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3화
28. 지하 유적(4)
“개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다음 날 아침, 길잡이 페트로가 데리고 나온 쥬노는 제이든 일행을 보며 친근하게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여관 주인이나 갈색 머리 아저씨가 개라고 말할 때마다 조금씩 머뭇거렸던 이유가 있었다.
“어디로 봐서 개예요? 아무리 봐도 늑대인데!”
그것도 일반 늑대보다 더 큰데요?
“아주 어렸을 때 구조해서 내가 분유 먹여 키웠으니 개나 마찬가지요. 절대 위험하지 않아요.”
페트로가 양해를 구하듯 쥬노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커다란 회색 늑대는 맞장구치듯 컹 소리를 내며 짖었다.
“정 무섭다면 쥬노를 두고 가겠지만, 떠도는 섬의 입구를 찾으려면 쥬노가 있는 게 큰 도움이 된다오.”
그는 제이든의 뒤에 있는 아실리와 포이를 넘겨다보며 말을 더했다.
“고양이와 토끼 친구도 안심해도 돼요. 쥬노는 절대 일행을 해치지 않아.”
아실리야 늑대 아니라 사자를 만난다 해도 겁먹지 않을 고양이지만, 포이는 많이 무서워할 텐데.
포이를 돌아보자 포이는 조금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제이든의 생각만큼 겁을 먹진 않은 듯 똘망똘망한 눈을 반짝이며 쥬노를 훔쳐보았다.
야, 그동안 우리 아기 토끼의 간이 많이 커졌네!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는 썰매를 탔고 페트로가 마부석에서 말을 몰았다.
쥬노는 썰매 옆에서 따라왔는데 북슬북슬한 회색 털을 날리며 달리는 모습이 늠름했다.
도로를 벗어난 황무지는 어디나 비슷비슷한 풍경이고 이정표도 없어서 길을 잃기 딱 좋았다.
가끔씩 나타나는 언덕이나 숲, 물이 말라 버린 위에 눈이 덮여 흔적을 알아보기 어려운 마른 개울이나 웅덩이를 솜씨 좋게 비껴가면서 황무지를 헤쳐 가는 페트로를 보며 제이든은 길잡이를 잘 골랐다고 감탄했다.
자신은 얼마 달리지도 않아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게 되었는데, 길잡이가 없었다면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게 되기 십상인 지형이었다.
세 시간 가깝게 황무지를 달린 후, 페트로가 썰매를 세우며 제이든을 돌아봤다.
“저기 깃발이 보이오?”
조금 앞쪽의 언덕 기슭에 노란 깃발을 단 깃대가 하나 꽂혀 있었다.
“예.”
“3년쯤 전에 왔던 유적 탐사 팀이 꽂은 깃발이라오. 그때 닷새 걸려서 입구를 찾았어요. 그때도 길잡이는 내가 했지.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입구가 있을 확률은 없지만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요.”
노란 깃발 주변을 한참 보고 있으니 지형이 많이 바뀌긴 했어도 환각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곳이 맞는 것 같았다.
“추우니까 고양이랑 토끼 데리고 썰매 안쪽에 있으쇼. 점심도 챙겨 드시고.”
“길잡이님은요?”
“꽤 멀리까지 탐색해야 될 수도 있으니 점심은 쥬노랑 알아서 먹을 거고 저녁때쯤 돌아오지 않을까 싶소. 운 좋아서 입구가 빨리 발견되면 그 전에 오고.”
쥬노와 함께 노란 깃발 옆으로 간 페트로는 깃발을 중심으로 신중하게 주변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페트로가 길고 가느다란 금속 막대 끝에 피라미드를 두 개 겹쳐 놓은 것처럼 생긴 육각형 물체가 달린 기구를 꺼내서 손에 든 채 천천히 걷고, 쥬노는 그와 좀 떨어져서 보조를 맞추며 냄새를 맡았다.
둘 다 자신이 하는 일을 확실히 알고 있는 듯 상당히 능숙해 보였다.
“처음 보는 기구인데, 아실리 혹시 알아?”
-응, 저거 테살리온의 낚싯대라고 부르는 기구인데, 지하 유적의 입구를 찾는 데 써.
테살리온은 몇 대 전의 마탑주였다.
유적 탐사에 심취했던 그가 지하 유적의 입구를 찾을 수 있는 기구를 발명한 이후 고고학자들이나 마법사들의 탐사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레타논의 다른 유적과 달리 떠도는 섬은 지하 유적인 데다 입구가 계속 옮겨다니는 것 때문에 발견도 탐사도 가장 늦었는데 테살리온의 낚싯대 덕분에 근대에 들어 몇 번의 탐사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름이 테살리온의 낚싯대인 것은 낚싯대를 닮은 외형 때문일 것이고.
일정한 구역을 살피고 나면 페트로는 조그만 깃발을 꺼내서 땅에 꽂아서 확인이 끝난 구역을 표시했다.
회색 머리의 길잡이와 회색 늑대의 모습이 눈밭 저편으로 점점 멀어지다가 언덕을 돌아 사라졌다.
“이거 참, 날도 추운데 썰매 안에서 기다리기만 하려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네.”
-그래도 눈이 안 오는 날이라 다행이야.
보온 마법이 걸려 있는 썰매 안에 있어도 쌀쌀한데 페트로에게 휴대용 난로라도 하나 줘서 보낼걸.
제이든은 모포 안의 난로를 만지작거리면서 아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실리, 여기가 마스터 다미에르랑 같이 왔던 곳 맞아?”
-응, 유적 세 군데 다 가봤는데 지형이 변해서 혼자 찾아오라면 못 찾아오겠네. 길잡이 구하길 잘했어.
“여기 오는 게 맞는 걸까?”
-제이든의 환각에도 나왔고 포이가 우연히 펼친 책에도 레타논이 나왔으니까 분명히 무슨 의미가 있을 거야.
썰매 안에서 점심을 먹고 한참 지난 후 해가 저문 뒤에야 페트로와 쥬노가 돌아왔다.
요기를 하고 난 페트로와 쥬노는 썰매를 몰고 탐색이 끝난 지역을 지나 다음 언덕 기슭 부분에 썰매를 세웠다.
“지난번엔 입구를 찾는 데 닷새쯤 걸렸는데 이번엔 느낌이 좋은 게 그만큼 안 걸릴 것 같소.”
“밤에는 어떻게 합니까? 여관으로 돌아가나요?”
“고용주에게 달렸지만 내 생각엔 노숙하면서 탐색을 계속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왕복 5~6시간이면 못 돌아갈 거리는 아니지만 내일 다시 오려면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하지 않겠소?”
아실리와 의논한 끝에 노숙을 결정한 제이든은 레노아에게 받은 화로를 밖에 놓고 불을 피웠다.
“이거 신기한 화로네. 열감도 정말 좋고. 이거 하나 있으면 다하르의 설산에서 노숙을 해도 끄떡없겠는데? 어디서 구한 건지 물어도 되겠소?”
페트로는 레노아의 화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법사에게 선물 받은 거라 구입처는 모릅니다만, 나중에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새 낯을 익힌 토끼와 고양이와 늑대는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저마다 받은 간식을 먹고 있었다.
당근 비스킷을 다 먹은 포이가 뒷발로 일어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앞발을 내밀었다가 깡충 뛰었다.
“토끼가 별이라도 따고 싶은가 보군.”
페트로가 포이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레타논의 황무지만큼 별이 많이 보이는 곳은 없지. 오늘 밤엔 바람도 거의 없어서 별이 더 잘 보이네.”
제이든도 양철 컵에 뜨거운 커피를 따른 후 하늘을 쳐다보았다.
페트로의 말대로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별이 마치 별의 바다처럼 하늘 가득 반짝이며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예전엔 레타논에서 마수가 나왔다던데, 혹시 에트루리안이 봉인했다는 게이트가 어디쯤이었는지 아시나요?”
페트로는 제이든을 보면서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고. 우리 집은 몇 명 되지 않는 레타논 토박이 집안인데 게이트의 흔적을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그렇습니까?”
“그렇지, 우리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여기서 나고 자란 길잡이여서 돌아가실 때까지 이 황무지를 우리 집 마당처럼 누비고 다니셨거든.”
하긴 천 년 전의 일이니 아무도 그 장소를 모를 법도 했다.
“백여 년 전까지는 유적 주변에서 마수가 출몰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면서요?”
“음, 나야 본 적이 없지만 기록상으로는 그렇다더군. 에트루리안이 마수들과의 싸움 끝에 게이트를 봉쇄할 때 이미 대륙에 퍼져 있던 마수들이 있었으니까.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마수를 본 적이 있다고는 했지만.”
게이트를 봉쇄한 후 에트루리안의 병사들이 많은 수의 마수를 처치했지만 남아 있는 마수들이 다 없어지기까지엔 몇백 년이 걸렸다.
레타논에서 마지막 마수가 목격된 것이 백이십 년 전이라고 했다.
등에 모포를 두른 채 화롯불가에 앉아 페트로가 레타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걸 듣고 있으니 슬슬 졸음이 왔다.
제이든이 꾸벅 머리를 앞으로 떨어뜨리는데 갑자기 쥬노와 아실리가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기차가 멀리서 지나가는 것 같은 땅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쥬노가 벌떡 일어서더니 쏜살처럼 어둠 속으로 달려갔고 페트로가 테살리온의 낚싯대를 집어들고 그 뒤를 따르면서 외쳤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귀와 수염을 바짝 세운 채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실리가 야옹 울었다.
-유적의 입구가 울리는 소리인 것 같아.
얼마나 빨리 달려갔는지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던 페트로와 쥬노는 한참 지난 후에 쥬노만 돌아왔다.
커다란 회색 늑대는 곧장 제이든을 향해 달려와서 컹컹 짖었다.
“따라오라고?”
제이든이 일어서서 쥬노를 따라가려고 하자 쥬노는 커다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썰매 쪽으로 달려가서 말 옆에 서서 우우우 울었다.
-썰매를 타고 오라는 것 같네.
아실리와 포이를 썰매에 태우고 제이든이 마부석에 앉자 쥬노는 말의 앞에서 달리며 길을 인도했다.
잠시 후 언덕을 하나 넘어가자 페트로가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테살리온의 낚싯대 끝에 달린 육각형의 피라미드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아래쪽에서 땅바닥의 눈과 모래가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막대를 잡고 있는 게 상당히 힘이 드는 일인지 페트로는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 같았다.
눈과 모래가 섞인 채 빙글빙글 돌아가던 바닥 가운데 부분에서 마치 땅이 눈을 뜨는 것처럼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조금씩 넓어졌다.
페트로는 구멍이 넓어지는 것에 따라 신중하게 뒤로 물러나면서 낚싯대를 조정하고 있었는데, 한참 빙글빙글 돌아가던 피라미드와 눈더미가 점점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췄다.
“이제 가까이 와도 되오.”
페트로가 장갑 낀 손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털모자를 쓴 이마 아래로 얼굴 가득 땀이 배어나와서 덥수룩한 수염에도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하루 만에 입구가 나타나기는 처음이네. 감정사 양반 운이 좋소.”
페트로는 발아래에 열린 구멍을 가리키며 품에서 꺼낸 깃발을 구멍 옆에 꽂았다.
“일단 입구가 열렸으니 하루이틀 정도는 유지될 거요. 지금 바로 들어가 보시겠소? 아니면 한숨 자고 아침에 들어가 보시겠소?”
“그냥 지금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유적은 나도 두 번밖에 들어가 보지 못했고, 두 번 다 초입 부분에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에 안쪽에서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없소.”
제이든은 페트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밖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살펴보고 나오겠습니다. 추우니까 썰매에 들어가 계세요.”
“초행인데 괜찮겠소?”
“예. 괜찮습니다.”
“그럼 토끼와 고양이는 내가 썰매에 잘 데리고 있겠소.”
“아뇨, 아이들은 저랑 같이 갑니다.”
페트로는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본래 마법사나 학자들 중에는 특이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 감정사는 토끼와 고양이를 항상 데리고 다니는 모양이지.
“자, 이걸 허리에 묶고 내려가시면 되겠소. 나중에 올라올 때는 종을 울려요. 줄을 당길 테니.”
페트로가 제이든의 허리에 묶어 준 밧줄에는 실타래와 작은 종이 달려 있었다.
“떠도는 섬은 길이 여러 갈래라서 그 실타래를 풀면서 가야 길을 잃지 않을 거요.”
“알겠습니다. 자, 아실리, 포이, 내려가자.”
-내가 먼저 갈게. 기다리고 있어.
배낭을 등에 멘 제이든이 아실리와 포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아실 리가 재빨리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실리!”
잠깐 시간이 흐른 후 구멍 속에서 아실리가 야아옹 길게 우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괜찮아, 들어와.
먼저 들어가서 안전한지 보려고 했던 모양이네.
제이든은 빙그레 웃으면서 포이를 가슴에 단단히 껴안고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미끄럼틀처럼 회전하며 내려가는 모래 통로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가자 툭 터진 공동이 나왔다.
바닥에 쌓인 모래 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떨어진 제이든은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서서 안고 있던 포이를 어깨에 올렸다.
바깥은 눈이 녹지 않은 겨울밤인데 떠도는 섬 안은 초가을 정도의 서늘한 온도였다.
체감상 겨우 이십여 미터 정도 아래로 내려온 것 같은데 이렇게 온도 차이가 날 수 있나?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다.
한낮처럼 밝진 않아도 충분히 사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인 걸 보면 어딘가에 광원이 있는 것도 같았다.
“감정사 양반, 잘 내려갔소?”
위쪽에서 메아리처럼 페트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아실리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그랬지만 내려온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은데도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입구에서 내려오는 통로에 아무래도 시공의 왜곡 같은 장치가 걸려 있는 듯했다.
“예, 잘 내려왔습니다.”
“탐사가 끝나면 종을 울리쇼! 줄을 끌어올릴 테니!”
“알겠습니다.”
먼저 내려온 아실리가 제이든에게 다가왔다.
-바깥쪽 지형이 변해서 조금 걱정했는데 안쪽은 거의 변하지 않았네.
자, 오기는 왔는데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찾아야 할까?
동굴처럼 주위를 둘러싼 테라코타 느낌의 적갈색 점토 벽에는 낡아서 흐려진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숲과 언덕, 모래벌판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에는 독특한 사각 형태로 서로 이어진 집들, 마치 개미굴을 땅 위로 올려 놓은 것 같은 것처럼 계속 이어진 집들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 도시인가 보네.”
땅 위에 올려 놓은 사각 동굴처럼 계속 이어진 집들 사이로 드나드는 사람들도 그려져 있었다.
개미처럼 작게 그려져 있었지만 터번을 쓰고 위에서부터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천 한 장으로 된 옷을 두른 사람들이 보였다.
“고대인들의 벽화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사람들의 도시 저편으로 숲 쪽에는 토끼, 사슴, 늑대, 여우, 그리고 곰 등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고 아마 마수인 듯 제이든이 알지 못하는 형태의 동물들 그림들이 보였다.
그림을 따라 유적의 안쪽으로 눈을 돌리자 동굴처럼 뻗어 있는 깊은 곳에서 제이든을 부르는 듯한 부드러운 땅울림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