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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98화 (98/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8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8)

포이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제이든에게 앞발을 내밀었다.

“안아 달라고?”

포이를 안아 올리자 포이는 제이든의 어깨를 잡고 기어 올라와서 토실토실한 앞발로 제이든의 눈을 가렸다.

“응? 왜 눈을 가려?”

“포잉.”

조용히 하라는 듯 포잉 소리를 내며 포이가 앞발로 제이든의 눈을 꾹 누르더니 이마를 그의 머리에 갖다 대고 콩 부딪쳤다.

포이와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은 제이든의 시야에 유리창을 사이에 둔 풍경처럼 반쯤 투명한 화면이 떠올랐다.

마을에 하나 있는 작은 성당의 크로노 사제, 데얀 선생, 마을 아낙네 몇 명이 애나 할머니의 작은 집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오후의 모습이네. 이미 오레스 씨와 함께 봤는데?’

오레스의 꿈속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부터 장례를 치를 때까지를 다 봤는데.

그래도 포이가 다시 보여주는 걸 보면 뭔가 놓친 게 있겠거니 싶어 제이든은 지나가는 영상을 집중해서 보았다.

보고 있자니 오레스와 함께 보았던 것과 같은 장면이지만 미묘하게 시각이 낮다.

지난번에 본 것은 오레스의 눈을 통해 본 거고, 이번에 보는 것은 포이의 시각인 모양이었다.

“에롤에게는 연락을 했나요?”

사제가 물었다.

“예. 빌 씨가 세로타운 우편국으로 갔습니다. 제일 빠른 매 편으로 아카데미에 긴급 서신을 보내기로 했어요.”

“에롤 다니는 아카데미에서 여기까지 오는 거 못 기다리지 않아요? 에롤 방학 때 물어보니 오는 데만 일주일 걸린다던데.”

머리에 수건을 쓴 부인이 묻자 사제가 대답했다.

“학생이 가족의 상을 당한 경우에는 아카데미나 가까운 시청에서 공간이동 포탈을 쓰게 해줍니다.”

데얀 선생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공용 포탈이 로즈버드 시 중앙역에 있으니까 거기까지 오는 데는 한나절이면 될 겁니다. 중간에 한두 번 환승해야겠지만.”

“로즈버드 시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말을 타야겠지요. 이틀 길이니까 에롤이 연락받고 바로 출발하면 사흘이면 올 겁니다.”

“날이 덥지 않아 다행이에요. 애나 할머니……, 괜찮겠지요?”

“에롤이 올 때까지는 성당 지하실에 모실 건데 지하실 온도가 낮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부인이 할머니의 시신 걱정을 하는 걸 눈치챈 사제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고생 안 하시고 잠자다 편히 가셨으니 호상이에요. 할머니가 복이 있으시네요. 에롤도 잘 됐고. 아카데미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면서요?”

“그러니까요. 졸업만 하면 데려가려고 벌써 눈독 들이는 곳들이 있다던데.”

“저번에도 할머니가 이제 여한이 없다고 그러시더니 마음 편히 가셨을 거예요.”

시신을 모시고 나간 후 뒷정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말을 듣던 나이 지긋한 뽀글머리의 여자 한 명이 입을 삐죽였다.

“복이 있긴, 남편 자식 다 앞세우고 혼자서 손자 하나 키웠는데. 그 녀석 잘 됐다고 할머니한테 뭐 남는 게 있나? 이제 에롤이 돈 벌어서 들인 공만큼 호강을 좀 해야 복이 있는 거지. 이제 고생한 값 좀 돌려받으려는데 덜컥 가버렸는데 무슨 여한이 없겠어?”

이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없는 살림에 일찌감치 일이나 가르치지 부모도 없는 애를 뭣 하러 아카데미까지 보내느냐고 빈정거리곤 하던 여자였다.

“아이고 또 그러네, 행여라도 나중에 에롤 듣는 데서 그딴 소리 하지도 말아요. 애 가슴에 못 박지 말고.”

“그러니까요. 할머니도 돌아가신 마당에 또 무슨 샘이 나서 말본새가 그래요?”

“샘은 무슨 샘, 내가 무슨 샘을 낸다고! 이깟 집에 샘을 낼 게 뭐가 있어!”

다른 여자들에게 핀잔을 받은 뽀글머리 여자는 버럭 화를 내면서 주방 쪽으로 가버렸다.

“전염병 때 남편 잃은 건 같은데 저 집 자식들은 엄마 건사를 안 하고 도시에 나가버렸잖아. 먹고살기 힘들다고 연락도 아주 뜸하고. 그래서 샘이 나서 그러는 거니까 눈감아줘.”

“지도 애나 할머니처럼 지극정성으로 애들 보살폈어 봐. 애들한테 잔소리만 하고 맨날 다른 집 자식들하고 비교하니까 애들도 넌덜머리 나서 그랬겠지.”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간 뽀글머리 여자를 쫓아가더니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니 장은 왜 열어봐요? 할머니 누우셨던 이부자리랑 상할 거 같은 식료품만 정리하고 다 그대로 둘 거니까 그냥 나와요. 에롤이 와서 정리할 때까지 그대로 둘 거예요.”

이 장면은 오레스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이전의 환각에서는 오레스는 계속 할머니의 시신을 따라갔다.

오레스의 환각을 함께 보고 있던 제이든도 그와 같은 것을 보고 있었기에 주방 쪽은 보지 못했는데 포이가 주방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내가 뭐 손댈까 봐 그래? 이 집이나 우리 집이나 살림이 거기서 거긴데 뭐 가져갈 만한 게 있다고!”

뽀글머리의 여자가 투덜거리며 수건을 쓴 여자의 뒤를 따라 나오다가 벽난로 앞에 놓인 나무 그릇에 눈길이 멎었다.

“아니 손자가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 솜씨는 안 닮은 모양이지? 어째 이렇게 솜씨가 없대? 찻잔도 아니고 식기도 아니고.”

언젠가 애나 할머니의 집을 방문했다가 에롤이 만들어줬다는 그릇을 보고 헛웃음을 치자 애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었다.

“그래도 애가 내 생각을 해서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면서 만들어 준 거야. 제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나한테 사줬던 명품 그릇이랑 비슷하게 만든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한테는 보물이야 보물.”

“…….”

“나 죽을 때 같이 가지고 갈 거야. 관에 넣어 달라고 해야지.”

애나 할머니는 포근하게 웃었지만 뽀글머리의 여자는 입을 삐죽였다.

전염병이 돌 때 자신도 남편을 잃고 아들을 혼자 키웠는데, 제 아들은 에롤처럼 모친을 끔찍이 여기기는커녕 말만 걸어도 이마에 주름부터 잡았다.

에롤은 나이도 어린데 저렇게 정성 들여 할머니 줄 선물을 만들다니. 공부도 잘해서 아카데미를 장학금으로 가고!

애나 할머니는 무슨 복으로 저런 손자를 뒀을까. 세상이 참 불공평하네!

“자, 이제 나갑시다. 애나 할머니는 성당 지하실에 잘 모셨으니 이 집은 에롤이 올 때까지 잠가 놓도록 하죠.”

데얀 선생이 문가에서 말하자 일 도와주러 왔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기 시작했다.

뽀글머리의 여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벽난로 앞의 그릇을 집어 들어 벽난로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던져넣었다.

“아니 저게 무슨 심술이야!”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뽀글머리의 여자까지 밖으로 나가고 데얀 선생이 문을 닫자 할머니의 집은 조용한 정적에 잠겼다.

* * *

“포잇?”

잘 봤냐고 묻는 듯한 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은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포이가 아직도 앞발로 눈을 덮고 있어서였다.

“다 봤어. 포이야. 이제 눈 좀 뜨자.”

“피잉?”

포이가 조심스럽게 제이든의 눈두덩을 덮고 있던 앞발을 떼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한참 감고 있던 눈에 빛이 들어오는 바람에 제이든은 잠시 눈을 떴다 감았다 한 뒤에야 포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잘했어, 우리 포이. 덕분에 꼭 봐야 할 것을 볼 수 있었네.”

“포잇!”

제이든이 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포이는 기분 좋게 포잇포잇 울면서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다 펴도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지만.

“오레스 씨, 에롤의 수프 그릇이 어디 있는지 알았어요.”

제이든이 오레스를 보며 말하자 오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 토끼가 보여준 건가요?”

“맞아요.”

“놀랍네요. 설마 했는데 역시 포에니 토끼인 건가요?”

오레스의 환각 속이라 그런지 포이는 오레스에게 원래의 모습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예. 우리가 할머니의 시신만 지켜보는 동안 포이가 그릇을 본 것 같아요.”

“어디에?”

“할머니 집의 벽난로에 있어요.”

제이든의 말을 들은 오레스가 그의 팔에 손을 대자 오레스와 제이든의 의식이 애나 할머니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 뽀글머리 아줌마가……, 그렇군요, 그 사람이라면 그럴 만도 해요. 항상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샘내고 했으니까. 특히 에롤처럼 착한 아이를 둔 사람을 질시했지요.”

오레스는 벽난로 앞에 엎드려 타고 남은 장작과 재 뒤쪽으로 손을 넣었다.

실체가 없는 몸이라 손이 그대로 장작을 뚫고 뒤쪽으로 쑥 들어갔다.

저렇다면 그릇을 찾아도 만질 수 없는 게 아닌가?

제이든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오레스가 잿더미 속에서 손을 꺼냈다.

그 손에 에롤의 나무 그릇이 잡혀 있었다.

“어떻게 그릇을 잡을 수 있는 건가요?”

제이든이 놀라서 묻자 오레스가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도 모르지만 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잡아 보니까 그릇의 혼이라고나 할까? 그게 잡히네요.”

“그릇의 혼이요?”

“음, 그러니까 진짜 그릇은 지금도 그대로 벽난로 속에 있어요. 제가 잡은 것은 그릇의 혼, 그릇의 본질이에요. 우리 몸이 지금 여기 있지 않고 시공이 다른 바깥세상에 있고 우리의 의식만 여기 있는 것처럼.”

“…….”

“아마 제가 애나 할머니의 영혼에게 그릇을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제가 그릇의 혼을 잡을 수 있는 것 같네요.”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오레스가 잡고 있는 그릇을 만져 보았지만 그의 손은 그릇을 통과할 뿐이었다.

“저는 만질 수 없는 걸 보니 이 그릇의 혼을 만질 수 있는 건 오레스 씨뿐인가 보네요.”

제이든에게 안겨 있던 포이가 앞발을 내밀어 그릇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포이의 작은 앞발이 그릇을 살짝 통과하자 포이는 얼른 앞발을 끌어당겨서 품에 감췄다.

오레스가 웃으면서 제이든에게 말했다.

“자, 그럼 애나 할머니께 그릇을 갖다 드리러 가 볼까요.”

그가 다시 제이든의 팔을 만지자 그들은 다시 이동했다.

마을 성당 뒤쪽의 작은 묘지였다.

묘지라 해도 어두운 분위기가 없고 소박하지만 예쁘고 깔끔하게 가꾸어진 게 작은 시골 공원처럼 보였다.

“성당에서 공들여 관리해주시거든요.”

오레스는 제이든에게 애나 할머니의 묘를 보여주었다.

조그만 봉분 앞에 조그만 석비가 서 있고 애나 할머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 똑같은 석비가 있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다.

“에롤 할아버지의 묘예요. 뒤쪽은 부모님의 무덤이고.”

옹기종기 가족이 모여 앉듯이 모여 있는 작은 무덤들 앞에 자그마한 장미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꽃은 없고 장미 특유의 동그랗고 가장자리가 까칠까칠한 잎새가 몇 잎 달려 있었다.

“에롤이 심었어요. 지금은 피지 않았지만, 여름이 되면 푸른 장미가 핍니다. 희귀한 꽃인데 에롤이 아카데미의 스승에게 부탁해서 구해 왔대요.”

오레스는 옹기종기 가족이 모여 앉듯이 모여 있는 작은 무덤들을 향해 인사하듯 머리를 숙였다.

“이제 생각이 나는데, 제이든 씨가 이 꿈속에 들어오기 전에, 저 혼자 여기 몇 번 왔었던 것 같아요. 이 꿈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그릇을 찾으려고 애써 보기도 하고, 여기도 와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는 애나 할머니의 무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손에 잡고 있던 그릇, 엄밀히 말하면 그릇의 혼을 비석 앞에 놓았다.

“애나 할머니, 드디어 에롤의 그릇을 찾았습니다. 행운의 토끼와 함께 바깥세상에서 오신 손님이 도와주셨어요. 약속을 지킬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가 말을 끝내자 나무 그릇이 마치 봉분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오레스는 사라지는 그릇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도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었어요. 할머니가 몇 년 키워주셨죠. 그때는 어리고 철이 없어서 할머니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절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셨는지 잘 몰랐어요. 돌아가시고 나서야 할머니가 제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답니다. 그래서 애나 할머니의 소원을 더 이루어드리고 싶었어요.”

그릇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묘 앞의 작은 장미 나무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이든이 보는 앞에서 조그만 장미 나무의 잎새가 서서히 몇 잎 더 돋아나더니 자그마한 하늘색의 꽃봉오리가 가지 끝에 맺히고 조금씩 색이 짙어지다가 새파란 장미꽃이 활짝 웃음 짓듯이 꽃송이를 피웠다.

“어?”

다음 순간 꽃은 사라지고 원래대로 잎새 몇 개가 달린 장미 나무가 그들 앞에 있을 뿐이었다.

“오레스 씨, 방금 푸른 장미가 피지 않았나요?”

“예. 저도 봤어요. 환상이겠지만……, 아마도 애나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였나 봅니다.”

이제 그만 가보라는 듯 장미 나무의 잎새가 손을 흔드는 것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포잇!”

포이가 제이든의 목에 앞발을 감았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포잇!”

주변이 안개 낀 것처럼 흐려지기 시작하자 제이든은 얼른 오레스의 손을 잡았다.

주변의 사물이 사라지고 안개가 짙어졌다.

어쩐지 안개가 개지 않고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포이가 조금 당황하는 것처럼 머리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니 포이?”

“포이이…….”

울상이 된 포이가 제이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혹시 길을 잃은 거야?”

환각 속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못 찾는 건가?

포이가 제이든의 품에서 머리를 빼고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는데 멀리 어디선가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야아옹…….”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포이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힘차게 울고는 다시 제이든의 목을 끌어안았다.

“포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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