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8화
29. 위대한 후원자(3)
엘리미네온이 아실리에게 내린 축복이 수명과 자유로운 취식만은 아니었는지 아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영리해졌다.
아주 가끔, 몇 년에 한 번씩 세시온을 찾아오는 엘리미네온은 언제나 변함없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세시온도 엘리미네온도 그가 용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기에 아실리는 세시온의 후원자가 은룡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그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감정과 마법 수련을 위해 집을 아스토시엔 산의 숨겨진 계곡으로 옮긴 후 세시온은 부단히 수련을 계속했고 갈수록 이름을 떨쳤다.
그의 모든 수련과 활동에는 언제나 아실리가 함께했다.
십여 년 후 아실리가 두 번째 삶을 다하고 잠들었을 때, 세시온은 아실리를 침대에 눕힌 채 조용히 기다렸다.
아실리의 몸이 완전히 식고 두어 시간 정도 지난 후, 은빛 광채가 아실리의 몸을 감싸고 돌다가 먼지처럼 부서져 사라진 뒤, 아실리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세 번째 삶의 눈을 떴다.
* * *
제이든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가락은 아직도 아실리의 이마에 닿아 있었고 어깨에 앉은 포이가 그의 귀에 뺨을 붙인 채였다.
셋은 거의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가볍게 떨면서 머리를 들었다.
제이든이 아실리를 안아 올리고 아무 말 없이 꼭 껴안았다.
고양이도 응답하듯 그의 턱 밑에 머리를 밀어 넣고는 고르릉 고르릉 목을 울리면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깨 위에서 포이가 꼬물꼬물 내려오더니 아실리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고양이와 토끼를 한동안 안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실리, 이제 괜찮아?”
고양이는 제이든의 턱에 머리를 비비면서 나직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여기 오니까 지워졌던 기억이 돌아와서, 그래서 좀 충격받았는데 이제 안정됐어.
환각 속에서 아실리가 괴수에게 찢겨 죽는 모습을 보기만 한 제이든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실제 죽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다니!
쇼크가 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제이든은 아실리를 더 깊이 껴안았다.
포이가 콜록 기침을 하면서 짧은 앞발로 그의 턱을 밀어 올렸다.
“미안, 미안, 너무 꽉 끌어안았지?”
제이든은 포이와 아실리를 데리고 한쪽 옆으로 가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자.”
무릎에 아실리와 포이를 올리고 쓰다듬으면서 제이든은 여기저기 솟아 있는 짧은 기둥들 틈으로 보이는 중앙의 샘을 쳐다보았다.
아실리를 죽인 괴수가 나타났던 샘.
세시온 다미에르가 말년에 레칸도르의 금척을 찾기 위해 이곳에 다시 왔을 때, 아실리는 여기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세시온은 여기서 아실리의 목숨을 잃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환각 속에서 그 장면을 간접적으로 본 제이든조차 샘 가까이로 선뜻 다가가기 쉽지 않으니까.
-엘리미네온 님은 용이었구나. 은둔한 대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무릎 위에서 아실리가 나직하게 종알거렸다.
“너도 몰랐구나?”
-응, 세시온이 용이 있다고 믿는 건 알았지만 엘리미네온 님이 용이라고 말해준 적은 없었거든. 세시온이 엘리미네온 님에게 빌어서 내 수명을 늘려준 건 알았어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라고만 생각했어.
“혹시 지금 몇 번째의 삶을 사는 건지 네가 알 수 있어?”
아실리는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난 조금 전까지 내가 여기서 죽었던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아마 엘리미네온 님이 내 기억을 지웠었나 봐.
그 후 수명을 다했을 때마다 아실리는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났다고만 느꼈기에 정확히 몇 번의 삶을 살았는지 세지는 못했다.
다만 그중 두 번의 죽음은 기억했는데 한 번은 사고사였기 때문이고 한 번은…….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
아실리는 고개를 숙이고 앞발을 핥았다.
제이든은 가슴이 뭉클해져서 조용히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시온이 떠난 후 혼자 남았던 아실리가 세시온을 따라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오래 사는 바람에 감성과 지능이 너무 높아진 것이 아실리에게 오히려 힘든 일이었겠지.
혼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니 시간상 아실리가 지금 일곱 번째 또는 여덟 번째의 삶을 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나와 함께하는 이 삶이 아실리에게 마지막 삶이겠구나.
“실리, 세시온 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엘리미네온 님을 만난 적이 없어?”
-응, 목소리만 한 번 들었어.
몇 년에 한 번씩 세시온을 찾아오던 엘리미네온은 세시온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마지막으로 그들을 찾아왔었다.
“나는 이제 한동안 잠을 자야 한다. 세시온, 그동안 정말 수고가 많았다. 아마 네가 떠나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할 것 같구나.”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아직 볼이 붉은 청년이었던 세시온은 그동안 머리와 수염이 새하얀 노인이 되었지만 엘리미네온은 여전히 청년의 모습이었다.
세시온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엘리미네온은 돌아가기 전 아실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실리, 세시온이 떠나고 나면 네가 무척 힘들겠구나. 하지만 잘 버티고 있으렴. 기다리고 있으면 세시온의 뒤를 잇고 네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이 나타날 거다.”
용에게는 수면기가 있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는 용은 몇백 년에 한 번씩 깊은 잠에 든다.
수면기는 몇십 년간, 때로는 백여 년 이상 지속되기도 하는데 아실리는 엘리미네온이 용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수면기를 생각하지 못했다.
-세시온이 세상을 떠났을 때 딱 한 번, 엘리미네온 님의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었어.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전달되어 날 위로해 줬어.
그 후 아실리가 세시온이 후인을 위해 안배해 놓은 집을 지키면서 세시온의 뒤를 이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엘리미네온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난 엘리미네온 님도 세시온처럼 영원한 잠에 든 줄 알았지. 이 세상에 나만 남겨두고.
“…….”
“포오잇.”
포이가 제이든의 무릎 위에서 깡충 뛰더니 한 바퀴 재주를 넘으며 땅으로 내려섰다.
왠지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뜨리려는 듯 뒷발을 바닥에 탕탕 친 포이가 앞발로 샘 쪽을 가리키면서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포이야, 혼자 가면 안 돼.”
금방 뛰어갈 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포이를 보고 제이든이 깜짝 놀라자 아실리가 얼른 무릎에서 뛰어내려 포이에게 다가갔다.
고양이는 토끼와 나란히 서서 토끼의 목덜미에 얼굴을 몇 번 비비더니 생긋 웃는 얼굴로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혼자 남아서 힘들 때도 있었는데 이제 괜찮아. 오래 살아서 제이든이랑 포이도 만났잖아.
아실리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골거렸다.
-내게 와 줘서 고마워, 제이든.
말하고 나서 쑥스러웠는지 아실리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괜히 포이의 귀를 잡아당겼다.
포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아실리의 목을 껴안고 밀치는 바람에 둘이 함께 빙그르르 뒹굴었다.
두 마리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니 제이든도 마음이 가벼워져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아실리와 포이의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환각 속에서 본 아실리의 옛 모습은 꽤 귀여웠다.
제이든은 포이를 달래는 아실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만난 아실리는 이미 노련하고 침착해서 인생 선배 같기도 했는데, 환각 속의 아실리는 아직 어설프고 어린 모습이 많은 게 풋풋해서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우리 아실리 귀여워서.”
아실리는 어이없다는 듯 코를 울리고는 샘 쪽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었다.
-나 이제 안정됐으니까 유물이나 찾아보자.
“좋아, 그런데 레칸도르의 금척은 어디서 찾아야 하려나?”
공동의 중앙 부분, 샘 근처까지 걸어온 제이든은 신중하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에트루리안의 서도, 포이도 제이든에게 이쪽으로 오도록 유도한 걸 보면 여기서 유물을 찾아야 하는 건 맞을 텐데.
백 년쯤 전에 회색 괴수가 튀어나왔던 샘은 맑고 잔잔했다. 설마 또 괴수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샘 주변을 위시해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고 벽의 그림이나 여기저기 솟아 있는 기둥의 문양까지 살펴보았지만 금척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평범한 수색 말고 뭔가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수색에 지친 제이든이 딱 걸터앉기 좋게 생긴 기둥 하나에 엉덩이를 걸친 채 중앙의 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샘을 조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
백여 년 전, 회색 마수가 저 샘에서 나왔다면 그 마수가 지키려고 하는 뭔가가 샘 안에 있었을지도 몰라.
혹시 그게 레칸도르의 금척이 아니었을까?
그때 제이든의 생각에 대답하듯 샘물의 한 부분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제이든이 그 부분을 집중해서 바라보자 샘물은 마치 손짓하는 것처럼 파르르 물결을 일으키며 반짝였다.
“실리, 포이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물에 들어가 보려고?
“응.”
-위험하지 않을까?
아실리는 걱정스럽게 제이든을 바라보았지만 제이든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세시온 다미에르의 후인이라면 이 직감이 맞을 거야. 저 샘에 들어가 봐야 한다는 직감이 들어. 나 수영엔 자신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잠수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만 보고 나올게.”
제이든은 배낭 안에서 밧줄을 꺼내 허리의 실타래 옆에 묶었다.
다른 한쪽은 샘 근처의 기둥에 묶은 뒤 그를 부르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샘에 다가갔다.
포이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제이든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겼다.
-같이 가자는데?
제이든은 옷자락을 잡은 포이를 떼어서 아실리에게 맡겼다.
“나 혼자 갔다 올게. 혹시 물속에서 위험해지면 나 혼자는 헤엄칠 수 있어도 너희들까지 데리고 나오기 어려울 수 있잖아.”
-조심해야 해. 제이든.
포이가 따라올까 봐 얼른 샘 가까이에 가서 반짝거리는 부분의 물속에 손을 넣자 마치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물속으로 확 빨려 들어갔다.
숨을 멈추면서 팔다리를 쭉 뻗고 샘의 바닥을 보려고 했는데 눈앞에 물살이 잠시 몰아친다 싶더니 몸이 어딘가로 툭 떨어졌다.
“아야야!”
어라? 숨이 쉬어지네?
주변의 공간에 물이 없었다. 보송보송 마른 공간이었고 바닥은 부드러운 모래였다. 숨 쉬는 데도 아무 지장이 없었고 신기하게 옷도 젖어 있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 대신 찰랑찰랑 고인 물이 보였고 멀리 높은 곳에서 아실리와 포이가 물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게 마치 우물 바닥에서 우물 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포이의 그림자가 동동동 흔들리는 걸 보니 뒷발을 탕탕 치고 있는 건가?
“거기 있어. 거기…… 어어!”
포이가 퐁당 뛰어드는 모습에 제이든은 허둥지둥 두 팔을 뻗었다.
잠시 후 천장을 이루고 있는 물을 뚫고 포이가 퐁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용케 포이를 받아내자 뒤를 이어 아실리가 사뿐 착지했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랬잖아!”
“포이잉!”
포이가 싫어싫어 하듯이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제이든의 품에 파고들었고 아실리는 먼 산을 보면서 딴청을 피웠다.
“아휴, 요것들이 정말, 말도 안 듣고!”
말은 안 듣지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꼬맹이들의 진심이 느껴져서 야단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지. 같이 가자.”
허리에 묶었던 밧줄을 풀어서 벽 쪽의 기둥에 걸쳐 놓고 안쪽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진짜 유적인가 보다.”
위쪽의 공간이 유물이나 생활 느낌이 없고 벽화만 그려진 동굴이라면 물 아래쪽은 생활감이 있는 공간이었다.
길게 뻗은 통로 양쪽으로 돌로 만든 조각상, 벽에 걸린 등잔, 부조 장식 등이 보였고 갈림길의 입구는 모두 아치형으로 다듬어졌고 테두리를 장식한 문양도 정교했다.
등잔 안에는 등불 대신 빛을 내는 돌이 들어 있어서 통로에 은은한 빛을 비추는 중이었다.
-저것 봐, 제이든.
사람의 형태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모퉁이마다 놓여 있었는데 서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또는 활이나 창을 든 사람 등 모양과 자세는 다양했지만 그들의 팔은 모두 화살표처럼 일정한 방향을 향해 뻗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