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5화 (10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5화

28. 지하 유적(6)

“실리, 그게 무슨 말……?”

놀란 제이든이 아실리의 머리에 손을 댄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

시계 태엽을 거꾸로 감는 것처럼 유적 바깥의 하늘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면서 밤낮이 거꾸로 흘러갔고 어느 순간 서서히 멈췄다.

여름날인가, 사막을 닮은 모래바람이 불고 더위가 느껴지는 날이었다.

“아니 고양이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

나이가 제법 있는 듯한 목소리가 어이없다는 듯 묻는 소리가 들려왔고 생생하게 젊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실리와 저는 언제나 함께라서요. 이제 나이도 많아서 떼어놓고 올 수가 없었어요.”

금발에 선명하게 파란 눈을 한 청년이 양해를 구하는 듯 웃었다.

“아주 영리한 고양이니까 절대 탐사 작업에 방해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조셉 씨.”

청년의 어깨 위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는 아실리였다.

그렇다면 스물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저 청년은 젊은 날의 세시온 다미에르겠지.

그는 지금의 제이든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괜찮네. 조셉은 새로 왔으니까 못 봤겠지만 우린 벌써 황색 탑과 붉은 뿌리 탐사를 같이 다녀왔거든. 그때 보니 고양이가 아주 얌전하고 똑똑하더라고. 전혀 방해되지 않았어.”

탐사대장인 듯 햇볕에 탄 얼굴을 한 중년 학자가 조셉이라 불린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괜찮겠지요.”

조셉은 세시온과 아실리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천재 감정사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천재라서 엉뚱한 습관이 있는 건가. 고양이를 탐사에 데려오다니. 개처럼 수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셉이 구시렁거리며 대장의 뒤를 따라 사라지자 세시온이 손을 올려 아실리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실리, 다른 대원들은 다 괜찮다고 했는걸. 떠도는 섬에도 같이 들어갈 수 있어. 여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유적이라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알았지?”

“야아옹.”

아실리가 세시온의 뺨에 제 뺨을 부비면서 고르릉거렸다.

세시온이 열 살도 되기 전 어렸을 적부터 키웠던 아실리는 이때 열여섯 살 정도 되었던 나이든 고양이였다.

집고양이의 수명은 보통 15년 정도라고 한다.

아실리는 당시 열여섯 살로 이미 평균 수명을 넘어섰고, 건강 상태는 좋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이였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스스로 아는 것인지 당시의 아실리는 세시온에게서 잠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세시온도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틈에 아실리가 떠나는 일이 생기거나 할까 봐 어디든 아실리와 함께 다녔지만 이번 유적 탐사 때는 사실 아실리를 두고 올까 생각도 했었다.

혼자 하는 감정 일은 고양이와 함께 다녀도 아무 문제 없었지만 이번 유적 탐사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고양이를 동반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참여한 거지만 조셉처럼 나중에 참여한 사람은 사정을 모를 수도 있고.

‘아실리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이제 밖에 데리고 다니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이번 탐사만 끝나면 이렇게 아실리를 멀리 데리고 나오는 일은 맡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세시온은 대원들을 따라 떠도는 섬의 입구로 향했다.

일주일이나 테살리온의 낚싯대를 들고 모래벌판을 헤맸던 길잡이가 땀을 닦으며 마차 옆에 앉아 있었고 탐사대장인 로리머 박사가 대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입구가 발견된 적은 몇 번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탐사가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는 곳이니까 다들 주의하도록. 자기 위치를 알리는 종 간수 잘하고.”

처음 탐사를 시도하는 ‘떠도는 섬’에 들어간 탐사대원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벽의 점토나 바닥의 모래 표본을 채취하는 사람, 벽화를 보고 모사하는 사람, 영상구로 기록하는 사람 등 다들 맡은 일에 바빴다.

초입 부분에는 벽화 외에 특별한 유물이랄 것이 없어서 세시온이 따로 감정할 만한 유물은 없었다.

그는 유적의 특징이나 모습 등을 주의 깊게 머릿속에 넣으면서 탐사대원들과 보조를 맞춰 앞으로 나아갔고 아실리는 세시온의 옆에 딱 붙은 채 조용히 따라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차차 특이한 유물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세시온이 할 일도 늘었고 탐사에도 활기가 붙었다.

일이 터진 것은 유적에 들어선 지 두 시간쯤 지나 중심부에 가까워질 즈음, 다들 탐사에 열중해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조셉, 조셉은 어디 있지? 그렉은?”

탐사대원들 중 두 명이 소리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제 뒤에 있었는데요.”

조셉의 앞에 있었던 대원이 당황하면서 뒤쪽을 되짚어갔다.

“기다려, 마틴!”

로리머 박사가 불렀지만 마틴은 방금 꺾어졌던 모퉁이를 뒤로 돌아가며 조셉을 불렀다.

그리고 마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웅성거리는 탐사대원들 틈에서 눈살을 찌푸린 채 서 있던 로리머 박사가 입을 열었다.

“다 함께 뒤로 돌아가 봅시다.”

대원들은 한 덩어리로 뭉친 채 조심스레 방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 보았다.

모퉁이를 꺾어서 길을 돌았으나 방금 통과한 곳에는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종을 울려 볼까요?”

대원들은 혹시 유적 내에서 길을 잃으면 위치를 알리기 위해 저마다 작은 종을 지니고 있었다.

로리머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원 한 명이 종을 울렸다.

맑고 높은 종소리가 지하 동굴 안에서 멀리 퍼져갔지만 응답하는 종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덟 명의 탐사대원 중 세 명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남은 다섯 명이 주변을 수색해 보았지만 세 명의 탐사대원은 마치 땅으로 꺼진 듯 흔적이 없었다.

로리머 박사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마법사를 함께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탐사대에는 원래 마법사가 한 명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탐사 며칠 전 새로운 마법을 연습하다가 몸 안의 마나가 역류 현상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마탑의 병동에 입원한 마법사 대신 다른 마법사를 수배했으나 새로 합류할 마법사가 도착하기 전에 떠도는 섬의 입구가 열려 버린 게 아닌가.

언제 다시 닫힐지 모르고 다시 찾기도 어려운 입구인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마법사 없이 나머지 대원들만으로 탐사를 강행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로리머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유적의 중심부 쪽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고대 유적의 비경이라 할 만한 곳에 가까워졌는데.

우리가 처음으로 여기를 탐사하는 탐사대가 될 수 있는데.

“할 수 없지. 돌아간다. 돌아가서 마법사를 기다려서 다시 들어와야겠어.”

아무리 욕심이 나도 대원이 셋이나 사라졌는데 탐사를 강행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조셉과 그렉, 마틴은요? 어떻게 하죠? 그냥 두고 나가요?”

“단순히 길을 잃은 게 아닌 것 같아. 우리끼리 찾을 수 없으니 마법사를 데려와 수색하는 게 더 빠를 거야.”

“자, 다들 돌아갑시다. 길 잘못 들지 않게 주의하고. 아까 올 때 남긴 표식 잘 보고.”

그때는 실타래를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반짝거리는 조약돌처럼 생긴 인공 자갈을 모퉁이마다 놓아서 돌아갈 때 표식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벽이나 바닥에 직접적으로 표시를 할 수도 있지만 로리머는 인공 자갈 표식을 선호했다.

옛 유적이나 문화 유산에 후대 사람이 자국을 남기거나 변형시키는 경우를 고고학자들은 유적이 오염되었다고 한다.

로리머는 이러한 유적 오염을 무척 꺼리는 사람이라 유적을 훼손하지 않는 것은 물론 탐사대가 가지고 들어온 물건도 일절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표식으로 놓아둔 인공 자갈을 하나하나 회수하며 되돌아가던 로리머는 문득 눈을 비볐다.

허리를 굽혀 인공 자갈을 하나 줍고 몸을 편 순간 바로 앞을 걷던 대원의 모습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것처럼 부스스 사라졌던 것이다.

“리코!”

사라지는 대원의 잔영에 손을 뻗었던 그는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세시온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어깨 위의 고양이도 막 사라지는 중이었다.

“냐아…….”

빈 동굴 속에서 고양이의 울음 소리가 희미하게 떠돌다가 흩어졌다.

* * *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여긴 어디지?”

세시온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방 앞에서 로리머 대장이 몸을 굽혀 인공 자갈을 줍는 걸 보았는데 다음 순간 시야가 안개처럼 흩어지면서 자신은 어딘지 모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실리, 괜찮아?”

“냐아옹.”

어깨 위의 아실리가 안전한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공동, 주위를 둘러싼 벽에는 알지 못하는 생물들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공동 가운데에는 작은 샘이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이 유적의 중심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샘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듯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세시온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물러서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는 점토와 모래의 벽,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길고 짧은 기둥들, 그리고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통로가 몇 군데 보였다.

촤악!

그가 어디로 물러서야 할지 미처 가늠하기도 전에 부글부글 끓던 샘물이 촤르르 소리를 내며 갈라지더니 거대한 생물이 뛰쳐나왔다.

곰인가? 아니, 웨어울프?

네 활개를 편 채 샘물 위로 떠오른 회색의 짐승은 사람보다 네댓 배 이상 컸다.

붉은 눈의 짐승이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말로만 듣던 마수인가!

세시온은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아실리를 품에 끌어안고 그대로 돌아서서 달아났다.

땅이 쿠르릉 울리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머리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땅이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세시온은 한 팔로 아실리를 단단히 껴안은 채 다른 쪽 팔로 눈앞에 솟아 있는 기둥을 붙잡았다.

뒤로 끌려 내려가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자세를 잡은 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듯 잔뜩 몸을 굽힌 채 앞으로 달려가는데 꿈틀거리던 땅이 이번엔 왼쪽으로 와르르 기울어졌다.

균형을 잃고 데굴데굴 굴러내려가는 세시온의 위로 창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이 내리쳐졌다.

크르르아악!

괴수의 포효 소리가 공동의 벽에 부딪쳐 메아리로 돌아오면서 돌림노래처럼 그의 귀를 때려대어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실리!”

괴수의 일격을 겨우 피했지만 다음 공격은 피할 수 없을 듯해 아실리를 꼭 끌어안고 몸을 구부리는데 고양이가 그의 품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캬오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날카로운 소리로 아실리가 부르짖었다.

작은 회색 고양이는 세시온의 앞을 가로막은 채 몸을 낮추고 온몸의 털을 있는 대로 부풀린 채 괴수를 노려보았다.

“실리, 비켜! 도망가!”

회색 괴수의 앞발이 세시온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세시온은 아실리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고양이는 오히려 그의 앞으로 몸을 던졌다.

괴수의 일격이 고양이의 작은 몸을 찢어놓는 순간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세시온의 눈을 가득 채웠다.

그가 뻗은 손은 아실리의 몸에 닿지 못했다.

아실리의 초록 눈은 마지막 순간까지 세시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리!”

공중에서 붉은 피를 뿌리며 떨어지는 고양이의 몸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세시온은 온몸을 뻗어 아실리의 몸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찢겨진 고양이의 몸이 팔 안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괴수가 다시 한번 앞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마지막도 너와 함께!

세시온이 아실리의 몸을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 * *

죽지 않았나?

아니 이미 죽은 건가?

세시온이 눈을 떴다.

어디지 여긴?

아까 그 장소인데?

꿈틀거리며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던 땅은 언제 그랬던가 싶게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샘물은 거울처럼 맑고 조용했다.

괴수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고 세시온은 샘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고 누군가 공중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깼나?”

공중에 부채처럼 펼쳐진 길고 화려한 은발, 청옥처럼 푸른 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용모의 사내가 한 사람, 마치 침대에 드러누운 듯 공중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그를 향해 한들한들 손을 흔들어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