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7화 (10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7화

29. 위대한 후원자(2)

테살리온의 낚싯대를 든 길잡이가 땀을 흘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모래벌판 위를 밟아나가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저쪽이 아닌데.’

천막 입구에 놓인 의자에 앉은 세시온이 길잡이가 걸어가는 반대쪽을 힐끗 보았다.

‘아마 저쪽이었던 것 같은데. 물이 마른 도랑 건너편.’

깨어난 후, 세상이 며칠 전 탐사대가 아직 떠도는 섬의 입구를 발견하기 전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돌아온 후의 상황은 돌아오기 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세시온, 해가 뜨거운데 왜 밖에 나와 있어? 쓰러졌다 일어난 게 얼마나 된다고. 그늘에 들어가 있지.”

지나가다 걱정스럽게 말을 붙인 중년 여자는 탐사대의 일원인 마법사 트리시아였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는 세시온이 아니라 트리시아가 쓰러졌었는데.

그로 인해 탐사대는 마법사 없이 떠도는 섬 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거고.

탐사 중 사람들이 사라지고, 회색의 괴물을 만나고, 아실리가 죽고, 은룡 엘리미네온을 만나 후원의 계약을 맺은 것, 그 모든 게 정말 꿈이었을까?

아니다. 세시온은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미묘한 금제가 걸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떠도는 섬의 입구만 해도 그렇다.

세시온은 입구가 열렸던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말할 수 없었다.

그곳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트리시아에게 용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용에 대한 말 역시 꺼낼 수 없었다.

두세 번의 시도 끝에 세시온은 엘리미네온과의 만남을 포함해 떠도는 섬 안에서 겪은 일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었다.

-세시온, 배고프지 않아?

아실리와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 거였다.

아실리와는 무려 16년을 함께 살았으니 그전에도 서로 눈빛만 보아도 의사 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미네온과의 만남 이후 두 번째 생명을 얻은 아실리와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대화가 가능해졌다.

아실리의 말을 세시온이 알아듣게 된 것이다.

아실리는 떠도는 섬 안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실리뿐 아니라 다른 탐사대원들도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시온은 테살리온의 낚싯대를 모래벌판 위로 길게 뻗은 채 머리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길잡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마 이번 탐사 때 떠도는 섬의 입구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유적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던 회색 마수도, 은룡 엘리미네온도 사람이 그곳에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아실리와 둘이서만 한번 와 봐야지.

아실리에게 여덟 개의 생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줘야 하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세시온은 아실리가 떠도는 섬 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적 가운데의 샘에서 나타났던 그 괴수, 회색 털가죽과 붉은 눈, 불이 붙은 것처럼 시뻘겋던 입과 무시무시한 포효, 그리고 아실리를 찢어발기던 발톱은 떠올릴 때마다 오한을 일으켰다.

몸서리를 친 세시온이 다급히 아실리를 찾아서 품에 끌어안자 아실리는 영문을 모르고 골골거렸다.

그래, 아실리, 그런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아.

여덟 개의 생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면 되겠지.

그때도 괴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참이었다.

혹시라도 아실리에게 트라우마를 줄 만한 기억은 아예 망각 속에 묻어 버리는 걸로.

당시의 탐사는 결국 떠도는 섬을 찾지 못하고 끝났다.

세시온은 당시 숙소로 쓰고 있던 아스토시엔 산 근교의 작은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일을 끊고 아실리와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은발의 청년이 찾아왔다.

“어떤가, 잘 지내고 있나?”

은룡 엘리미네온은 세시온과 함께 문간에 선 아실리를 보고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아실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고양이도 두 번째 삶에 부작용 없이 잘 적응한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아실리가 머리를 털고 뒤로 물러서면서 세시온에게 눈길을 돌렸다.

-세시온, 이 사람 누구야? 손가락이 굉장히 찬데. 나 전에 만난 적이 있어?

“오호! 그동안 지능과 언어 능력이 더 발전했구나? 역시 내 축복을 받은 고양이야! 손가락이 차가운 건 미안하게 됐다. 내 체온이 좀 낮거든.”

-세시온! 이 사람이 내 말을 들었어. 내 말을 알아들었어!

깜짝 놀란 아실리가 몸의 털을 포르르 세우면서 팔짝 뛰었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엘리미네온은 거실로 들어와 작은 소파에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앉았다.

아실리는 원래 낯가림을 하는 고양이가 아니지만 엘리미네온에게는 경계심이 느껴지는지 꼬리를 살짝 부풀린 채 옆걸음을 치면서 따라 들어왔다.

“차 드시겠습니까?”

“그래, 홍차가 있나?”

“예.”

세시온이 홍차와 쿠키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가자 아실리는 주방과 거실 사이에서 엘리미네온을 향해 머리를 빼꼼 내민 채 눈을 또록또록 굴리고 있다가 조그맣게 야옹 울었다.

-정말 내 말을 알아들어?

은룡이 아실리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럼, 알아듣고말고!”

“꺄웅!”

아실리는 또 한 번 팔짝 뛰었다.

엘리미네온이 손을 들어 올려 부채질하듯 살짝 흔들자 공중에 과자가 몇 개 나타났다.

동글동글한 것, 세모난 것, 병아리 모양, 물고기 모양……, 다채로운 모양의 과자들이 공중에서 동동 떠서 줄지어 아실리 쪽으로 향했다.

아실리가 눈으로는 엘리미네온을 보면서 공중에 코를 치켜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말할 수 없이 맛있는 냄새가 나는 바람에 수염이 절로 앞으로 휘어졌다.

“어떠냐? 맛있겠지? 사양 말고 먹으렴.”

-마법사였구나.

아실리는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몸의 힘을 풀었다.

세시온과 함께 지내며 마법사를 만날 일은 더러 있어서 마법사에는 익숙했다. 환영 마법도 본 적이 있고.

-그런데 이 환영 마법은 꼭 진짜 같네? 모양도 그렇지만 냄새까지 정말 좋다.

“먹어도 된다니까. 그건 진짜야.”

-정말?

아실리는 코앞에서 동동 떠다니는 과자를 앞발로 톡 건드려 보았다.

-정말이다. 앞발로 만질 수 있어.

-와! 당신 진짜 실력 좋은 마법사인가 봐?

아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야옹거렸다.

-나 마법사 몇 번 봤지만 이렇게 진짜 물건을 만들어내는 마법사는 처음 봐.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처음이고.

뒷발로 일어서서 공중에 떠다니는 과자를 사냥하듯 앞발로 낚아챘던 아실리는 아쉬운 듯 과자를 도로 공중에 놓아주고는 쳐다보기만 했다.

“왜 안 먹느냐?”

엘리미네온이 궁금한 듯 묻자 아실리는 그를 바라보더니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지만 나 과자는 못 먹어. 고양이는 과자나 초콜릿 같은 거 먹으면 안 된대.

소파에 있던 엘리미네온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재미있는 고양이구나. 영리하기도 하고.”

그는 웃음을 그치지 못하면서 마침 홍차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온 세시온에게 말했다.

“네가 교육을 잘 시킨 거냐, 아니면 이 아이가 원래 이렇게 영리한 거냐?”

“원래 똑똑하고 차분한 고양이긴 했는데 지난번 떠도는 섬에 다녀온 이후 말이 통하게 되어 그런지 점점 더 사람 같아지고 있어요.”

“그래?”

“예. 요즘은 고양이라기보다는 막 세상을 배우는 사람 어린애 같아요.”

엘리미네온은 홍차 잔을 들며 아실리에게 말했다.

“그 과자는 내가 널 위해 만든 거니까 먹어도 된다. 사람 과자랑은 달라.”

-정말?

아실리는 세시온을 바라봤고 세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재빨리 공중의 과자를 낚아챘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

오도독 오도독 과자를 먹으면서 아실리는 엘리미네온을 향해 눈웃음을 보냈다.

-고마워, 진짜 맛있어. 이 물고기 모양이 젤 맛있네. 음, 이 병아리 모양 과자는 고소해서 좋아.

아실리가 과자를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세시온이 쿠키 접시를 엘리미네온 쪽으로 밀었다.

“엘리미네온 님도 과자 좀 드셔 보세요. 아실리가 먹는 것만 보지 마시고.”

“네 고양이가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보는 게 즐겁구나. 품평까지 하는 걸 보니 미식가의 소질이 있는데?”

“아실리가 좀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과자라니 처음 봅니다. 사료 외에 간식이라면 닭고기를 삶아 주거나 생선을 구워 주곤 했는데, 저런 과자는 어디서 살 수 있나요?”

“글쎄? 이건 지금 즉흥적으로 만든 거고 시중에 판매되는 강아지나 고양이용 과자는 없으니까 살 순 없지. 하지만…….”

엘리미네온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뭐 이삼십 년만 기다리면 나오겠는데?”

“정말요? 장사가 될까요?”

은룡은 빙그레 웃었다.

“왜? 네가 만들어서 팔아 보게?”

“아닙니다. 저는 감정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요. 그냥 궁금해서요.”

“장사가 되고말고. 지금이야 사람들이 동물에게 무슨 간식까지 먹이느냐고 하겠지만 사회가 발전할수록 동물 대상 사업도 번창하게 될 거다. 오륙십 년만 지나면 간식은 물론이고 동물용 가구나 장난감 같은 것도 다양하게 나올걸.”

어느새 그들의 옆에 와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실리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엎드렸다.

“왜 그래? 아실리?”

아실리는 머뭇거리다가 야옹거렸다.

-세시온이 전에 나 병원 데려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고양이는 십오 년쯤 산다고 말했잖아.

“어, 그랬지.”

떠도는 섬에서 돌아온 후 세시온은 죽었다 살아난 아실리의 건강 상태가 염려되어 동물병원에 데려갔었다.

전부터 다녔던 동물병원의 수의사는 아실리를 검진해 보고 깜짝 놀랐다.

건강 상태가 너무 좋아서 마치 두세 살짜리 한창 나이의 고양이와 같다고 했었지.

다시 살아난 후 사람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아실리가 수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나 보다.

-이삼십 년이면 십오 년보다 훨씬 긴 거지?

“그렇지.”

아실리는 다시 시무룩하게 볼을 부풀렸다.

-그러면 나는 그때 죽고 없을 거 아냐.

“…….”

아실리는 조금 부끄러운 듯 앞발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

-고양이 간식이랑 가구나 장난감 같은 게 막 나올 거라면서. 나는 그거 못 써보잖아. 간식도 못 먹어보고.

“푸흡!”

세시온의 맞은편에 앉았던 엘리미네온이 홍차를 뿜었다.

“엘리미네온 님!”

세시온이 당황해서 손수건을 찾아 내밀자 엘리미네온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아! 진짜 이렇게 웃어본 건 한 이백 년만인 것 같구나. 이봐, 세시온, 네 고양이가 정말 특이하구나. 아주 매력적이야!”

엘리미네온은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뒤 다시 웃으면서 아실리를 향해 몸을 굽혔다.

“야옹아, 이름이 아실리라고 했던가? 내가 보장하는데 너는 그 과자며 간식을 다 먹어볼 수 있을 거다. 장난감이며 가구도 다 써볼 수 있을 거고.”

-?

“넌 모르겠지만 나, 세시온 다미에르의 위대한 후원자 엘리미네온의 이름으로 이미 너에게 수명의 축복을 내린 바 있으니 너는 네 수명을 여덟 번 다시 살 수 있단다. 내가 네 주인에게 주는 첫 번째 후원이고 가장 큰 선물이었지.”

그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실리 다미에르, 너는 이 순간부터 고양이 간식은 물론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될 거다. 사람 음식을 포함해서.”

세시온은 어이없는 얼굴로 엘리미네온을 쳐다보았다.

용언이 저런 데다 쓰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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