜미를 부둥켜안고 있던 포이가 폴짝 떨어지더니 아기 곰을 향해 깡충깡충 달려왔다.
아기 곰 앞에서 포이가 팔짝팔짝 뛰자 아기 곰도 곰 특유의 동작으로 머리를 양쪽으로 저으면서 콩콩 뛰는 게 둘이 서로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모양새였다.
“실리, 얘 그때 그 아기 곰이지? 나무 구멍에 끼었던 곰.”
제이든이 아실리를 돌아보며 묻는데 아실리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제이든, 저것 좀 봐.
회색 괴수의 머리 쪽이 천천히 다시 돌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 회색 괴수는 덤벼들던 자세 그대로 다시 석화되었다.
“다시 석상이 되어 버렸네.”
제이든은 헐떡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땀을 닦았다. 머리와 얼굴은 물론 몸까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괴수가 석상이 된 거, 저 아기 곰 때문일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쟤는 이 유적이랑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전에 봤을 때는 호숫가에서 봤으니까 여기랑은 거리가 상당히 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걸까? 샘물에서 떨어지진 않았는데, 다른 통로가 있나?
머리 위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물을 바라본 제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통로가 있으면 좋겠다. 밧줄 타고 올라가서 또 헤엄쳐서 물 밖으로 나갈 생각 하니까 아득하네. 지금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단 말야.”
괴수에게 쫓기고 조각상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얼마나 힘을 썼던지 목구멍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괴수가 석상으로 돌아가고 나자 단번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아기 곰 친구는 어디서 들어왔니?”
제이든이 무릎에 팔을 짚고 턱을 고인 채 아기 곰을 향해 묻자 아기 곰이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를 돌아보았다.
아기 곰은 뒤뚱뒤뚱 동굴 벽으로 다가가더니 두 앞발을 벽에 턱 짚고 이마를 콩 소리가 나게 벽에 갖다 댔다.
뭔가 벌서는 자세 같아서 왜 저러나 하는데 곰이 머리를 댄 자리로부터 파도처럼 원을 이루며 물결 같은 파장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어!”
놀라며 보고 있는 와중에 원은 점점 커지더니 가운데 벽에 구멍이 뻥 생기면서 곰이 구멍 속으로 털썩 쓰러졌다.
구멍 안으로 빠져들어 가듯이 앞으로 넘어져서 상체는 구멍 속에 엎어지고 하체는 동굴 안에 남아서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뒷발을 버둥버둥 흔들던 아기 곰은 어찌어찌 중심을 잡았는지 엉덩이를 뒤로 빼고 뒤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와 상체를 구멍 밖으로 빼낸 아기 곰은 자랑스럽게 제이든을 바라보면서 앞발의 발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귀, 귀엽잖아.
칭찬해 달라는 듯 벽의 구멍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얘 공간을 열 수 있나 봐.
“그러게, 이 유적에 한해서만 가능한 건지 밖에서도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실리와 제이든이 이야기하는 중에 포이가 폴짝 뛰면서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으앗, 포이야!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제이든이 몸을 날려 포이를 붙잡으면서 구멍 옆에 서 있던 곰의 통통한 배와 부딪쳤다.
꾸애앵!
엉덩방아를 찧은 아기 곰이 불퉁한 얼굴로 제이든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벌떡 일어났다.
“헉, 미안, 미안!”
갑자기 확 다가오는 곰이 공격하려는 건가 싶어 제이든이 손사래를 치며 물러서는데 가까이 온 곰은 앞발로 제이든의 팔을 툭 건드렸다.
아기 곰이 제이든의 팔에 감긴 금척을 건드리자 금척이 마치 응답하듯 반짝였다.
“이거?”
“꾸우웅!”
“혹시, 너 달라는 거야?”
아기 곰은 큼직한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곰은 한쪽 앞발을 제이든의 팔 위에 올린 채 다른 쪽 발로 그의 다른 손을 잡아끌었다.
제이든이 영문을 모르는 채로 팔에 감긴 금척과 그 위에 놓인 곰의 앞발 위에 손을 올리자 눈앞에 뽀얀 안개가 끼면서 먼 옛날의 풍경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 * *
아득히 오래전 레타논의 풍경, 지금보다는 숲과 언덕이 더 많아 보였다.
작은 집들이 모인 마을이 있고 두건을 쓰고 옅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현재의 카이엔 인들보다 몸집이 좀 작고 짙은 피부에 약간 다른 생김새였다.
사냥을 나가는지 말과 낙타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동물을 타고 숲으로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현재의 레타논보다 숲이 무성해서 동물도 더 많아 보였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사원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벽은 막혀 있지 않고 간격을 두고 박은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안쪽까지 보였는데 중앙 부분에 제단이 있고 그 뒤에 서 있는 건 곰 모양의 석상이었다.
당시 레타논의 깊은 숲에는 곰의 형태를 지닌 영수(靈獸)가 살고 있었다.
레타논의 고대인 부족은 곰을 숭배하여 사원에도 곰의 석상을 모셨고 산에도 곰을 모시는 신당을 두고 기도를 하고 해마다 처음 수확하는 과일이며 농작물 등을 올리곤 했다.
그들은 곰의 신을 숲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에우카라고 불렀는데, 이름을 얻고 믿음을 받은 곰은 점점 더 영성이 강해졌다.
시간이 태엽을 감듯 빨리 흘러갔고 제이든의 눈앞에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조금씩 커지면서 작은 도시를 이루어갔다.
시장이 커지고, 다른 곳에서 오는 상행이 지나가고, 상단을 꾸려서 상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보이고, 차차 건물도 커지면서 도시가 발전해 갈 무렵, 산 너머 어디선가 마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수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제이든의 눈앞에 옛 흑백영화 장면처럼 흐린 화면으로 흘러갔다.
싸우고, 싸우고, 마수와 사람들은 서로 싸우면서 서로 강해졌고 마수를 죽이고 또 죽여도 마수는 어디선가 계속 나타났다.
마수가 들판을 점령하고 사람들이 쳐 놓은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도시의 입구로 침범할 때 숲에서 에우카가 나타났다.
거대한 은회색 곰은 사람을 대신해 도시의 입구를 지켰고 살이 찢기고 뼈가 튀어도 물러서지 않았다.
곰의 앞에는 마수의 시체가 언덕을 이루었다.
에우카의 참전에 힘입은 인간들은 그와 함께 싸워서 마수들을 도시 밖으로 몰아내고 방벽을 새로 쌓았다.
하지만 싸워도 싸워도 끝없이 나타나는 마수에 지친 사람들은 결국 땅을 파고 지하로 숨어들었다.
지하에 길을 내고, 방을 짓고, 우물을 파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하 도시가 틀을 갖춰 갔다.
지하로 들어간 레타논의 사람들은 도시의 문을 지켜 준 에우카를 잊지 않고 중앙 부분에 에우카를 위한 방을 짓고 에우카의 석상을 모셨다.
은회색의 영수는 숲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석상에 한 줄기 영력을 이어 놓았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지하 도시를 가꾸었지만 지하 생활이 길어질수록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땅 위의 마수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레타논에서 마지막 인간이 사라진 후 고대인들의 도시는 유적으로 남았고 에우카는 쓸쓸하게 북방의 숲으로 떠났다.
인간이 사라진 레타논의 땅은 메마른 황무지로 변했고 마수와 괴물들만이 들끓는 곳이 되었다.
세월이 지난 후, 에테노른의 에트루리안이 원정을 올 때까지.
에트루리안과 그의 기병들이 7년의 전쟁 끝에 마수가 나오는 게이트를 닫고 난 후, 레타논 주변에 다하르와 엘데온 왕국이 생긴 후에도 레타논은 사람이 살지 않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법왕국 아르카니오에서 왕권의 상징인 레칸도르의 금척을 훔쳐낸 흑마법사가 레타논까지 도망쳐 왔다.
한때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이름을 떨쳤던 왕궁의 대마법사였으나 흑마법에 빠져 무고한 자들의 목숨을 제물로 쓴 이후 대륙의 공적이 된 자였다.
아르카니오의 마법사와 기사들로 구성된 추적대를 피하던 그는 우연히 지하 유적의 입구를 발견한 뒤 지하로 숨어들었다.
평생 왕가에 봉사했는데 흑마법을 익힌 후 쫓기게 된 처지에 복수심을 품었던 흑마법사는 지하 유적에서 발견한 제단에 금척을 놓고 제단의 곰 석상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마법을 걸었다.
금척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도록.
석상과 연결되어 있던 에우카의 영혼은 석상에 끌려와 갇히고 말았다.
유적에 들어와 금척에 가까이 오는 사람이 생기면 석상은 회색 괴수가 되어 사람을 해쳤다.
석상 속에 갇힌 에우카의 영혼은 그때마다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석상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수백 번 몸부림쳤지만 어둠의 마법은 에우카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해, 젊은 세시온 다미에르가 아실리와 함께 찾아왔던 그때 북쪽의 은룡 엘리미네온이 인연을 느끼고 레타논의 하늘에 나타났던 그 날까지.
엘리미네온은 세시온과 아실리 일행을 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석상에 갇힌 에우카의 영혼을 빼내주었다.
오랜 세월 석상에 갇혀 있는 동안 에우카의 육신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고, 영력도 손상되어 원래의 형체를 구현할 수 없었던 에우카는 겨우 작은 아기 곰의 형태로 현신할 수 있었다.
엘리미네온은 아기 곰이 된 에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를 석상에서 꺼내 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풀어 줄 수는 없구나. 생명을 대가로 너를 금척에 묶어 놓은 저주가 워낙 독하니 후일 인연이 있는 자가 오는 날을 기다려라. 금척을 알아보고 가져갈 수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너도 완전한 자유를 얻을 것이니 마음이 내킨다면 그를 도와주렴.”
아기 곰이 된 에우카는 신력을 되살리기 위해 수면에 들어야 했다.
영혼이 금척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던 에우카가 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영력이 충만한 곳은 티아룬 호숫가의 신목이었다.
에우카는 그 안에 자리를 정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오래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에우카의 영력은 조금씩 되돌아왔고 몸도 조금씩 자랐다.
그동안 떠도는 섬 주변에 다가온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에우카의 잠을 깨울 수 있었던 인연은 없었다.
고양이와 토끼를 데리고 와서 나무 구멍에서 그를 꺼내 주고 따뜻한 빵과 스튜를 먹여 준 어떤 청년이 올 때까지.
* * *
“그래, 네가 에우카구나?”
아기 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환상 속에서 본 에우카는 거대한 은회색 영수였는데, 앞에 있는 아기 곰은 귀엽기만 해서 같은 존재라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금척을 가져가도 좋다는 거지?”
곰은 마치 커다란 강아지처럼 입을 벌리고 기쁜 듯이 웃었다.
온몸으로 이제 나도 자유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