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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95화 (9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5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5)

제이든과 오레스는 마을 중앙의 우물 옆에서 에롤과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나무로 짓고 흙을 바른 집들이었는데 에롤의 집은 의외로 돌집이었다.

모양 좋게 쌓아 올린 돌 틈을 흙으로 꼼꼼히 메운 집은 아담하고 튼튼해 보였다.

“저 애 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집 짓는 기술자였어요.”

오레스가 제이든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말하더니 제이든의 팔을 당겼다.

다음 순간 그들은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간소한 나무 식탁과 나무 의자가 놓인 작은 거실 옆으로 주방이 이어져 있었다.

빛이 잘 드는 창문과 덧문, 잘 맞물리는 벽이나 문틀, 쓰기 좋게 설치된 화덕이나 연기가 빠지는 굴뚝 등을 볼 때 집이 많이 낡기는 했지만 솜씨 좋은 기술자가 공들여 지었다는 게 눈에 띄었다.

집 뒤편에서 몸을 씻고 온 에롤이 저녁을 먹으며 할머니에게 조잘거렸다.

“케인은 마법 공부를 하고 싶대요. 나중에 대마법사가 될 거래요.”

“그래? 대마법사라니 케인도 대단하네. 우리 강아지는 뭘 공부하고 싶은고?”

“나는 수학이요. 계산이 재미있어요. 풀이만 제대로 하면 정직하게 답이 딱 나오는 것도 좋고.”

에롤의 할머니 애나는 손자가 잘 먹는 수프를 더 떠 주면서 며칠 전 데얀 선생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애나 할머니, 에롤은 정말 똑똑해요. 특히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우리 에롤이 셈을 잘하지요. 생선 가게 지미나 잡화점 엘렌도 에롤이 셈도 빠르고 계산도 잘한다고 놀라던데.”

“네. 에롤은 그냥 곱하기 나누기를 잘하는 정도로 끝내기는 너무 아까운 아입니다. 수학은 그렇게 인기 있는 학문이 아니지만 앞으로 꼭 필요한 학문이에요. 에롤이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도시에 보내서 공부시키면 장래를 기대해 볼 만합니다.”

“이제 열한 살밖에 안 됐는데……. 선생님이 그냥 여기서 가르쳐 주시면 안 되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데얀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읽고 쓰기, 일반교양과 역사, 기초 수학을 가르칠 수 있지만 에롤은 좀 더 전문적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은 선생님을 아니까 할머니께서 허락해 주시면 추천서를 써드리겠습니다.”

“…….”

“내년에 열두 살이 되니까 그때 도시로 보내서 3년 정도 공부를 시킨 후 15살 때 아카데미에 보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롤이 3년간 열심히 공부하면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카데미에 우수한 학생들이 솔찬히 많을 텐데 우리 에롤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애나 할머니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원래 이 마을 출신이 아니고 도시의 부잣집 아가씨의 시녀 일을 했었다.

어머니가 아가씨의 유모였기 때문에 아가씨와는 젖형제로 자매처럼 자랐다.

저택을 증축할 때 일을 감독하던 기술자 베르토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결혼해서 이 마을로 왔었다.

소박하지만 행복한 살림이었는데 전염병이 돌 때 남편과 아들 부부를 잃고 난 후부터는 혼자 에롤을 키우느라 고생이 적지 않았다.

“내가 결혼 전 모시던 아가씨에게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도시에서도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었는데도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은 못 받았다고 하던데…….”

애나 할머니의 미심쩍은 얼굴을 보고 데얀 선생이 얼른 추가 설명을 했다.

“수학은 제국에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과목이기도 하고요. 장학금은 정말 탁월하게 잘하는 학생이 아니면 여유 있는 집 학생에게는 안 줍니다. 에롤은 수학을 탁월하게 잘하기도 하고, 그, 가정 형편도 좀 어려우니 충분히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됩니다.”

애나 할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손자가 공부를 잘하는 거야 너무나 대견하고 좋은 일이지만, 어린 손자를 외지에 내보내서 공부시킨다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의 선생에게 보내는 것도 그렇고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그렇고 어디 학비만 해결이 된다고 돈 들 일이 없을까? 먹고 입고 생활비도 들 텐데.

“에롤, 며칠 전 데얀 선생님이 집에 오셨는데, 에롤이 도시에 나가서 공부를 하면 어떨까 하시더라. 선생님이 잘 아는 수학 선생님께 추천을 해주신다던데. 우리 에롤 생각은 어떠냐?”

“와!”

탄성을 올리며 눈을 빛내던 에롤은 금방 시무룩해지면서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누, 내 강아지?”

“나 다른 데 가서 공부하는 건 안 할래.”

“수학 공부하고 싶다면서?”

“그치만 내가 다른 데 가서 공부하면 할머니 혼자 있어야 되잖아.”

아이는 머리를 숙이면서 조그맣게 종알거렸다.

“돈도 들고. 할머니 고생하는 거 싫어.”

“…….”

“내가 빨리 커서 돈 많이 벌어서 할머니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리고 약도 사드리고 그럴 거야.”

* * *

에롤이 잠든 밤, 애나 할머니는 안방의 작은 장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낡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열자 아름다운 도자기 그릇 한 쌍이 나왔다.

“저거 로얄 테이센의 수프 그릇 아닌가요?”

환각을 보고 있던 제이든이 깜짝 놀라며 말했고 오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에테노른력 934년에서 944년 사이에 제작된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시리즈 중 수프 그릇입니다.”

“분홍 장미 시리즈는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지만 푸른 장미는, 그것도 수프 세트는 희귀한데요. 찻잔 세트라면 가끔 볼 수 있지만.”

제이든은 자신이 환각 속에 있다는 것도 잊고 가까이 가서 수프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흰색 도자기 바탕에 화려하고 정교한 부조 장식이 있고 그 위에 섬세한 푸른 장미 그림이 있다.

이 푸른 장미 그림은 로얄 테이센 특유의 것으로, 테이센 사가 세운 드로잉 스쿨에서 자격증을 받은 권위 있는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들이 채색에 사용하는 안료는 오랫동안 비법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바깥에 그 제조법이 공개되지 않았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아름다운 색감을 잃지 않는 테이센 안료의 비법을 밝혀내기 위해 숱한 전문가들이 노력해 온 결과 근래에는 거의 비슷한 안료는 물론 더 나은 품질의 안료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테이센 특유의 색감에 세월이 더해진 도자기에는 새로 칠한 안료에서 느낄 수 없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릇과 받침 접시의 가장자리는 순금으로 마감되어 있고 바닥에는 R과 T를 정교하게 얽은 테이센의 마크가 새겨진 것이 보였다.

“이거 정말 좋은 물건인데요. 흠집도 없이 잘 보관했고. 로얄 테이센 중에서도 드문 가리비 형태의 그릇이네요. 이런 산간 마을에서 이 정도의 명품을 볼 줄이야.”

감탄한 제이든이 오레스를 보며 말했다.

“이런 물건이 있다면 할머니가 굳이 어렵게 식당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그는 말을 멈추고 잠깐 계산을 해 보았다.

나무 그릇의 제작 시기로 봤을 때 이 환각 속의 세계는 제이든의 시대로부터 칠팔십 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로얄 테이센의 수프 그릇 가격은 어느 정도 했을까?

계산을 마친 제이든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보태면 작은 가게 하나 열 밑천 정도는 됐을 텐데요. 할머니가 이 그릇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걸까요?”

“그것보다도 애나 할머니에게 이 수프 그릇은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오레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에게 이 그릇은 청춘과 가족의 기억이에요.”

도시의 부잣집 유모의 딸로 태어나 아가씨의 시녀로 자매처럼 자랐던 애나였다.

시녀 신분이라 직접 값진 물건을 쓰지는 못했어도 늘 보는 것이 좋은 것들이다 보니 보는 눈은 있는 편이었다.

* * *

“애나, 어딜 가니?”

“주방에 잠깐 다녀올게요.”

“새 그릇 보러 가는구나?”

“에헷!”

“참 특이한 아이야. 다른 애들은 다들 예쁜 옷이나 장신구를 좋아하는데 쟤는 그릇을 좋아한다니까.”

“그래서 마님이 귀여워하시잖아요. 마님도 그릇을 좋아하시니까.”

유난히 그릇을 좋아했던 애나는 주방에 새 그릇이 들어오거나 마님이 귀한 찻잔이나 도자기 식기 등을 사들일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았다.

그릇을 좋아하는 마님이 수집한 식기 중에서도 애나가 가장 좋아한 것은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 식기였다.

처음 그 식기가 들어와 거실의 유리 장식장에 장식된 날 애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그릇을 바라봤었다.

찻잔 4조와 수프 그릇 4조, 모두 여덟 개의 그릇이 각각 받침 접시와 함께 있었다.

“아름답지? 원래는 다른 식기도 있었을 텐데 찻잔과 수프 그릇밖에 구할 수 없더구나.”

“정말 아름다워요. 마님, 그동안 본 그릇들 중에서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우리 딸이 너처럼 그릇을 좋아하면 좋으련만, 발레리는 도대체 그릇에 관심이 없어서 나랑 취미가 안 맞아. 애나, 너라도 많이 감상하렴.”

드물게 후덕한 성품의 마님이나 소탈한 발레리 아가씨 모두 애나에게 관대해서, 애나는 매일 한두 번씩 유리 장식장 안을 홀린 듯 들여다보곤 했었다.

애나가 건축 기술자인 베르토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을 때, 마님과 발레리 아가씨는 애나의 혼수를 넉넉히 챙겨주면서 행복을 빌어주었다.

“당신은 정말 복 받은 거야. 저렇게 좋은 주인집은 없어.”

베르토는 어렸을 때 남의 집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혹사당했었는지 말하면서 애나를 부러워했었다.

결혼 후 베르토의 고향 마을로 이사 온 후 애나와 베르토는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소박한 살림을 꾸렸고 곧 아들도 태어났다.

원래 살던 도시와 너무 먼 곳이라 발레리의 집에 남은 어머니를 못 보는 게 아쉬웠지만 가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곤 했었다.

2년 후 발레리가 결혼해 남부로 떠나면서 어머니가 일을 그만두고 애나가 사는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자 자연스럽게 발레리의 집과는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몇 년 후, 우연히 애나는 발레리의 본가가 파산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베르토가 일부러 도시까지 나가서 소식을 알아봤지만 파산 후 가산을 정리해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 외엔 알 수가 없었다.

애나와 어머니에겐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마음이 몹시 안 좋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당시엔 전서구 우편 체계도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고 애나로서는 더 이상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마님이나 발레리의 생각 때문에 자다 일어나서 눈물을 흘린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아이 기르고 살림하며 먹고 사느라 바빠서 차차 잊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더욱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아들이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인가 되었던 어느 해, 오랜만에 남편과 도시에 나갔던 애나는 옛날 그릇을 많이 파는 골동품상을 지나가게 되었다.

비싼 건 살 수 없겠지만 혹시 작은 거라도 하나 살 수 있을까 큰맘 먹고 가게에 들어가 본 애나는 뜻밖의 물건을 보았다.

소녀 시절 매일 유리 장식장을 들여다보며 가슴 두근거렸던 바로 그 도자기, 로얄 테이센의 푸른 장미가 골동품 식기들 사이에서 마치 그녀를 올려다보듯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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