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6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6)
“이건…….”
애나는 홀린 듯이 그 앞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시리즈가 드물긴 해도 골동품상이나 명품 식기점에 가끔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 그릇들은 분명히 그녀가 아는 그릇이었다.
로얄 테이센의 도자기 식기는 하나하나 수제로 만든다. 게다가 기계처럼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기 때문에 같은 세트의 그릇도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거나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
소녀 시절 매일 보았던 푸른 장미의 그릇, 마님의 허락을 받아 하나하나 직접 깨끗이 닦아 유리장에 넣기도 했던 그 그릇들, 애나는 눈앞의 그릇들이 아무래도 그때의 그 그릇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어, 이 그릇들 말인데요.”
애나가 카운터 쪽을 돌아보자 애나를 주시하고 있던 주인 남자가 설렁설렁 곁으로 다가왔다.
“그건 굉장히 고가의 제품입니다아.”
시큰둥하게 말꼬리를 길게 빼는 걸 보니 애나가 물건값도 모르면서 턱도 없이 고가의 제품에 관심을 둔다 싶은 모양이었다.
애나의 차림새로 보아 이만한 물건을 살 수 없을 거라고 짐작했을 거였다.
“알아요.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시리즈인 거. 이거 아무래도 제가 아는 그릇 같아서 그러는데, 혹시 에레토인 시의 루노 가에서 나온 그릇들 아닌가요?”
애나의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맞습니다. 마지막 소유주가 루노 가였습죠. 빚잔치에 마지막으로 나온 걸 매입했는데……, 어디 보자.”
그는 감정서와 매매 기록서를 뒤적였다.
“그래요. 원래는 리세토 자작 가에서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던 물건인데 19년 전에 소네트 경매에 내놓았고 루노 가에서 구매했군요. 3년 전 루노 가에서 파산 신청을 하고 상인들을 모아 빚잔치를 할 적에 에레토인 시 근교에서 가게를 하던 우리 누님이 매입하셨습니다.”
“아, 역시.”
“저도 어릴 때부터 누님 밑에서 일을 배웠는데 작년에 독립했지요. 이쪽 도시에 가게를 내면서 물건을 나눴습니다.”
주인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애나를 다시 보았다.
“그릇에 흠집이나 특별한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시리즈가 에레토인 시의 루노 가 물건이었다는 걸 알아보시다니,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애나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멀리 시집을 와서 그렇지 처녀 때 그 댁에서 일을 했었거든요. 매일 보던 찻잔과 그릇이라, 너무 눈에 익어서 꼭 그때 그 그릇 같더니 맞는군요.”
“원래는 빚잔치에 안 나올 뻔했던 그릇입니다. 그 댁 마님이 파산 신청 뒤에도 끝까지 안 내놓고 공개 판매에서 빼려고 했던 물건이래요. 꼭 물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다른 식기도 좋은 게 많았지만 마님이 워낙 이 그릇을 좋아하셨어요. 아마 이것만큼은 발레리 아가씨께 물려주고 싶으셨나 보네요.”
애나의 말을 들은 주인이 문서를 다시 보았다.
“아닌데요? 그 댁 마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웠던지 우리 누님이 따로 기록까지 해놓았는데, 마님이 이 그릇을 물려주려고 했던 사람은 발레리 루노가 아니고…….”
주인은 문서를 햇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쳐들고 자세히 보았다.
“애나 베이커입니다.”
애나의 손에서 손가방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인,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십니까?”
깜짝 놀란 주인이 그녀를 부축했고 애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금방 눈물이 차올라왔다.
“마님…….”
* * *
골동품 식기와 주방용품 등을 주로 취급하는 리타 상점의 여주인 리타 세이나는 병색이 짙은 루노 부인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한때는 리타 상점에서 가장 좋은 고객이었던 루노 부인이었는데, 지금은 그녀가 앉아 있는 거실 의자에도, 찻잔을 올려놓은 탁자에도 압류 대상을 의미하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마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리타가 걱정스럽게 묻자 루노 부인은 힘없이 손을 저었다.
“괜찮네. 이제 며칠 후면 남부로 떠날 테니까, 따뜻한 곳에 가면 좀 낫겠지. 이쪽으로 좀 와 보겠나?”
그녀는 리타를 데리고 거실의 유리 장식장 앞으로 갔다.
한때는 값진 식기와 찻잔 등이 진열되어 있던 장식장은 이제 거의 비었고 몇 점 안 되는 그릇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을 뿐이었다.
리타 자신이 판매한 그릇도 있었고 루노 가의 가세가 기운 뒤 도로 사들인 그릇도 있었는데……, 이 빠진 진열장을 보니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서 리타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자네를 부른 건 이 그릇 때문일세.”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군요. 소네트 경매에서 구매하셨던 거지요?”
루노 부인의 장식장에 남아 있는 그릇 중 가치 있는 것은 이제 이것뿐이었다.
웬만한 것은 다 팔아서 급한 불을 껐을 텐데 이건 용케 남기셨네. 워낙 아끼시더니.
루노 부인과 거래한 지 오래된 리타는 그녀가 이 그릇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식장에도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걸 보니 이제 개인적으로 판매할 시기도 지난 듯한데.
“이것만은 팔고 싶지 않아서 정말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도 끝까지 갖고 있었는데 결국 공개 판매에 내놓게 되었네.”
루노 부인은 쓸쓸하게 장식장 문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남편인 루노 씨가 희귀병으로 투병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가산을 다 털어 넣다시피 했지만 결국 루노 씨는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남편 병수발 중에 자신도 병을 얻은 데다가 막대한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루노 부인은 결국 파산 신청을 했다.
루노 가의 남은 자산에는 모두 빨간 딱지가 붙어 이틀 뒤의 공개 판매에서 팔리게 되었다. 판매 금액은 모두 채무 상환에 들어가는 사실상 빚잔치였다.
“자네도 모레 공개 판매에 참여하겠지?”
“예. 송구스럽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송구스러울 게 뭐가 있나. 건실한 상인이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데.”
루노 부인은 리타를 보며 말했다.
“이 그릇은 사실 내가 유산으로 남겨주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네.”
“발레리 아가씨께?”
“아니, 아니야. 발레리보다 이 그릇을 더 아껴줄 사람이 있었는데, 그만 연락이 끊기고 말았네.”
그녀는 리타를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혹시 애나라고, 예전에 발레리의 전속 시녀를 하던 아이를 기억하나? 발레리 유모의 딸로 우리 집에서 나고 자란 아이인데.”
“애나요?”
리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도 했다.
부인이 주문한 그릇이나 찻잔을 가지고 오면 문간에 서서 눈을 반짝이던 소녀가 하나 있었다.
부인이 허물없이 불러서 그릇을 가까이에서 보여주기도 했기에 사용인이라기보다는 친척 조카쯤 되는가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그 애가 그릇을 좋아했는데 특히 이 푸른 장미 시리즈를 정말 좋아했거든. 이 그릇은 그 애한테 물려 주고 싶었는데 시집간 뒤 연락이 끊겼어. 비둘기도 다니지 않는 곳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몇 년간은 연락이 닿았는데 남편이 병에 걸린 후로는 경황이 없어져서 말이지. 우리 집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애 시집갈 때 이걸 혼수로 주는 건데.”
“진짜 아끼셨나 보네요.”
이게 가격이 얼만데 시녀의 혼수로 주실 생각을 하다니.
루노 부인이 사용인들에게 후한 것은 알지만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며 리타는 푸른 장미 그릇을 다시 보았다.
“부탁이 있네. 공개 판매 때 가능하다면 자네가 이 시리즈를 사줄 수 있겠나?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보다는 자네가 사준다면 나도 마음이 놓이겠어.”
“좋은 물건이라 탐내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고맙네.”
부인은 병색 짙은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띤 채 장식장 문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 남부로 떠나면 우연히라도 애나를 다시 보기 어렵겠지? 내가 죽기 전에 그 애를 한번 볼 수 있으면 했는데. 이걸 꼭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리타는 안쓰러운 마음에 부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마님, 애나 양이 그릇을 좋아하니 언젠가 가게에 들를 일이 있을지 모르죠.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제가 꼭 마님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자네도 잘 지내고 가게도 번창하길 빌겠네.”
리타는 이틀 후의 공개 판매에서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시리즈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애나 베이커의 이름과 사연을 간단하게 메모해 매매 기록 뒤에 끼워 두었다.
* * *
애나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도시에 나가서라도 연락을 해볼걸. 사느라 바빠서 연락이 끊긴 게 너무 아쉬웠다.
마님 같은 주인은 없었는데. 친엄마까지는 아니라 해도 웬만한 이모, 고모보다 저를 더 잘 챙겨주던 루노 부인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팠다.
“부인이 그 애나 베이커라니.”
가게 주인이 신기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루노 부인의 유품이라 생각하시고 혹시 구매하시려거든 내 싸게 드립죠. 인연이 닿은 물건이라 싶으니까.”
사고 싶었다. 정말 사고 싶었지만 애나로서는 감히 지출하기 어려운 큰 금액이었다.
그냥 부인의 마음을 확인한 걸로 감사하면서 데리러 온 남편과 함께 가게를 떠났을 뿐이었는데.
“애나.”
며칠 후, 베르토가 그녀에게 푸른 리본이 묶인 상자를 내밀었다.
“결혼할 때, 부잣집 아가씨처럼 자란 당신이 나와 같이하는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됐었어.”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집안의 사용인들 중에는 정작 모시는 주인보다도 더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애나는 사람 좋은 루노 가에서 웬만한 아가씨 못지않게 좋은 대우를 받고 자란 시녀여서 베르토도 내심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지. 결혼할 때 이렇다 할 선물도 해주지 못했고, 처녀 때 당신이 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조촐한 살림이었는데.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
베르토는 그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 주며 미소했다.
“당신에게 루노 가의 사람들이 가족과 같다는 걸 알아. 이 그릇을 당신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루노 마님이 당신에게 꼭 이 그릇을 남겨주고 싶어 하셨다는 것도 들었어. 다 살 순 없었지만 두 개는 살 수 있었어.”
상자 안에는 푸른 장미의 수프 그릇 한 쌍이 들어 있었다.
베르토가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을 거의 다 털어서 산 것이었다.
“남들은 아내에게 목걸이나 반지 등을 선물한다는데, 언젠가 나도 당신에게 그럴듯한 보석을 하나 선물하고 싶어서 몇 년 동안 꾸준히 돈을 모았는데 당신에겐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보다 이 그릇이 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고마워요, 베르토. 정말 고마워요.”
* * *
애나 할머니는 마치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수프 그릇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자애롭고 다정했던 루노 부인, 자매 같았던 발레리 아가씨, 그리고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수십 년간 서로 사랑하며 살아왔던 남편의 얼굴까지, 지나온 날들의 추억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갔다.
남편과 아들 부부가 죽은 뒤 살림이 어려워졌을 때도 이 수프 그릇은 팔지 않았다.
이걸 팔면 훨씬 넉넉하게 살 수 있었지만 이 그릇은 그녀에게 단순한 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랫동안 함께했지만, 이젠 보내줄 때가 됐구나. 에롤을 위한 거니까 남편도 이해해 줄 거야. 너도 이해해 주겠지?’
푸른 장미 무늬의 그릇을 감싼 순금 테두리가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