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2화 (102/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2화

28. 지하 유적(3)

휘리리리 소리를 내며 부는 바람이 땅바닥에 쌓인 눈을 쓸어가자 눈더미가 바람에 휘말리며 밀려갔다.

마치 커다란 지하 생물이 꿈틀거리며 이동해 가는 것 같아 찔끔한 제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레타논에 마수가 나타나지 않은 지가 백 년도 넘었다고는 하지만 원래는 마수가 샘솟듯이 쏟아져나오는 게이트가 있었다던 곳이다.

말이 씨앗 된다고 혹시라도 땅거죽을 뚫고 긴 잠에서 깬 마수라도 솟아나오면 어쩔 것이야!

방정맞은 제 입을 손등으로 톡 때린 제이든이 서둘러 썰매를 몰았다.

‘골든 폰드’라는 표지판이 붙은 기둥 아래를 통과하며 보니 왜 치안대장이 이곳이 마을이랄 건 아니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치안대로부터 여기까지 이어진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집들은 다 합쳐도 열 집이 못 되어 보였다.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할 정도로 작은 마을인데 ‘황금 연못’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것은 아마 중심부 쪽에 보이는 작은 샘 때문이지 싶었다.

이름은 연못이지만 연꽃 같은 건 없고 그냥 맑은 물만 찰랑거리는 샘이었다.

“신기하네, 티아룬 호수도 얼었는데 저렇게 작은 샘이 얼지 않았어.”

-저 샘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대.

아실리가 종알거렸다.

-옛날에 세시온과 왔을 때 물 긷던 사람이 그랬어. 이 샘은 얼지 않는다고.

샘 주변에는 낡았지만 아담한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다.

그 옆에 썰매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눈에도 여관처럼 보이는 집의 덧문이 열리면서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나왔다.

“새로 오신 여행자분이시구려? 이리 들어오시오. 날이 추운데 얼른 들어와서 몸 좀 녹여요.”

여관 앞에 걸려 있는 색바랜 간판에도 오래된 장식체로 황금 연못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말을 마구간에 넣고 물과 먹이를 챙겨 준 뒤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여관 1층으로 들어가자 온기가 확 돌면서 몸이 따뜻해졌다.

썰매 안에는 마법 난로가 있어서 그리 춥지 않지만 마부석은 아무래도 많이 추웠던 것이다.

“에취!”

“자, 자, 이쪽으로 앉아요. 날이 이렇게 추운데 고양이랑 토끼까지 용케 데려왔네.”

여관 주인은 제이든이 재채기를 하는 걸 보고 서둘러 그들을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에서 가장 가까운 식탁으로 안내했다.

불이 너무 화력 좋게 타오르고 있어서 좀 무서운지 포이는 제이든의 어깨에서 내려가기를 머뭇거렸지만 아실리는 재빨리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불 앞의 깔개에 기분 좋게 드러누웠다.

“대범한 고양이네, 다른 동물의 냄새쯤은 신경 쓰이지 않나 보지?”

여관 주인이 아실리를 보며 웃었다.

“저 자리, 우리 동네 사냥꾼 겸 길잡이의 개……, 음, 개가 여기 오면 눕는 지정석인데.”

아실리가 고개를 들고 깔개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더니 상관없다는 듯 한 바퀴 구르고 몸을 펴는 걸 보면서 주인은 또 웃었다.

카이엔의 여관 겸 식당이 대부분 그렇듯 이 층이 숙소, 아래층은 식당인 구조였는데 유동인구가 얼마 안 되는 탓인지 공간이 제법 널찍한데도 식탁은 네 개뿐이었다.

거칠게 깎은 나무 탁자가 넓고 두툼해서 여섯 사람 정도는 넉넉히 앉을 크기이긴 했지만.

“자, 이걸로 우선 몸을 좀 녹이고, 점심 드셔야지?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소?”

식당에서 바로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따뜻한 차와 우유를 가져온 주인이 차는 제이든에게, 우유는 아실리와 포이에게 주면서 물었다.

“어……, 메뉴가 따로 없나요?”

“여기는 외부 손님이 거의 없으니까, 늘 밥 먹으러 오는 이웃들이 몇 명 있을 뿐이라 메뉴 같은 건 없수. 그날의 추천 메뉴는 하나씩 준비하지만 다른 걸 먹고 싶다거나 뭘 먹고 싶다고 미리 말하면 그걸 만들어 주곤 한다오.”

“그럼, 오늘의 추천 메뉴는 뭔가요?”

“오늘은 북부식 크림소고기볶음인데…….”

“이봐, 외지인이 왔다면서?”

주인이 메뉴 설명을 하려는데 덧문이 쾅 열리면서 주인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바람 들어와. 얼른 문 닫게!”

“엉, 알았어, 알았어!”

문단속을 한 남자들이 제이든의 식탁 옆으로 가까이 왔고 포이는 얼른 제이든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벽난로 앞 아실리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외지인이 온 게 몇 달 만이야!”

“반년쯤 됐지? 작년 여름에 남부로 가는 상단이 지나갔었고, 가을 되기 직전에 마법사가 한 번, 그리고 바로 고고학자 한 팀이 왔다 간 후로 아무도 안 왔으니까.”

북부 사람답게 수염을 길러 털북숭이로 보이는 남자들이 제이든의 바로 옆 식탁에 앉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둘 다 덩치가 크고 텁석부리였는데 한 명은 옅은 갈색 머리였고 한 명은 회색 머리였다.

갈색 머리 쪽은 활달하고 수다스러웠고 회색 머리 쪽은 과묵했다.

“젊은이, 이해하게. 우리가 외지 사람을 보는 게 오랜만이어서. 요즘 새로운 소식을 좀 듣고 싶어서 말이야.”

싹싹하게 말을 붙인 갈색 머리 남자가 제이든을 탐색하듯 살펴보았다.

“상인 같지는 않은데, 마법사인가? 아님 고고학자?”

“아니요. 유물 감정사입니다.”

“오! 유물 감정사! 그렇지, 고고학자 팀에도 보통 감정사가 한 명씩 있었어. 혼자 온 감정사는 처음 보는군.”

“옛날에 세시온 다미에르는 혼자 왔었다던데?”

음식 주문을 받은 주인이 주방으로 가면서 말하자 갈색 머리는 손을 내저었다.

“아, 난 그때는 여기 안 살았으니까. 내가 온 이후로 혼자 온 감정사는 없었어.”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에 살다 보니 외지 소식에 목말랐는지 갈색 머리는 제이든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물었다.

“보름에 한 번씩 치안대로 소식지가 오긴 하는데 아무래도 사람 입으로 직접 듣는 것만 못하지.”

그는 옆에 앉은 회색 머리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대신 자네도 유적지에 대해서나 레타논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게. 이 친구가 레타논에서 제일 유명한 길잡이거든! 여기서 나고 자란 토박이기도 하고.”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생긴 텁석부리 아저씨 두 명 중 과묵한 회색 머리 쪽이 길잡이인 모양이었다.

“소식지에 보니까 글로비스 시에서 밤의 경매 조직이 일망타진되었다던데, 감정사니까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겠지?”

“아, 예…….”

“그때 전설의 포에니 토끼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정말인지 모르겠네. 혹시 아는가?”

“아, 하하, 글쎄요.”

전설의 포에니 토끼는 지금 저쪽에서 고양이의 옆구리를 벤 채 동그란 배를 드러내고 불을 쪼이는 중이랍니다.

“시계 괴도가 잡혔다는 소식이 있던데, 소식지에는 상세한 내용이 없었지만 좀 복잡한 상황인 것 같던데 혹시 들은 게 있나?”

“아, 그 일이라면 아는 게 좀 있습니다. 사실 그 괴도에게도 사정이 있었답니다.”

시계 괴도 외에도 레타논 밖의 소식을 몇 가지 이야기해 주자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역시 소식지보다는 사람한테 직접 듣는 게 나아. 자네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는구먼.”

“여독에 지쳤을 텐데 앉자마자 귀찮게 굴어 미안하네. 이야기 값으로 점심은 우리가 사지.”

음식이 나오자 회색 머리가 갈색 리 아저씨를 툭 쳤고 갈색 머리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끓인 포도주를 마시며 자기 몫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크림소고기볶음이라는 요리 이름을 들었을 때는 뭔가 이상한 맛의 음식일까 미심쩍었는데 나온 음식은 의외로 맛있었다.

신맛이 나는 크림과 양념한 소고기와 버섯을 함께 볶은 것이 지구에서 먹어 본 비프 스트로가노프와 비슷했다.

“어, 그거 고양이에게 주면 안 되잖나?”

아실리에게 맛이나 보라고 조금 주려고 했는데 갈색 머리 아저씨가 깜짝 놀랐다.

“에헤이, 양념한 걸 주면 안 되지. 여기까지 고양이를 데리고 올 정도면 아끼는 고양이일 텐데. 거 알 만한 사람이!”

“아, 예. 저도 아는데 무심코, 하하.”

아실리가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 음식을 다 먹어도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제이든은 그냥 헛웃음을 웃었다.

“혹시 고양이를 키우십니까?”

“아니, 여기는 고양이 키우기엔 너무 추워서. 예전에 린덴버그에 살 때 키웠었지.”

그는 아실리와 포이를 보면서 털북숭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는 또 회색 머리의 등을 툭 쳤다.

“그때 키웠던 고양이는 나이가 들어서 하늘로 갔고, 지금은 이 친구네 개……, 음, 개를 내 개처럼 키우고 있지.”

식당 주인도 그러더니 이 사람도 개 이야기를 할 때 잠시 머뭇거리네?

“쥬노가 왜 자네 개야? 페트로의 개지.”

음료를 가지고 왔던 식당 주인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자 그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새끼 때부터 나랑 같이 키웠으니 내 개나 마찬가지지 뭐. 나 혼자 사냥 나갈 때도 잘 따라가는데, 그렇지, 페트로?”

“늑대나 곰 같은 동물이 많은가요?”

제이든이 묻자 갈색 머리가 대답했다.

“늑대나 여우 정도는 제법 있지. 곰은 못 본 것 같은데.”

“곰은 나도 못 봤는데. 레타논에 곰이 나타나지 않은 지는 오래됐어.”

여기서 나고 자랐다던 회색 머리 아저씨도 한마디 했다.

제이든은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나는 곰을 봤는데? 레타논이 아니고 티아룬 호수 옆이긴 했지만.

그쪽에만 곰이 있고 이쪽 지역엔 없는 건가?

레타논은 여름엔 사막, 겨울엔 눈밭이라 동식물이 살기 적당한 환경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지. 사람 안 사는 땅이 이렇게 넓은데 환경까지 좋았어 봐. 동물이 넘쳐났겠지. 그래도 말이 사막 같다는 거지 진짜 사막은 아니어서 숲이 많다고.”

말수가 별로 없던 회색 머리의 남자 페트로가 제이든에게 물었다.

“감정사라면 유적을 보러 오셨을 텐데 어느 유적으로 가시나? 길잡이는 필요한가?”

제이든이 대답하기 전에 아실리를 힐끗 보니 아실리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야옹 울었다.

-내가 여기 와본 게 사십 년 전이니까 지금은 아무래도 길잡이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유적 안쪽은 몰라도 바깥쪽은 좀 변했을 테니까.

제이든이 페트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필요할 듯합니다.”

건성으로 포도주만 마시는 것 같던 페트로가 바로 제이든을 향해 돌아앉더니 직업적인 말투로 변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레타논의 유적은 세 군데가 있소. 가장 큰 유적인 ‘황색 탑’과 규모가 좀 작은 ‘떠도는 섬’과 ‘붉은 뿌리’요. 입구가 알려지지 않은 곳이 두어 군데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감정사 양반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요?”

‘황색 탑’은 천 년 전 에트루리안의 원정 때 발견된 유적인데 그동안 꾸준히 탐험과 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떠도는 섬’은 그 후 삼백 년쯤 지난 후에, ‘붉은 뿌리’는 가장 최근인 사백 년쯤 전에 발견된 유적이라 했다.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이곳입니다.”

제이든은 배낭에서 꺼낸 스케치북을 길잡이에게 보여주었다.

환각 속에서 본 풍경을 그려 놓은 것이었다.

그림을 잠시 들여다본 길잡이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이거 누가 그린 거요?”

“제가 그린 겁니다.”

“여기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면서요? 와보지 않은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닌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고급 감정사는 가끔 꿈을 꿉니다. 감정사의 환각이라고 하는데 유물과 관련된 꿈을 꾸곤 해요. 제가 이 장면 꿈을 꾸었기 때문에 여기 와보려고 하는 거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어본 것 같긴 하네. 신기하군.”

길잡이는 납득했는지 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는 떠도는 섬 같소. 세 군데 유적 중 가장 들어가기 힘든 곳인데.”

그는 다시 그림을 살펴보았다.

“상당히 정확히 그렸지만 최근 모습은 아니오. 감정사 양반이 꾼 꿈은 상당히 오래전의 모습 같소.”

그는 그림 속의 나무와 언덕 등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이 레투아나톡스 나무의 크기나 뒤쪽 언덕, 그 옆의 숲 등을 볼 때 이건 상당히 오래전의 모습 같소. 레투아나톡스는 성장이 굉장히 늦지. 내가 볼 때.”

페트로는 제이든을 보며 싱긋 웃었다.

“감정사 양반은 수백 년 전의 이곳 모습을 꿈으로 보고 그려낸 것 같소.”

주변 사람들이 탄성을 토했지만 제이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에트루리안과 그의 기병들이 나왔으니 이 그림은 천 년 전의 모습일 것이었다.

그걸 알아본 길잡이의 눈썰미가 믿음직했다.

“하필 떠도는 섬이라니, 세 유적 중 가장 어려운 곳에 가시는군.”

“어떤 면에서 어려울까요?”

“이 유적은 붉은 뿌리보다 먼저 발견되었지만 붉은 뿌리보다 훨씬 조사가 덜 되었다오. 들어가 본 사람도 얼마 안 되고. 왜 이름이 떠도는 섬인지 아시오?”

길잡이는 그림을 제이든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 유적의 입구는 계속 움직인다오. 여름에는 바람과 모래, 겨울에는 눈더미가 계속 입구를 가리는데 어디서 입구가 다시 나타날지 몰라서 마치 떠도는 섬과 같은 유적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더군.”

“뭔가 마법이 걸려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갈색 머리가 끼어들었다.

“음, 그래도 찾으실 수는 있는 건가요?”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찾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내가 안쪽까지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라, 안쪽에서는 다른 곳만큼 길잡이 역할을 잘할 수가 없겠소.”

“괜찮습니다. 조심해서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입구를 찾기만 한다면 유적 안쪽으로는 기억력이 아주 좋은 길잡이가 하나 더 있기도 하고요.

제이든은 벽난로 앞에서 포이를 핥아 주고 있는 아실리를 슬쩍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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