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9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9)
“야아옹!”
아실리의 목소리가 귓전에 또렷하게 울렸다.
제이든이 눈을 뜨자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바로 얼굴 앞에 보였다.
“실리!”
“냐웅…….”
제이든의 어깨에 앞발을 올려놓은 채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실리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포옥 한숨을 쉬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포오이.”
제이든의 무릎 위에 안겨 있던 포이도 눈을 비비면서 머리를 들었다.
“겨우 깨어났군. 보통 유물의 환각을 볼 때 늦어도 5분 이상 걸리지 않는데 너무 오래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했네. 고양이도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하던데.”
칼리스타가 말하자 아실리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제이든에게서 한 뼘쯤 떨어져 앉더니 먼 산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거의 반 시간을 깨어나지 않았는데, 몸은 괜찮은가?”
“예. 굉장히 피곤하긴 한데 특별히 나쁜 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시공을 정신없이 오락가락한 것치고 머리는 개운했다.
“그럼, 뭘 봤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혹시 오레스를 깨울 수 있을 만한 계기를 찾았는지?”
일단 제이든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한 칼리스타가 수조 속의 오레스와 제이든을 번갈아 보면서 간절하게 물었다.
제이든은 포이를 소파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서 수조 가까이 갔다.
다리에 힘이 없어 휘청거리자 칼리스타가 얼른 부축했고 아실리도 깜짝 놀라 야옹 울면서 그의 다리 옆에 달라붙었다.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나! 좀 더 쉬었다 일어나야지.
“괜찮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아실리의 머리를 만져 준 뒤 수조 속을 들여다보았다.
물속에 몸을 늘어뜨린 채 떠 있는 오레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오레스 씨는 깨어나지 않았나요? 함께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데, 그릇의 환각 속에서 우리 오레스를 만났나?”
“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나무 그릇의 환각이 아니라 오레스 씨의 꿈속에 들어갔었습니다. 포이 덕분에요.”
제이든이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면서 오레스의 꿈속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아실리가 냐아앙 소리를 내며 뒷발로 일어서서 수조를 앞발로 짚었다.
-제이든, 저것 봐! 손가락!
아실리는 물속에 축 늘어뜨린 오레스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진짜 물은 아니지만 물처럼 보이는 용액 속에 부드럽게 퍼진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몸과 손, 오레스는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실리가 잘못 본 거 아닐까? 물의 일렁거림 때문에?
“아!”
그때 오레스의 손가락 끝이 아주 약하게 움직였다.
“칼리스타 님, 저것 보세요. 저기, 오른손 둘째 손가락!”
칼리스타가 눈에서 광선이라도 뿜을 기세로 수조 벽에 달라붙더니 제이든을 휙 돌아봤다.
“내가,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방금 오레스의 손가락이 움직였는데.”
“맞습니다. 저도 봤어요.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 아!”
손가락 하나가 더 움직였고 루터 박사가 문을 걷어차고 뛰어 들어왔다.
“생체 신호가! 칼리스타 님, 오레스 씨의 생체 신호의 변화가 모니터에!”
그의 뒤를 따라 흰 가운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더 달려들어 왔다.
그들은 수조 옆의 마법 기구에 달라붙어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수조 속 오레스의 몸이 아주 느리게, 천천히 회전하더니 누운 자세에서 일어선 자세로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꿈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 제이든의 앞에 있자 신기한 기분이었다.
“제가 환각 속에서 본 얼굴은 8년 전의 모습일 텐데, 조금도 변하지 않았네요.”
“이 수조 속에서는 신체나이를 거의 먹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입원시킨 거기도 하고.”
칼리스타는 의사와 치유사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선 채 초조하게 오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굴 표정이나 말투는 침착했지만 양손을 꽉 모아쥔 채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걸 보니 몹시 긴장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눈, 눈꺼풀이 움직여요!”
누군가 말하는 바람에 제이든과 칼리스타가 오레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는 게 보였다.
눈이 열릴 듯 말 듯 흔들리면서 속눈썹이 움직였지만 열리지는 않았다.
“오레스! 오레스! 눈 좀 떠보렴!”
참지 못한 칼리스타가 수조에 다가가며 외쳤고 마치 응답하듯 오레스가 눈을 떴다.
옅은 녹색의 물속에서 개암나무 열매를 닮은 밤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칼리스타와 제이든을 바라봤다.
“자, 이제 잠시 나가 계세요. 준비가 되면 부르겠습니다.”
루터 박사의 말에 따라 흰 가운을 입은 사람 한 명이 제이든과 칼리스타를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칼리스타 님, 얼굴이 창백하세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드시고 마음 좀 가라앉히세요.”
직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칼리스타는 얼굴이 파래졌다가 빨개졌다가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요. 칼리스타 님, 차 드시는 동안 제가 환각에서 본 내용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이든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칼리스타를 보았다.
겉보기는 오십 대 후반이나 육십 대 초반처럼 보여도 그녀의 실제 나이는 칠십이 넘었다.
그 나이에 제자를 깨워 보겠다고 8년 동안 대륙 곳곳을 헤매다닌 스승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레스를 운디니움에 입원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8년간의 비용도 어마어마할 테고.
그만큼 애착을 가진 제자가 이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순간이니 아무리 침착하고 대범한 성품이어도 흥분하고 긴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나 같으면 심장마비가 왔을지도.’
제이든 자신도 신경줄이 그리 얇은 편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을 칼리스타처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제이든이 오레스의 꿈속에서 본 환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다 풀어놓은 후에야 루터 박사가 문을 빼꼼 열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오레스는 깨어났나?”
칼리스타가 벌떡 일어서면서 물었다.
“예.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의식도 완전히 회복했고 신체 상태도 좋습니다.”
“그럼 면회가 가능할까?”
“예. 스승님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합니다.”
루터 박사는 칼리스타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이고 제이든을 향했다.
“스승님을 먼저 뵙고 나서 제이든 씨도 보겠답니다. 그리고…….”
루터 박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포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해가 잘 안 가는 말도 하던데, 아직 환각의 영향이 남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토끼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던데요.”
“포잉!”
포이가 배시시 웃었고 아실리가 대견하다는 듯 포이의 머리를 핥아 주었다.
* * *
오레스와 면회를 끝내고 나온 칼리스타의 눈이 붉었지만 얼굴에는 편안한 만족감이 가득했다.
“이제 들어가 보게. 자네와 토끼를 보고 싶어 하네.”
오레스는 그새 수조가 아니고 침대가 놓인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몸에는 여전히 여러 개의 선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베개를 베고 침대에 누운 것을 보니 그가 확실히 깨어나서 이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오레스의 눈도 불그레해진 것이 칼리스타와 면회하는 동안 운 것이 분명했다.
“좀 괜찮으십니까?”
제이든이 묻자 오레스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오래 잠자고 있어서인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차차 나아지겠죠. 정신은 명료합니다.”
“다행입니다. 스승님이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예. 빨리 일어나서 스승님의 은혜를 갚아야죠. 제이든 씨, 그리고 토끼…….”
“포이라고 합니다.”
“포잇!”
“그래, 포이, 포이에게 너무 큰 신세를 졌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큰 경험을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포에니 토끼를 실제로 본 데다가 그 행운의 조각을 나눠 받는 운까지 누리다니!”
“칼리스타 님의 정성 때문에 인연이 닿았나 봅니다. 얼른 쾌차하세요.”
“예. 제이든 씨, 이후에 언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세요. 어떤 일이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별말씀을요. 어서 회복되어 일어나시기나 하세요.”
제이든이 웃자 오레스도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 * *
“우리 포이가 이번에 정말 큰일 했다!”
제이든이 호수 위로 썰매를 몰면서 말하자 꼬박꼬박 졸고 있던 포이가 까만 귀를 쫑긋거리면서 눈웃음을 쳤다.
그들은 칼리스타의 썰매를 그대로 물려받아 원래의 목적지였던 레타논으로 가는 중이었다.
육로로 가면 길이 멀지만 호수를 북쪽으로 가로질러 가면 훨씬 더 빨리 레타논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 겨울이라 호수가 얼어 있으니 썰매로 가로지르기도 좋았다.
썰매를 끄는 말은 은가루를 뿌린 듯한 호수 위를 씩씩하게 달렸다.
이쪽 지방에서는 겨울에 썰매 끄는 말에게 겨울신이라고 부르는 겨울용 편자를 따로 신긴다고 한다.
그걸 신고 있는 덕분인지 말이 눈길은 물론 얼음판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잘 달렸다.
스노우체인을 두른 자동차 같다고 생각하면서 제이든은 포이를 돌아보았다.
“우리 포이 괜찮아?”
다른 때 같았으면 썰매 가장자리에 발돋움을 하고 서서 바깥 풍경을 보며 깡충거릴 포이가 아실리가 덮은 담요 안에 같이 몸을 묻은 채 머리를 꼬박거리며 졸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졸려서 그러는 거야. 아침에 일찍 일어났잖아.
졸고 있는 포이 대신 아실리가 대답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거야? 더 쉬었다가 내일쯤 출발할 걸 그랬나?”
제이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레스의 환각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에너지를 꽤 소비하는 일이었던지 포이는 그날 온종일 졸려 하고 힘이 없었다.
제이든 자신도 온종일 몸에 힘이 없어서 하룻밤 푹 자고 난 다음 날에야 기력이 돌아왔었다.
이틀 쉬고 나서 포이가 여느 때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걸 보고 나서야 출발한 건데 좀 더 쉬어야 했을까?
-아니야, 출발 전에 물고기들이랑 논다고 한참이나 뛰고 놀아서 그래.
아실리가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담요 밑에 묻었다.
-제이든이 칼리스타 님이랑 오레스 씨랑 인사하고 떠날 준비 하고 하는 동안 포이가 어찌나 뛰어다니던지. 나도 졸린데 난 걱정 안 돼?
“너는 고양이니까 원래 많이 자잖아…….”
아실리가 초록색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면서 제이든을 흘겨보는 바람에 그는 얼른 말을 주워 담았다.
“아휴, 우리 아실리, 포이 보느라고 고생했어. 얼른 좀 자, 춥겠다. 담요 잘 덮고 난로도 담요 안에 잘 넣고. 내가 덜컹거리지 않게 말 잘 몰게.”
출발 전 루터 박사와 칼리스타는 운디니움의 특별한 방을 포이와 아실리에게 보여주었다.
“칼리스타 님이 오레스 씨를 생각해서 우리 운디니움에 투자를 많이 하셨거든요. 아마 감정사로 벌어들인 돈 거의 다 여기 넣지 않으셨나 싶어요.”
“여긴 말이지, 아주 특별한 방인데요, 원래는 오레스 씨의 치료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신체를 동결 상태에 가깝게 보존하기 위해선 그 수조가 더 나아서 이쪽 방은 지금은 비어 있답니다.”
“와아!”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이든도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포이는 온몸의 털을 부풀리면서 팔짝팔짝 뛰었다.
완전히 둥근 모양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우주에 들어온 것처럼 몸이 떠올랐다.
천장부터 벽이 모두 투명해서 바깥의 물고기와 수초 등이 그대로 보였다. 마치 물고기들 사이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이 방도 사람의 신체를 최상의 건강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어졌어요. 병실로도 쓸 수 있지만 이 방은 포탈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 중입니다.”
루터 박사가 제이든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운디니움의 위치를 알고 여기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지만, 포탈이 완성되면 제이든 씨에게는 좌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제이든 감정사님과…….”
그는 투명한 벽 주위를 헤엄치듯 떠다니며 물고기들에게 손짓을 하는 포이를 보며 웃었다.
물고기들도 포이가 신기한지 우르르 무리를 지어 포이를 따라 헤엄치고 있었다.
“고양이와 토끼 친구는 언제든 운디니움의 귀한 손님으로 환영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포이가 도대체 그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다.
할 수 없이 아실리에게 포이를 맡겨 그 방에 남겨놓고 제이든이 칼리스타와 아침을 먹고 오레스와도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에야 포이를 그 방에서 꺼내올 수 있었다.
공중을 헤엄치며 물고기들과 노느라 피곤했나 보네.
잠든 아실리와 포이를 뒤로한 채 제이든은 은빛 호수 위를 달렸다.
한참 달려가자 좌측 멀리 호수의 중심부 쪽으로 거북이 모양의 작은 섬이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