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100화 (10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100화

28. 지하 유적(1)

저 섬이 카티야의 섬이란 말이지.

제이든은 멀리 보이는 섬 쪽으로 곁눈질을 치면서 생각했다.

센디니온 쪽으로 간다면 호수를 횡으로 가로질러 가니까 섬에 들러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동쪽의 콜레디오바에서 북서쪽을 향해 대각선으로 올라가는 중이라 섬을 멀찌감치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카이엔의 북서부 레타논 영지는 여러모로 특이한 곳이었다.

카이엔 대륙에 아직 일곱 왕국이 생기기 전의 레타논은 사람이 살 수 없고 마수와 괴물들만 들끓었다는 황무지였다.

오래전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로 고대의 유적지가 있기는 했으나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였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레타논에 마수가 생긴 이후로 멸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이곳에서 시작된 마수와 괴물들이 주변 지역에 퍼지고 티아룬 호수를 건너 그 아래쪽의 중부와 동부 지역까지도 퍼져나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레타논의 황무지에 마계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 입구에서 마수와 괴물들이 끊임없이 솟아 나온다고, 개미굴에서 솟아 나오는 개미처럼 솟아 나온 마수와 괴물들이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카이엔 대륙인들과 마수들과의 싸움은 몇백 년이나 지속되어 왔다고 한다.

그 후 동부에 최초의 왕국 에테노른이 세워졌고, 용의 가호를 받았다는 에테노른의 영웅 에트루리안이 마수의 본거지를 찾아 병사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그들은 마수와 싸우며 북상한 끝에 마침내 레타논까지 찾아왔고 7년간의 전투 끝에 결국 마수가 솟아 나오는 문을 봉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당시 에트루리안이 마계로 통하는 문을 닫고 봉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용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트루리안은 용의 말을 직접 받아썼다고 하는데 그 책이 바로 ‘에트루리안의 서’이다.

제이든이 밤의 경매에서 입수해 지금 세시온 다미에르의 서재에 있는 바로 그 책, 일명 ‘용의 이야기’라고도 부르는 책인 것이다.

에트루리안과 그의 기병들이 마수와 괴물들을 무찌르고 마계로 통하는 문을 닫은 후, 에트루리안은 에테노른으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데 에트루리안이 비길 데 없는 전사였다면 그의 형제 폴리트루스는 정치, 외교에 뛰어난 문사였다.

그들은 함께 에테노른의 왕이 되어 백성을 잘 먹이고 입히며 문화를 발전시키고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대륙 곳곳에 아직 마수와 괴물들이 남아 있었지만 샘처럼 새로운 마수들을 내보내던 레타논의 문이 닫힌 후 그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인간들의 마을과 도시가 늘어나고 나라가 생겼다.

레타논의 황무지 주변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도시가 되고, 국가를 건설했다.

북쪽에는 다하르가 생기고 서쪽에는 엘데온이 생겼으나 그 접경지역인 레타논은 계속 빈 땅으로 남아 있었다.

옛 유적지 주변으로 몇 번 마을이 건설된 적이 있으나 사람들이 오래 버티지를 못했다.

봉인됐다고는 하지만 마계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는 곳이었고 마수의 근원지라 사람들이 꺼려하는 데다 농작물을 심어도 잘 자라지 않았다.

레타논을 영지로 삼고 싶었던 다하르나 엘데온에서 사람들에게 포상을 해주면서 정착을 권면한 적이 있었는데 땅을 거저 주고 정착금을 주어도 몇 년 지나면 사람들이 떠나 버리곤 했다.

결국 레타논은 옛 유적과 그 후 몇 번 건설 시도를 했던 마을의 흔적만 남긴 채 빈 땅으로 남았고 카이엔 중앙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레타논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고대 유적 연구를 위해 마탑이나 황궁의 허락을 받은 마법사나 고고학자, 그리고 옛 다하르와 엘데온 사이에 건설되었던 도로를 이용하는 상인들뿐이었다.

아실리는 세시온 다미에르와 함께 레타논에 두 번 가본 적이 있다고 했지만 제이든은 이쪽 지방에 와보는 것이 처음이어서 가슴이 좀 두근거렸다.

마계의 게이트가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전설이니까 설마 진짜 마계는 아닐지라도 뭔가 마수와 괴물이 생겨나는 곳이 있었던 건 맞지 않겠나.

“피이잉.”

썰매의 뒤쪽에서 포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깬 모양이다.

-포이 배고프대.

아실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제이든도 배가 출출한 참이었다.

“거기 배낭에서 간식거리 조금만 꺼내 먹어. 호수를 빠져나간 뒤에 저녁을 먹자.”

얼음판 위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별미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뭍으로 올라가 불을 피운 뒤 아실리와 포이에게 따뜻한 걸 먹이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니 포이가 배낭 속에 거꾸로 박히듯 몸을 넣고 뒤적뒤적 이것저것 꺼내고 있었다.

“콜레디오바에서 포니 아가씨가 챙겨 준 과자랑 빵도 있고, 운디니움의 주방에서 싸준 도시락도 있을 거야. 너희들 물고기랑 놀 때 받았어. 건강식이래.”

병원 밥이라 그런지 운디니움의 식사는 너무 담백하긴 하더라만.

“포이잉!”

포이가 썰매 앞쪽 마부석으로 와서 제이든의 등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위험하니까 조심해, 포이야.”

그의 등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온 포이가 뒤쪽에서 제이든의 입에 뭔가를 쏙 넣었다.

“앗 차가워!”

세렌토에서 얻은 라벤더베리 빙과였다. 몇 개 남지 않아서 포이도 아껴 먹는 건데.

“아우, 포이야.”

아무리 맛있어도 너무 차갑잖아. 얼음판 위를 달리고 있는데 빙과라니.

포이의 입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저도 하나 입에 넣은 모양이었다.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어 얼굴은 안 보이지만 맛있지? 맛있지? 하는 눈으로 보고 있을 게 뻔해서 제이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빙과를 오도독 깨물었다.

“마, 맛있어. 포이야. 고마워.”

달콤하지만 짜르르한 냉기가 입에서부터 식도를 거쳐 내려가는 바람에 제이든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포이는 만족한 듯 깡충깡충 썰매 뒤쪽으로 돌아갔다.

아실리가 휴대용 난로를 끌어안고 건포도가 박힌 계란 과자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제이든에게 눈웃음을 쳤다.

나도 저거나 주지.

제이든은 입안에 남은 빙과 조각을 삼킨 다음 마부석 옆에 놔두었던 텀블러를 들어 따뜻한 커피를 꼴깍 삼켰다.

마법으로 온도를 보존할 수 있는 텀블러가 있어 다행이야.

* * *

해가 지기 전에 호수를 빠져나가려고 서둘렀지만 호수를 벗어나 땅에 발을 디딘 것은 이미 노을이 짙어지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썰매를 세우자 지친 말이 푸르르 투레질을 하면서 입에서 햐얀 김을 뿜었다.

“수고 많았다. 이제 좀 쉬어.”

말의 몸에서 마구를 벗긴 제이든이 고삐를 길게 늘여서 적당한 나무에 묶은 다음 썰매에서 담요를 꺼내 등에 덮어주었다.

물과 말먹이를 챙겨 준 뒤 눈이 좀 덜 쌓인 자리를 골라 둥그렇게 눈을 쓸어낸 후 가운데에 레노아에게 받은 화로를 놓았다.

“주문이 뭐라고 했더라. 잊어버릴까 봐 적어 놨는데. 아, 플레이모 이그나티아!”

화로에서 불꽃이 화르륵 일었다.

“와, 자그마한 화로인데 불이 겁나 크게 일어나네. 아실리, 포이, 이쪽으로 와.”

포이가 깡충깡충 뛰어와서 커다랗게 피어오른 화롯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아실리가 야옹 울며 얼른 포이를 뒤로 잡아당겼다.

-눈썹 태울라! 예전에 내가 알던 고양이가 촛불에 얼굴 들이대서 눈썹 태워 먹은 적 있는데.

“그런 고양이가 있어? 그런 사고는 대개 댕댕이가, 아니 그러니까 강아지들이 치지 않나? 고양이는 보통 조심성이 있지 않아?”

-대개는 그렇지만 고양이들 중에도 말썽꾸러기는 있거든. 촛불에 눈썹 태워 먹은 냥이도 있고 벌집에 발 넣어서 앞발 퉁퉁 부었던 애도 있어.

아실리는 포이를 충분히 뒤로 당겨 놓은 뒤에야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앞발을 날름날름 핥았다.

제이든은 썰매의 담요 안에 넣었던 휴대용 난로까지 가져와서 아실리와 포이 사이에 놓고 아실리의 등에 담요를 잘 덮어준 뒤 Y자로 갈라진 나뭇가지 두 개를 화로 양쪽에 꽂아놓고 화로 위에 냄비를 걸쳤다.

-건량은 충분히 있는데 뭐 만들려고?

“응, 불이 좋으니까 간단한 스튜나 해서 먹자. 따뜻한 거 먹으면 좋잖아.”

불빛이 일렁거리며 고양이와 토끼의 얼굴을 비추니까 날이 추워도 따뜻한 기분이 든다.

배낭에서 야채 봉지를 꺼내자 포이가 깡충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당근과 브로콜리 몇 조각을 꺼내서 포이에게 준 뒤 아작아작 먹는 소리를 들으며 스튜 준비를 했다.

버터를 냄비에 녹이고 야채 봉지의 당근 스틱과 브로콜리, 감자, 양파, 버섯을 조금씩 넣고 버터에 볶았다.

야채가 어느 정도 익은 뒤 밀가루를 두 숟가락 정도 넣고 좀 더 볶다가 우유와 물을 3대2 정도의 비율로 넉넉히 넣었다.

“이제 치킨 스톡만 넣으면 되지.”

세렌토에서 사온 치킨 스톡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쪼개서 넣고 뭉근히 끓이자 금방 맛있는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참 좋은 세상이다옹. 예전에 세시온이랑 왔을 때는 마른 나뭇가지 모아서 모닥불 피우고 육포로 국물 낸 거에다 곡물가루 넣어서 수프 끓였는데.

아실리가 추억에 잠긴 듯 화롯불을 보고 불멍을 때리면서 또 라떼 타령을 했다.

-그때는 부싯돌을 안 쓰고 세시온이 주문만으로 나무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것만도 대단하다고 했는데.

아실리가 수십 년 전의 추억을 되새기는 동안 제이든은 생선 토막을 익히고 토끼용 야채 비스킷도 살짝 데웠다.

“자, 저녁 먹자. 시간이 좀 늦어서 배고프네.”

-보들보들하게 잘 익혔네, 맛있다.

“포잉!”

아실리와 포이도 제 몫의 음식을 받아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제이든도 야채 스튜를 떠서 빵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나도 조금만 줘.

아실리가 스튜를 맛보고 싶어 해서 조금 떠 주자 날름날름 핥아 본 아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도 안 넣었고 제대로 된 주방도 아닌데 잘 만들었네. 감자도 푹 익었고 밀가루랑 우유를 넣어서 크림 스튜 맛이 나는데 간도 딱 좋고.

오랜만에 미식가 고양이의 품평을 들으면서 속이 따뜻해지는 스튜를 먹는 중인데 뒤쪽의 나무들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말이 움직이는 소리인가 싶어서 돌아봤는데 말은 이미 제 먹이를 다 먹고 나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아실리와 포이도 귀를 쫑긋 세운 채 숲속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아실리, 누가 있는 것 같지? 야생동물인가?”

-글쎄, 동물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살기는 없어. 나쁜 기운이 있으면 내가 벌써 알았을 거야.

아실리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숲속을 바라보고 있는데 겨울나무들 중 유난히 굵다 싶던 나무둥치 하나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나무둥치에 뚫린 구멍 속에서 뭔가 꾸물꾸물거리며 빠져나왔다.

투실투실한 몸, 짧은 팔다리, 동그란 얼굴에 불쑥 튀어나온 까만 코, 작고 동그란 귀.

연한 회색의 곰 한 마리가 자다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나무 밑동의 구멍에 반쯤 몸을 걸친 채 코를 킁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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