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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6화 (10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6화

29. 위대한 후원자(1)

세시온은 정신이 들자마자 품 안의 아실리부터 확인했다.

작은 회색 고양이는 등에서부터 옆구리까지 마치 종잇장처럼 찢긴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손상이 없었다.

이미 빛을 잃은 초록색 눈동자는 커다랗게 열린 채 여전히 세시온의 얼굴을 바라보고, 분홍색 입은 살짝 미소를 띤 것처럼 양 끝이 올라가 있었다.

마치 그를 향한 괴수의 일격을 대신 맞을 수 있었던 게 기쁜 것처럼.

“실리, 실리…….”

은회색 털은 아직 부드러웠고 몸도 아직 말랑말랑했다.

세시온은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부모를 일찍 잃고 형제자매도 없는 세시온에게 아실리는 그냥 반려동물이 아니었다.

유일한 가족이었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는데.

그런 실리가 자신을 대신해 괴수의 발톱에 찢겨 죽다니, 세시온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너, 이름이 뭐냐?”

세시온이 가슴이 터질 만큼 울고 나자 공중에서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누워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큰 소리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공동 전체를 울릴 만큼 선명하고 듣기 좋은 소리였다.

“세시온 다미에르입니다.”

세시온은 눈물을 닦고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이십니까?”

정황을 볼 때 괴수에게 죽기 직전이었던 자신을 구한 것은 저 남자일 테고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아마 대마법사일 것이었다.

공중부양 마법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것도 그렇고.

남자는 싱긋 웃었다.

“마법사라면 마법사긴 하지. 그래, 세시온 다미에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보통 사람은 이곳에 못 들어올 텐데, 중간에 길을 잃지 않았나?”

“맞습니다. 길을 잃었어요. 함께 왔던 대원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정신이 들어 보니 여기였습니다.”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은발의 남자가 일어나 앉더니 이채를 띤 눈으로 세시온을 살펴보았다.

“입구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로 떨어졌다고? 너 직업이 뭐냐? 고고학자야? 아니면 마법사?”

“감정사입니다.”

“오호!”

은발의 남자는 공중에서 어딘가 걸터앉은 것처럼 다리를 꼬았다.

“감정사라, 그래, 감정사도 괜찮지. 어디 보자, 너 옛 물건과의 교감 능력이 굉장히 좋구나? 이 유적이 너를 여기까지 받아들여 준 걸 보니 보통 아이가 아니군.”

그는 세시온이 안고 있는 아실리의 시체에 흘낏 눈길을 주었다.

“다른 생물과의 교감도 상당하고.”

세시온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그는 빙긋 웃었다.

“흐음, 내가 찾던 사람으로 네가 적합한 것 같구나.”

“?”

은발의 남자가 세시온을 향해 손을 내밀자 푸르스름한 은빛 안개가 그의 손에서 흘러나와 세시온의 몸을 휘감더니 잠시 후 그의 손으로 다시 빨려들어갔다.

그 직후 은발의 남자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역시! 몇백 년간 본 아이들 중 가장 소질이 있어. 마음에 드는구나.”

그는 세시온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유혹하듯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너, 후원자가 필요하지 않으냐? 내가 네 후원자가 되어 주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감정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어떠냐?”

세시온이 은발의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아, 나는 엘리미네온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보통 ‘위대한 자’라고 부르지.”

위대한 자……, 세시온은 공중에서 장난기 어린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내게 마법사냐고 물었지?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마법의 종주니까.”

마법의 종주인 위대한 자……, 설마!

설마 설마 하던 세시온은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용이십니까?”

은발의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역시 용은 아닌 거로군. 세시온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대마법사일 텐데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면 이름을 들어 봤을 텐데.

전대의 은둔 마법사들 중 엘리미네온이라는 이름이 있던가.

그때 은발의 남자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렇다. 은룡 엘리미네온이라 한다.”

은룡이라고? 정말로 용인가?

자신이 물어 놓고도 그 대답을 믿을 수 없어 황망해하는 세시온의 눈앞에서 은발의 남자가 사라졌다.

공동의 천장도 함께 사라지면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세시온의 눈앞에 좌르륵 펼쳐졌다.

그리고, 거대한 은빛 용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날개를 펼쳤다.

청옥처럼 푸른 눈, 은으로 만든 산호 가지 같은 뿔, 거대하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용이, 밤하늘에 은빛 갈기를 날리고 오로라처럼 비늘을 빛내면서 천천히 선회하더니 공동 안으로 돌아왔다.

내려앉아 날개를 접는 것과 동시에 은룡은 사라지고 은발의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던 천장도 다시 나타나고.

“영광인 줄 알아라. 나의 본신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은룡 엘리미네온은 눈앞의 청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몸을 훑어본 결과 인간들 중 드물게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났고 특히 그가 원하는 유물과의 교감 능력이 우수했다.

정신력도 강하고 몸 안에 마나가 풍부해서 마법사가 될 소질도 있어 보였지만 감정사라니 더욱 좋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내가 후원자가 되어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걸까?

기절할 듯 놀라고 기뻐해야 정상인데 왜 저리 담담한 것일까?

엘리미네온이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자 세시온이 용을 향해 물었다.

“그, 저를 후원해 주신다면, 혹시 제게 뭔가 시키실 일이 있는 겁니까?”

역시 영리한 아이로군.

은룡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이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너는 해낼 수 있을 것 같구나. 내가 지정하는 열두 가지의 유물을 찾는 일을 맡기고 싶다. 대신 네가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지.”

은룡 엘리미네온은 손을 휙 내저었다.

갑자기 주변이 황금과 보석으로 가득 찼다.

세시온의 발밑에 옛 금화와 은화들이 굴러와 자갈처럼 쌓였다.

“나의 도움을 받으면 옛 로시난트의 왕자들 못지않은 부를 누리는 것도 꿈이 아니다.”

엘리미네온이 자랑스럽게 말했으나 세시온은 눈이 커졌을 뿐 그리 감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신 엘리미네온이 다시 손을 흔들었다.

황금과 보석 무더기가 사라지더니 주변에 별과 달의 문양, 복잡한 술식 등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부에 관심이 없다면, 너의 마법 재능을 꽃피워줄 수 있다. 네게는 탁월한 마법 재능이 숨겨져 있지. 나는 너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가 될 수 있게 가르칠 수 있다.”

세시온은 아까보다는 조금 더 흥미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크게 감동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흠, 이것도 아닌가?

은룡은 다시 손을 휘둘렀다.

“시간은 어떠냐? 너에게 원래 주어졌던 것보다 두 배쯤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다. 이백 년 정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라.”

세시온이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오호, 이쪽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군.

은룡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세시온이 그를 향해 품속에 안고 있던 아실리를 내밀었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이 아이를 살려주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 고양이 말이냐?”

은룡은 조금 당황하여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위대한 분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세시온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서 엘리미네온은 잠시 망설이다 아실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은빛 안개가 흘러나와 아실리의 몸을 감쌌다.

“이 고양이의 몸은 죽었다. 영혼까지 완전히 저승으로 넘어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만 이 고양이의 영혼은 아직 여기 있구나. 네가 걱정되어 떠나지 못했나 보다.”

“방법이 있을까요?”

세시온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글쎄……, 죽기 전이라면 수명을 늘려주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미 목숨이 다했으니.”

은룡은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오랫동안 함께했고 더구나 마지막 순간 제 목숨을 널 위해 버렸으니 안타깝긴 하겠다만, 그만 마음을 접는 게 낫지 않겠느냐? 어차피 이 아이는 제 수명을 거의 다 살았구나.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몇 달 남지 않았을 거야.”

세시온은 갑자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위대한 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제게 시간을 주실 수 있다고 하셨지요? 원래의 수명보다 훨씬 더 긴 수명을 주신다고.”

“그래, 가능하지.”

“제 수명을 아실리에게 주면 안 되겠습니까?”

엘리미네온은 문득 움직임을 멈춘 채 세시온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냐? 네 수명을 깎아서라도 이 고양이를 살리고 싶다고?”

“예.”

세시온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위대한 분께서 시키시는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엘리미네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인간치고 정말 신의가 있구나.”

사람이라면, 고양이 한 마리를 위해 제 목숨을 깎겠다는 세시온을 보고 대부분 황당해할 것이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용은 인간이나 동물이 서로에게 갖는 애정이나 교감에 대해 많이 보아왔다.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그 사이에도 깊은 애정이나 우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때로는 서로를 배신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많은 경우 배신하는 쪽은 인간이었다.

“어디 보자. 뭘 할 수 있을지.”

은룡의 손에서 다시 은빛 안개가 번져 나와서 세시온과 아실리의 몸을 감쌌다.

“수명을 넘겨주는 일은 본인이 진심으로 원하지 않으면 나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잠시 후 은빛 후광이 사라진 뒤 은룡은 세시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진심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 고양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알겠고.”

“…….”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네 원래 수명만큼의 추가 수명이다. 아마 백 년 전후가 되겠지. 그중 얼마나 이 고양이에게 넘겨주고 싶으냐? 정확하게 몇 년 단위로 줄 수는 없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맞춰 보마.”

“제 본래의 수명은 어느 정도 됩니까?”

은룡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나는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다. 네 본래 수명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는데, 너의 현재 몸 상태로 미루어 본다면 아마 사고가 없고 천수를 다한다는 가정하에 팔십 정도일 거라 싶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용의 가호를 받고 마법을 익힌다면 마법사가 대부분 수명이 늘어나는 걸 감안할 때 백 살 정도는 너끈히 살겠지. 물론 중간에 사고를 당하지 않을 때의 일이다.”

원래 수명을 백 살 정도로 잡고 거기에 추가 수명 백 년쯤을 얹어 준다는 것인가.

“추가 수명은 모두 아실리에게 주고 싶습니다.”

“모두?”

엘리미네온은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추가 수명을 모두 고양이에게 준다고?

“예. 줄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다 주고 싶어요.”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엘리미네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세시온의 앞으로 내려왔다.

손에서 내보낸 안개만으로 세시온과 아실리를 감쌌던 것과는 달리 직접 손으로 세시온의 이마를 짚었다.

흰 손이 이마에 닿자 세시온은 움찔 몸을 움츠렸다.

손이 너무 차가웠던 것이다.

“자, 움직이지 말고 있거라.”

한 손은 세시온의 이마에, 다른 쪽 손은 아실리의 이마에 댄 엘리미네온이 낮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노래하듯 높고 낮음을 타면서 계속되는 주문 속에서 세시온의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이 고양이는 여덟 번의 생명을 더 갖게 될 것이다. 기다려라. 나중에 내가 찾아가마.”

용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낙인을 찍듯 분명하게 말을 남겼다.

* * *

콧등에 뭔가 촉촉한 것이 닿았다.

촉촉하고 까실까실한 것이 콧등에서 미간을 타고 올라가더니 이마를 핥는다.

세시온은 눈을 번쩍 떴다.

“아이고, 이제야 정신이 들었네. 다미에르 감정사, 괜찮나?”

로리머 박사와 탐사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냐앙, 냐아옹!”

그보다 더 큰 소리로 울면서 아실 리가 품에 안겨 왔다.

“실리, 살아났어?”

아실리를 와락 끌어안는 세시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이 친구 좀 보게, 천재 감정사라도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꿈이라도 꾼 건가? 살아난 건 고양이가 아니라 자네야 이 사람아. 갑자기 쓰러지더니 밤새도록 안 깨어나서 큰일 치르는 줄 알았네.”

“고양이가 아주 안절부절못하면서 자네 옆에 붙어 있던데, 손 핥고 이마 핥고, 개만 주인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고양이도 이렇다면 키울 맛이 나겠어.”

세시온은 아실리를 껴안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탐사를 시작하면서 베이스 캠프로 쳤던 천막 안이었다.

로리머 박사와 다른 대원들, 가장 먼저 사라졌던 조셉과 그렉, 마틴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무사하셨군요. 괜찮습니까? 떠도는 섬 안에서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이 친구 아직 꿈에서 덜 깼네. 떠도는 섬의 입구는 아직 찾지 못했는데 무슨.”

“예?”

정말 꿈인가?

그 모든 일들이 꿈이었다고?

세시온은 아실리의 몸을 만져보았다.

이 몸이 괴수의 발톱에 찢겨나간 것을 보았고, 쏟아져나오는 피를 내 손으로 받았는데.

아실리의 몸도 세시온의 옷이나 손도 깨끗했다.

아실리가 걱정스러운 듯 세시온의 얼굴에 뺨을 비비면서 냐아앙 울었다.

-세시온, 괜찮아?

어라?

왜 아실리의 울음소리가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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