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97화 (9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7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7)

장면이 바뀌었다.

양쪽에 침대가 놓여 있고 똑같은 옷장과 책장, 책상이 하나씩 있는 자그마한 방.

학원의 기숙사처럼 보이는 방의 창가에 아까보다 한두 살 더 먹어 보이는 에롤이 걸터앉아 있었다.

소년은 뭔가를 열심히 깎고 있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종이 위에 나무 부스러기가 사각사각 쌓였다.

“에롤!”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그를 불렀다.

“그거 또 만드는 거야?”

“응.”

“어디 보자. 흐음, 이게 뭐야? 그릇이야? 물그릇인가? 찻잔으로 쓰기엔 큰데.”

“으응.”

건성으로 대답하는 에롤의 옆에 와서 들여다보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암만 봐도 넌 손재주가 없어. 수학은 그렇게 잘하고 계산도 빠르고 글씨도 잘 쓰는데 손이 이렇게 무딘 거 보면 신이 공평하시네. 이게 뭐냐? 그릇도 아니고 찻잔도 아니고.”

“수프 그릇이야.”

“아아.”

소년은 그제서야 조금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말을 듣고 보니까 수프 그릇 비슷하기도 하네. 지난번에 깎은 것보다는 낫다. 그때는 국자인지 주발인지도 모르겠더니.”

“그래? 좀 나아졌어?”

에롤이 반색을 하며 소년의 얼굴을 쳐다봤다.

“으응. 뭔지는 알아볼 수 있겠다는 거지 잘 깎았다고는 말 못 해.”

“그래도 나아졌다는 거잖아. 하나 더 만들어 보면 더 잘 만들 수 있을 거야.”

“아니, 네 솜씨로 괜찮은 그릇이 나오길 기다리느니 하나 사는 게 낫겠는데. 그건 왜 자꾸 깎는 거야? 손도 다치고 그러면서.”

소년이 에롤의 손을 잡아당기자 에롤은 손가락과 손바닥에 남은 상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괜찮아, 안 아파.”

“안 아프긴, 저번에 피도 막 나고 그랬으면서.”

“에헷.”

“웃기는.”

에롤과 방을 함께 쓰는 소년 아이작은 자기 책상 쪽으로 가더니 현대의 반창고처럼 생긴 얇고 가는 붕대를 가져왔다.

“손가락에 물집 잡혔네. 이거 조금 감고 해.”

“고마워, 아이작 형.”

아이작은 에롤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 주면서 말했다.

“페리스 선생님이 보시면 뭐라 하시겠다. 아카데미 입학시험 얼마 안 남았는데 또 딴짓하다가 손 다쳤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는걸.”

“그래, 그래, 일등인 거 알아요. 우리 학원에서 아카데미 조기 입학자 나올 거라고 다들 기대한다더라.”

붕대를 다 감은 아이작은 에롤의 머리를 헝클면서 물었다.

“근데 너 조각에 소질도 없는 애가 그건 왜 깎는 거야?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대답도 안 해 주고.”

“으응.”

에롤은 머리를 긁다가 말했다.

“우리 할머니 드리려고 만드는 거야.”

“할머니?”

“응, 전에는 내가 너무 못 만드니까 말하기 싫었는데, 자꾸 만들어 보니까 좀 잘하게 된 거 같지?”

에롤은 그릇인지 찻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나무토막을 들어 보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할머니한테 선물했던 수프 그릇이 있거든. 아주아주 예쁘고 비싼 건데 할머니의 평생 보물이었어. 근데 할머니가 나 이 학원 보내고 아카데미 준비시켜 주느라고 그 그릇을 팔았단 말이야.”

에롤은 머리를 숙인 채 나무토막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내가 알았으면 못 팔게 했을 건데, 나도 모르게 팔아 버리셨단 말이야. 내가 아카데미 가서 수학 공부하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네가 하나 만들어 드리려고 하는 거야?”

“응. 정말은 똑같은 걸 다시 사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못 사잖아. 이담에 내가 커서 돈 벌게 되면 꼭 사드릴 거야. 그치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에롤은 고개를 들고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그릇으로 바꿔 드릴 때까지 갖고 계시게 하나 만들어 드리려고.”

아이작은 에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픽 웃었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국자든 주발이든 할머니가 기뻐하시겠지. 손자가 만든 건데. 그치만 그거 만들다가 손 다치면 할머니가 더 슬퍼하신다. 조심해.”

“응!”

에롤이 또 생긋 웃자 아이작은 못 말린다는 듯 에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함께 웃었다.

* * *

에롤이 14살의 나이로 아카데미에 합격하고 전액 장학금까지 받게 되자 애나 할머니는 물론 데얀 선생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도 다들 기뻐했다.

“이 마을에서 아카데미 학생이 나온 것도 처음인데 장학금이라니, 진짜 손자 잘 뒀소. 애나 할머니.”

“이제 고생 끝이구려. 손자가 졸업하고 나면 돈 벌어서 할머니 잘 모실 거 아니우.”

“유명한 학자가 될 수도 있다면서? 황궁 같은 데서 일할 수도 있고.”

“할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키우시더니 보람이 있겠소. 고생 많으셨소.”

대부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응원해 줬지만 어디든 그렇듯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부모도 없는 애를 기술이나 가르치지 아카데미는 무슨, 괜히 헛바람이나 들지.”

“돈도 없고 뒷배도 없는데 일이나 가르쳤으면 금방 제 밥벌이는 할 건데 공부를 시킨다니 언제 돈 벌겠어? 애가 돈 벌기 전에 할머니가 늙어 죽겠네.”

“어허 애나 할머니 듣겠네, 그게 무슨 악담이야? 할머니가 뭐 보답 받자고 손주 키우나? 에롤이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앤데.”

남이야 뭐라 하든 애나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작은 거실의 벽난로 앞에 앉았다.

곧 봄이 올 테지만 산간의 날씨는 아직 추웠다.

오래전 신혼 때 남편이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들어준 벽난로는 지금도 따뜻했고 아들이 만들어준 흔들의자는 여전히 편안했다.

“베르토, 우리 에롤이 손재주는 당신을 닮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당신을 닮았어요.”

애나 할머니는 품속에 안고 있던 나무 그릇을 보여주듯 벽난로의 따뜻한 불빛 앞에 비춰 보였다.

서툴게 깎은 나무 그릇은 크기가 어중간해서 찻잔인지 그릇인지 아리송했지만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것을 보면 수프 그릇이었다. 손잡이의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르기는 했지만.

그릇에는 어설픈 솜씨로 푸른 장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이거 보렴, 에드, 레니, 너희들이 남긴 아들이 만든 거란다. 공부하느라 바쁜 애가 이런 걸 만들어서 내게 주고 갔구나. 제가 아카데미 가 있을 동안 내가 외로울까 봐.”

할머니는 그릇에 그려진 장미 무늬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웃었다.

“이거 봐요. 베르토. 좋은 안료를 구할 돈은 없었겠지만 나무는 괜찮은 걸 구했네. 채색한 건 곧 지워지겠지만 그릇은 쉽게 상하지 않겠어.”

그녀는 다시 그릇을 무릎에 끌어안고는 벽난로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향해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베르토? 내 평생 가장 고맙고 기뻤던 선물은 당신이 사준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그릇이었는데요.”

할머니는 소녀처럼 얼굴을 살짝 붉혔다.

“에롤이 만든 이 그릇을 받았을 때 어쩌면 조금, 아주 조금 더 기뻤던 것 같기도 해요.”

그녀는 손자가 이 그릇을 자기에게 안겨줄 때 손가락에 상처가 가득했던 것을 생각했다.

에롤은 사과 같은 뺨을 볼록하게 만들면서 말했다.

“할머니, 이거요. 정말 못 만들었지만요. 할머니의 보물이었던 그릇만큼 예쁘진 않지만요. 나중에 커서 제가 그 그릇을 다시 사드릴 때까지 그 대신으로 드리는 거예요. 방학 때 올 때까지 이걸로 차도 드시고 수프도 드시고 잘 챙겨 드세요. 꼭이요.”

대신이라니. 애나 할머니는 그릇을 좀 더 꼭 껴안았다.

이건 대신 같은 게 아니야. 에롤이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보물인데.

로얄 테이센의 그릇을 팔아 버린 후 계속 마음 한구석 허전했던 자리가 따뜻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에롤은 걱정 없어요. 마음 편히 당신 곁으로, 에드와 레나 곁으로 가도 되겠어요. 내가 갈 때 이 그릇도 가져가서 보여 드릴 테니 손자 솜씨 같이 구경해요.”

* * *

2년 후, 애나 할머니는 에롤이 졸업하기 전에 눈을 감았다.

조금씩 약해지다가 특별히 고생도 하지 않고 잠자는 중에 그대로 떠나서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데얀 선생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례를 준비했고 뒤늦게 연락을 받고 와서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에롤도 달래 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할머니가 네 소식 들을 때마다 정말 행복해하셨다. 이제 에롤은 걱정 없다고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내가 커서, 할머니, 호강시켜 드린다고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했는데.”

“괜찮다. 에롤, 네 할머니는 너 같은 손자가 있어서 기쁘셨을 거야.”

“그럼, 그럼, 네가 이렇게 슬퍼하다 병 나면 할머니가 편히 못 가신다.”

장례가 끝나고 에롤은 할머니의 집을 그대로 둔 채 아카데미로 떠났다.

집이나 물건을 팔고 정리하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에롤은 할머니와의 추억을 그대로 두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 마음이 안정되면 그때 와서 정리할게요. 지금은 할머니와 살던 그대로 두고 싶어요.”

에롤이 떠나고 며칠 후, 할머니의 빈집, 불 꺼진 벽난로 앞에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형체가 분명치 않은 그림자는 천천히 집안을 떠다녔다.

‘어디 갔지? 어디 갔을까?’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그림자와 함께 들릴 듯 말 듯 집안을 떠돌았다.

‘그걸 두고 갈 순 없는데.’

흐릿한 그림자는 한쪽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오레스를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젊은이, 혹시 그걸 봤수?’

오레스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그릇을 찾고 계시는 거죠?”

‘그렇다우, 내 손자가 만들어준 그릇이지. 그걸 두고 갈 순 없는데.’

오레스가 할머니의 영체에 다가가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제가 찾아서 할머니 묘에 가져다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떠나세요.”

아지랑이처럼 떠다니던 할머니의 영체는 오레스를 빤히 보더니 미소 짓는 것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젊은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랴? 이 시간의 사람도 아니고.’

“예…….”

‘그럼, 내 젊은이만 믿고 가겠소.’

할머니의 그림자가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오레스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고 제이든도 홀린 듯이 따라 들어갔다.

“포잇!”

날카로운 목소리에 제이든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품에 안겨 있던 포이가 까만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제이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레스는 여전히 몰입한 채 뭔가를 찾고 있었다.

“오레스 씨, 오레스 씨!”

“예?”

오레스가 제이든을 돌아본 다음 순간, 주변이 흐려지더니 제이든과 오레스는 다시 또 마을 어귀의 나무 밑에 서 있었다.

“오레스 씨?”

제이든이 부르자 오레스가 그를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저 애 이름은 에롤이에요. 지금 일 나간 할머니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어요.”

“오레스 씨!”

“포이잇!”

제이든과 포이의 목소리를 들은 오레스가 머리를 흔들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아, 제이든 씨.”

그는 힘없이 웃었다.

“또 여기네요.”

* * *

“오레스 씨는 할머니가 안타까운 나머지 약속에 묶인 것 같은데요.”

“예. 그런 것 같아요. 그 그릇을 꼭 찾아서 할머니의 묘에 가져다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제가 이 꿈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릇은 바깥세상에 있으니까 일단 꿈에서 깨어나면 그릇을 할머니의 묘에 가져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아니…….”

오레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 시간, 이 꿈속에서 제가 그릇을 찾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상한 게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그릇을 옆에 두고 계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신 후엔 그 그릇이 없어졌단 말이에요. 제가 이미 찾아봤는데 못 찾아서 계속 이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거든요.”

제이든도 오레스와 함께 그의 꿈을 보았기 때문에 애나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그릇을 갖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포이가 깨우지 않았다면 제이든 역시 꿈에 먹혀서 오레스와 함께 꿈속에서 계속 그릇을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어디에서 빈 곳이 있었을까?

제이든과 오레스가 곰곰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포이가 조그맣게 울었다.

“포오이.”

“포이, 조금만 기다려, 형아 생각 좀 하고.”

“포이잇!”

포이가 답답하다는 듯이 뒷발을 땅에 탕탕 쳤다.

제이든이 포이를 바라봤다.

“포이, 혹시 네가 알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