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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4화 (104/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4화

28. 지하 유적(5)

제이든이 유적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아실리가 얼른 제지했다.

-실타래부터 풀어야지.

“아, 그렇지, 참.”

통로를 타고 내려올 때 썼던 밧줄을 풀어 놓고 그 끝에 실타래의 한쪽 끝을 묶은 뒤 실타래는 허리띠에 걸었다.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어 보니 술술 잘 풀려나갔다.

“크레타 섬의 미궁 들어가는 것 같네.”

-크레타 섬이 어디야?

“내 고향의 옛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야.”

-아하, 전에 얘기했던 신화?

아실리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몇 가지 해준 적이 있었는데 꽤 재미있게 들었다.

크레타 섬의 미궁 이야기도 다음에 해줘야겠네.

제이든은 테세우스가 된 기분으로 실타래를 풀면서 유적 안쪽을 향했다.

미노타우로스는 나오지 않아야 할 텐데.

지하 유적의 초입에는 벽화만 이어질 뿐 다른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실리, 왜 안 가?”

한 번 와 본 곳이라고 앞장을 서겠다던 아실리가 걸음을 멈추고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동그란 초록색 눈을 찌푸리면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뭔가 아슴푸레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실리?”

-응, 괜찮아. 가자.

아실리가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자 제이든이 머리를 갸웃했다.

왠지 아실리의 분위기가 평소와 좀 다른데?

“실리, 전에 와 봤을 때는 얼마나 깊이 들어갔었어?”

-많이 들어가진 않았어, 그때 세시온이 유물을 찾으러 왔었는데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왠지 불안해했거든. 그러다가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그냥 나가자고 했어.

아실리는 사십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세시온 다미에르는 이미 90세가 넘어서 대외적으로 은퇴를 알렸던 시기였다.

마법에 능통했던 만큼 신체적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는 훨씬 젊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현장 일은 더 이상 받지 않고 후대를 위한 사례집이며 연구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현장 일에 나서는 것은 위대한 후원자가 그에게 맡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단서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가 찾아야 하는 열두 개의 유물 중 그때까지 여덟 개를 찾아 놓았고 네 개가 남아 있었다.

어느 날 고고학자들과의 학술 모임에 다녀온 후 세시온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세시온, 왜 그래? 뭘 생각해?

노인의 무릎에 올라가 은빛 수염에 자기 수염을 비비면서 아실리가 묻자 세시온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었다.

“레칸도르의 금척(金尺)이 레타논의 황무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록을 봐서 그런단다.”

레칸도르의 금척은 아르카니오의 옛 군주인 레칸도르 왕이 썼다는 유물로 ‘운명을 재는 자’라는 별칭이 있는 황금 자인데,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보물이었다.

그리고 세시온이 찾아야 하는 열두 개의 유물 중 아직 찾지 못한 네 개 중 하나였고.

뭔가 걱정스러운 듯한 세시온의 얼굴을 보며 아실리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열두 개의 유물에 관한 소식이라면 티끌만 한 단서만 있더라도 대륙 어디든지 가 보는 세시온이었다.

한 번도 망설이는 일이 없었고, 잘못된 정보라도, 수없이 허탕을 쳐도 실망하는 일 없이 다음 기회를 또 기다리는 세시온이었는데 이번엔 좀 이상했다.

레타논에 처음 가 보는 것도 아닌데.

-레타논에 가는 게 싫어?

세시온의 낯빛을 살피면서 아실리가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실리의 턱밑을 긁어 주었다.

“음, 그래, 좀 내키지 않는구나.”

-옛날에 갔을 때는 괜찮지 않았어?

세시온이 처음 감정사가 되었던 젊은 시절에도 그와 아실리는 레타논에 한 번 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주 젊었지만 이미 유망한 감정사로 손꼽히고 있었기에 레타논의 유적 탐사 팀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때 세시온과 아실리가 참여했던 탐사 팀은 ‘황색 탑’과 ‘붉은 뿌리’를 탐사했었다. ‘떠도는 섬’은 입구를 못 찾아서였는지 탐사에서 빠졌고.

그때 세시온이 딱히 레타논을 꺼려하는 것 같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왜 내키지 않는다는 거지?

아실리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세시온을 바라보자 세시온은 은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키지 않아도 가 봐야겠지. 레칸도르의 금척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겠지?”

결국 세시온과 아실리는 다시 레타논에 왔었다.

황색 탑과 붉은 뿌리를 먼저 훑어본 후 지하 유적인 ‘떠도는 섬’에 들어왔었다.

세시온은 길잡이도 없이 떠도는 섬을 스스로 찾아 들어왔고 분명히 이 안 어딘가에 레칸도르의 금척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 같았다.

그런데 유적 중심부에 가까워지기도 전에 돌연 세시온이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떠도는 섬은 우리와 인연이 아닌 것 같다.”

-응?

“돌아가자, 실리, 레칸도르의 금척이 여기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인연 닿는 후인에게 맡겨야겠다.”

세시온은 아픈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아실리를 안아 올리고 재빨리 떠도는 섬을 빠져나왔다.

그때 세시온은 뭘 두려워했을까?

언제나 침착하고 대범했던 세시온, 어떤 위기를 맞아도 빙그레 웃으면서 위험을 헤쳐나가던 세시온인데 왜 이 유적에서는 그렇게 불안한 눈빛이었을까?

* * *

“실리?”

“포잉?”

제이든과 포이의 목소리에 아실리는 문득 과거의 회상에서 깨어났다.

“무슨 생각에 그렇게 폭 빠졌어? 포이가 부르는데도 못 듣고.”

“포잉!”

아실리는 머리를 포르르 털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제이든과 포이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냐. 옛날에 여기 왔을 때 생각이 나서 그랬어.

세시온 생각이 났나 보다 싶어 제이든은 말없이 아실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지금 생각났는데 우리가 여기서 찾아야 할 건 아마 레칸도르의 금척일 거야.

“금척이면 황금으로 된 자인 거지?”

-응, 운명을 잰다는 전설의 자야.

진짜로 운명을 재는 건 아니겠지만 레칸도르의 금척은 전쟁통에 사라지기 전까지 마법 왕국 아르카니오의 왕권을 나타내는 신물이었다.

-사십 년쯤 전에 그 금척이 레타논에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얻어서 세시온이랑 왔었거든. 근데 세시온이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그냥 돌아갔어.

아실리는 제이든을 향해 초록 눈을 반짝였다.

-만약 제이든이 인연이 닿는 사람이라면 금척이 제이든을 부를 거니까 집중하고 있어.

아실리의 뒤를 따라 유적의 안쪽으로 들어가며 제이든은 잔뜩 집중하고 있었지만 금척의 부름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저건 용 그림인가?”

아실리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입구 쪽보다 더 선명한 그림이 빼곡히 그려진 벽이 나왔다.

사람과 동물, 마수들이 땅에 있고 그 위의 하늘에 날개를 편 생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거칠고 단순한 선으로 새긴 그림이라 정밀한 맛은 없고 형태를 잡아 놓았을 뿐인데도 상당한 위압감이 있었다.

-응, 용이네.

“실리, 옛날엔 정말 용이 있었을까?”

지구에서도, 카이엔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용과 드래곤은 전설의 동물로 존재한다.

에트루리안의 서만 해도 영웅 에트루리안이 용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는 전설의 책이지만, 천 년 전의 일이니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구에도 그럴듯한 용과 드래곤의 전설이 얼마나 많은가.

-나야 본 적이 없지만 아주아주 옛날이라면 용이 있었을 거야. 세시온이 그렇다고 했는걸.

세시온이라고 설마 용을 본 적은 없을 텐데.

환각 속에서 본 적이 있을까?

동굴처럼 이어지는 유적은 갈림길이 몇 군데 있었다.

갈림길 두세 군데를 지나자 아실 리가 발을 멈췄다.

-난 지난번에 왔을 때 여기까지밖에 안 왔던 것 같아. 이다음 갈림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 제이든, 혹시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제이든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여기서 금척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정확한 길을 딱 선택해야 모양이 날 텐데 아직 특별히 느껴지는 게 없었다.

“음, 난 잘 모르겠지만.”

제이든은 싱긋 웃으며 어깨 위의 포이에게 손을 올려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자, 포이야, 갈림길이 나왔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우리 포이가 정해 주렴.”

포이는 맡겨 달라는 듯이 가슴을 쭉 펴더니 꾸물꾸물 제이든의 몸을 타고 내려왔다.

갈림길 사이의 모퉁이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코를 발름거리던 포이가 한쪽 길로 몇 걸음 깡충깡충 들어가 보았다.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고 귀를 쫑긋거리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이번엔 다른 길로 몇 걸음 팔짝팔짝 들어가 본다.

나름 심각하게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던 포이는 마침내 결심했는지 뒷발을 탕 구르면서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좋아, 포이가 고른 길로 가 보자!”

포에니 토끼의 행운을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제이든은 포이의 선택을 믿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포이는 큰일 해냈다는 듯이 깡충 뛰고는 제이든의 어깨 위로 다시 기어 올라와 마치 길안내 사냥개라도 되는 듯 가슴을 펴고 앞쪽을 주시했다.

몇 번의 갈림길을 포이의 선택에 따라 지나간 후, 아실리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지더니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유적 안은 별로 춥지도 않은데 고양이는 털을 오소소 세우면서 두 귀를 뒤로 젖혔다.

“실리,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뭐 안 좋은 느낌이 들어?”

-그런 건 아닌데……,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뭔가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한 게.

아실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상해, 나 여기 왔었던 것 같아.

고양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십여 년 전 세시온과 왔을 때는 이렇게 깊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왜 자꾸 낯익은 느낌이 들지?

“괜찮아, 실리?”

-응, 뭔가 기억날 듯 말 듯 자꾸 머릿속에 왔다갔다 하는데 뭔지 잘 모르겠어.

앞으로 걸음을 떼려던 아실리는 거부감을 느끼고 발을 다시 내려놓았다.

왠지 모르지만 막연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혹시 앞으로 나갈 때 거부감 같은 거 없어?

제이든은 아실리를 앞질러 몇 발자국 걸어가본 뒤 돌아보았다.

“아니? 괜찮은데?”

기분 탓인가? 아실리는 작은 머리를 다시 흔들고 앞발을 들어 수염을 정리한 뒤 용기를 내어 앞으로 전진했다.

기억날 듯 말 듯 머릿속에 안개처럼 떠도는 것은 이 유적에 대한 기억인 것 같은데 기억해 보려고 정신을 집중하면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실리는 기억력이 좋은 고양이여서 지난번에 세시온과 같이 왔을 때의 모든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데 이 불편한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갈림길을 더 돌고, 작지만 둥근 광장처럼 툭 터진 공간이 앞에 나타났을 때 아실리는 발을 딱 멈췄다.

-생각났어!

고양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야옹거리며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왜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이 안 났던 거지. 나 여기 왔었어. 처음 왔던 게 사십 년 전이 아니야. 아주아주 더 오래전에 나 여기 왔었어.

아실리는 공동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샘을 지켜보며 말했다.

-저 샘, 그래, 저 샘이 기억나.

고양이는 두어 발 옆으로 걸어와 제이든의 앞을 가로막고는 등을 둥글게 부풀리고 꼬리털을 세웠다.

“실리, 괜찮아?”

아실리의 상태가 어딘가 불안해 보여서 제이든이 안아주려고 손을 뻗자 아실리는 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제이든, 나, 여기서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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