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9화
30. 레타논의 회색곰(1)
제이든 일행은 조각상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유적 안은 복잡하고 이어지는 출구나 통로가 많았다. 큰 입구, 작은 입구, 아치형 또는 사각형 등 모양도 다양했지만 갈림길의 입구에는 어김없이 조각상이 서 있었다.
제이든은 허리에 묶인 실타래를 만져보았다.
물속으로 뛰어들 때 묶었던 밧줄은 다시 올라갈 때 쓸 생각으로 샘 아래쪽에 풀어놓고 왔지만 처음 유적에 들어올 때 묶었던 노란 형광색 실타래는 아직도 허리에서 솔솔 풀려나가는 중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네.’
꽤 두툼한 실타래를 묶었는데 그새 많이 풀려나가서 자그마해져 있었다.
‘이거 다 풀려나가 버리면 길 찾기 곤란할 텐데.’
걱정스럽게 앞을 바라보는데 붉은 칠을 한 아치형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의 양쪽에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자세의 남녀 조각상이 있었고 안쪽은 중앙에 제단이 있는 것이 사원의 예배당 비슷한 곳으로 보였다.
입구 안쪽에 발을 들여놓은 제이든 일행은 순간 헉 숨을 삼켰다.
중앙 제단 옆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조각된 회색 괴수의 석상이 서 있었던 것이다.
“피잇!”
어깨 위의 포이가 깜짝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지르며 제이든의 머리통을 부둥켜안는 바람에 한쪽 눈이 가려졌다.
“괜찮아, 포이, 괜찮아. 저거 그냥 석상이야. 살아 있는 거 아니야.”
“포이이…….”
제이든이 얼른 포이를 토닥거리며 진정시키자 포이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었다.
트라우마 때문에 놀랄 줄 알았던 아실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걱정이 된 제이든이 아실리를 안아 올리려고 하자 회색 괴수의 석상을 노려보고 있던 아실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괜찮아. 진짜 괴수가 아닌 건 보자마자 알았어. 진짜 괴수한테서 나오는 살기가 없는걸. 진짜는 생긴 것도 저것보다 훨씬 더 무서웠어.
침착하게 말하지만 아실리의 꼬리가 두 배로 부풀어 있는 걸 보면 놀란 게 틀림없었다.
괴수의 석상 바로 뒤에 솟아 있는 제단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길쭉한 막대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제이든은 금방 내려칠 것처럼 쳐들고 있는 괴수의 앞발을 피해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랐다.
석상인 걸 알고 있어도 괴수가 바로 옆에 지키듯 서 있는 게 꺼림칙했다.
제단 위의 황금 막대는 세 개 모두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크기였다.
“이 중 하나가 레칸도르의 금척이란 말이지? 붉은 손의 단검 때 생각이 나네.”
붉은 손의 단검은 처음부터 왕비가 여섯 아들에게 똑같이 나눠주기 위해 똑같은 단검을 여섯 자루 만든 거지만, 고대로부터 보물을 숨기기 위해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진품을 발견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제단은 크지 않은 타원형으로 긴 쪽의 지름이 1미터 조금 넘을 듯했다.
바닥에는 제이든이 읽을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높이의 얇은 금판이 세워져 제단의 테두리를 이루고 있었다.
제단 위에 올려진 황금 막대는 납작하고 긴 형태로 길이는 45센티미터 정도, 폭은 5센티미터 정도 되었다.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막대의 몸통에 간격을 두고 눈금이 다섯 개 표시되어 있었다.
숫자나 글자가 없어서 어떻게 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칭이 운명을 재는 자라고 하니 일반적인 수치를 재는 건 아닐 테지.
오랜 세월 동안 지하에 숨겨져 있었는데도 그다지 먼지가 쌓이지 않은 걸 보면 마법으로 보호되는 공간인 게 틀림없었다.
제이든은 제단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고 방어 마법 검사까지 해보았는데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그에게 인연이 있어 특별히 그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거나.
제이든이 장갑을 꺼내 끼고 세 개의 금척 감정을 시작했다.
한참 집중해서 금척을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뒤집어 보기도 한 후 제이든은 눈을 비비며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네, 구분이 안 가.”
안력을 돋우고 집중했지만 금척의 내력이 보이지도 않았고 셋 중 더 시선을 잡아끌거나 감각을 자극하는 것도 없었다.
느껴지는 반응도 세 개 모두 똑같았다.
“만든 양식이나 새겨진 문양으로 보면 아르카니아 초기 형태고, 다들 아는 것처럼 마도구인데 마법 내용을 읽을 수가 없어.”
마도구의 경우 마법사가 아닌 제이든이 마법 내용까지 읽을 수는 없고 진품인지 아닌지 감정을 하는 게 그의 일이다.
옛 유물이나 마도구 중 진품과 가품을 가려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 금척 세 개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만든 물건이라 보통 감정사가 판별할 수 없고 내력을 볼 수 있어야 알 텐데 내력이 보이지 않으니 난감했다.
전설급 유물이라 그런가.
에트루리안의 서도 읽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 금척도 감정사에게 내력을 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수준엔 너무 높은 물건인가 봐.”
-셋 다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면 다 가져가서 세시온의 서재에 놓아 보면 어떨까?
아실리가 야옹 울면서 제안했다.
“나도 그럴까 했어. 서재에 놓아 보면 진짜를 가려낼 수 있겠지.”
세시온 다미에르의 서재에는 12개의 유물을 놓는 자리가 있다.
에트루리안의 서를 놓았을 때 마치 그 책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 것처럼 꼭 맞았듯이 이 금척을 놓았을 때 진품이 아니라면 아마 금척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싶었다.
“자, 그럼 감정은 서재에 맡기기로 하고.”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금척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란히 놓인 세 개의 금척 중 첫 번째 금척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배낭에 넣고, 두 번째 금척에 손을 대려던 제이든이 움찔 몸을 떨고는 손을 멈췄다.
“금방 저 석상의 눈이 움직이지 않았어?”
제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회색 괴수 석상의 눈알이 살짝 움직인 것 같았는데.
아실리와 포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지 둘이 나란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한데.”
혼잣말을 하던 제이든은 다시금 제단 주변을 신중하게 살폈다.
문자가 새겨진 제단 바닥과 얇은 금판으로 둘린 테두리, 부조가 새겨진 받침 기둥까지 꼼꼼히 살펴본 제이든은 일어서서 배낭에 넣었던 금척을 도로 꺼내 제자리에 놓았다.
“왜 도로 돌려놔?”
아실리가 의아해하며 묻자 제이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테두리의 금판에 손을 대었다.
그가 테두리의 금판을 신중하게 들어 올리자 벨트처럼 가늘고 긴 금판이 딸려 올라왔다.
금판이 길어서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제이든이 금판을 말아 보려고 하자 금판은 마치 팔찌처럼 그의 팔에 도르르 감겼다.
“포잇, 포잇!”
포이가 앞발을 박수치듯 부딪치면서 깡충깡충 뛰었다.
제이든, 그거…….
아실리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고 제이든은 배낭을 도로 등에 메면서 대답했다.
“응, 제단 위의 금척은 눈속임이고 이 테두리가 진짜 레칸도르의 금척이야.”
-어떻게 알았어?
아실리가 그를 올려다보다가 얼굴이 확 변했다.
-제이든, 뒤!
아실리에게 금척을 알아본 내용을 설명하려던 제이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마자 비명처럼 외쳤다.
“뛰어, 아실리!”
한 손으로 포이를 낚아채자마자 달리기 시작한 제이든의 옆에서 아실리도 쏜살같이 달렸다.
그 뒤로, 이제 막 되살아나기 시작한 회색 괴수의 석상이 크르릉 포효했다.
머리로부터 마치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돌덩어리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솟은 귀가 꿈틀꿈틀 움직이고, 회색 눈이 붉어지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숨을 쉬기 시작한 괴수가 막 움직이기 시작한 앞발을 들어 올리고 쿠아아앙! 동굴 전체가 울리는 괴성을 내질렀다.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뒷발을 움직이려고 괴수가 몸을 비틀자 우지직 땅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제이든과 아실리가 쏜살같이 방에서 통로로 빠져나가는 순간 마침내 괴수의 몸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괴수가 뒷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크르르아아!
무시무시한 포효와 함께 괴수가 쿵쿵 달리기 시작하자 천장에서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괴수가 쫓아오는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으아아아아!”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제이든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모래 사이를 뚫고 미친 듯 달려갔다.
-왼쪽, 제이든, 왼쪽!
노랗게 반짝이는 실을 따라 길을 되짚어가고 있지만 경황이 없어 자칫 길을 잘못들 뻔한 제이든을 아실리가 일깨웠다.
“됐다. 여긴 못 들어오겠지!”
그들은 다른 곳보다 입구가 좁은 통로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달려들어 갔다. 회색 괴수는 덩치가 커서 이 좁은 입구는 통과하지 못할 거였다.
쿠콰쾅!
안심할 새도 없이 뒤쪽 입구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돌아보니 회색 괴수가 입구를 그대로 몸으로 부수고 있었다.
한 번에 다 부서지지 않자 분노한 괴수가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몸을 입구에 부딪쳐 왔다.
콰지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비산하는 돌조각이 거의 제이든의 등에 닿을 정도로 튕겨져 나왔다.
-빨리, 더 빨리 뛰어, 제이든! 뒤돌아보지 말고!
아실리가 바로 앞을 달리면서 재촉했다.
제이든은 포이를 꼭 끌어안은 채 젖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좁은 입구를 부수느라 회색 괴수가 지체되는 동안 들어온 곳, 천장이 물로 이루어진 방까지 달아나야 했다.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귓가에 선뜩한 바람이 스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피한 제이든의 옆으로 언월도가 내리꽂혔다.
“흐억! 이건 또 뭐야!”
모퉁이에 언월도를 둘러멘 채 서 있던 조각상이 느닷없이 언월도를 그들에게 휘두른 것이다.
창자루 끝에 달린 반달 모양의 칼날이 포물선을 그리다가 벽에 달린 등잔을 깨뜨렸다.
빛을 내는 돌이 쪼개져서 날아가며 통로 안이 흐릿하게 어두워졌다.
다음 모퉁이의 조각상이 달려오는 아실리를 향해 사슬 달린 철퇴를 붕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아실리가 몸을 납작하게 낮추고 사슬 아래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고 제이든이 뒤이어 사슬을 뛰어넘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조각상이 곤봉을 내리쳐 왔다.
피할 틈이 없어 제이든은 눈을 딱 감고 오른팔을 들어 올려 막았다.
투캉!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제이든의 팔에서 불꽃이 튀었다.
팔에 둘둘 감겨 있던 금척과 곤봉이 부딪치면서 곤봉이 튕겨나갔다.
다 왔어! 조금만 더!
회색 괴수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는지 땅이 쿵쿵 흔들렸다. 뒷덜미에 괴수의 더운 입김이 느껴지는 듯했다.
샘물 아래의 방까지 구르다시피 쏟아져 들어갔지만 밧줄을 타고 오를 여유가 없을 듯했다.
“올라가, 실리!”
제이든은 포이를 아실리의 등에 덥석 올리고 아실리를 밧줄 쪽으로 밀어붙였다.
“포이, 실리 꽉 잡고 있어. 밖에 나갈 때까지 놓으면 안 돼! 실리, 빨리 올라가!”
-제이든!
“빨리 올라가라니까!”
물 아래로 드리워진 밧줄에 아실리를 던지다시피 밀어붙인 제이든은 배낭에서 삼단봉을 꺼내며 재빨리 돌아섰다.
눈앞에 들이닥치는 회색 괴수의 앞발을 한 번만이라도 막아서 아실리와 포이가 올라갈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쿠와앙!
괴수의 붉은 눈과 침을 흘리는 입이 정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어디선가 불쑥 솟아난 회색 물체가 제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쿠애앵!
앙증맞은 포효와 함께 누군가 제이든을 등지고 뒷발로 일어선 채 앞발을 번쩍 들어 올렸고, 붉은 입을 쩍 벌리고 들이닥치던 괴수가 거짓말처럼 동작을 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