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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94화 (94/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4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4)

여태까지 제이든이 유물의 내력을 볼 때는 언제나 유물에서 푸른색 또는 금빛의 아우라가 먼저 피어올랐었다.

‘안 되네.’

아무리 눈 빠지게 들여다보면서 정신을 집중해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그릇을 보다가 제이든은 머리를 들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좀 떨어져 앉아서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는 칼리스타가 보였다.

제자를 위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머니 못지않은 것 같았다. 저 애틋한 마음을 위해서라도 꼭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제이든, 포이를 봐.

아실리가 속삭이듯 야옹거렸다.

무릎 위의 포이를 보니 포이는 그릇을 붙잡고 있긴 했지만 그릇을 보고 있지 않았다.

포이가 보고 있는 것은 수조 속의 오레스였다.

“포이?”

나직하게 포이를 불러 봤지만 포이는 눈도 깜빡 않고 오레스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포이의 눈길에 이끌리듯 제이든도 오레스를 바라보았다.

움직임 없는 수조 속의 오레스가 포이의 눈길을 따라 조금 머리를 돌린 것 같았다. 물이 마치 젤리처럼 부드럽게 출렁이는 듯했다.

‘착시 현상인가?’

아주 옅은 녹색을 띤 채 투명하게 수조 안을 채우고 있던 물의 녹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물의 출렁거림이 조금 더 커지면서 물이 제이든을 빨아들이듯 눈앞으로 가까이 왔다.

* * *

“여긴 어디지?”

눈앞에 출렁이던 물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흰 줄기의 나무들이 나타났다.

흰 자작나무.

그럼 티아룬 호숫가의 자작나무 숲인가?

“포이이.”

조그만 목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렸다.

“삐이잉.”

그의 발치에서 뒷발을 앞으로 뻗고 앉아 있던 토끼가 꿈에서 깬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포이, 어떻게 여기 있어?”

놀란 제이든의 목소리에 머리를 쳐든 포이는 제이든을 보자 반가운 듯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안아 달라는 듯 앞발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피이잉!”

“너 나랑 같이 환각 속으로 들어온 거야?”

누군가와 같이 환각 속으로 들어오는 게 가능한가?

유물의 내력을 다른 사람과 함께 봤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제이든은 앞발을 내민 포이를 안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같이 와서 정말 다행이다. 유물의 내력 속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피잉!”

포이는 앞발로 제이든의 목을 꼭 끌어안으면서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응? 아니야? 뭐가 아니야?”

“피이잉!”

“음…….”

제이든은 포이가 말하려고 하는 게 뭔지 알아내려고 주의 깊게 포이의 얼굴을 보았다.

“유물의 내력?”

“삐잉!”

“음, 우리가 유물의 내력 속에 들어온 게…….”

“피잉, 피잉.”

포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까만 귀가 팔락거렸다.

“유물의 내력이 아니라고?”

“포잉!”

포이가 머리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유물의 내력에 들어온 게 아니라면.”

제이든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생각했다.

포이가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더니 제이든의 팔에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기절한 시늉, 혹은 잠자는 시늉을 했다.

“잠자는 거? 그럼, 혹시…….”

제이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유물의 내력이 아니라 오레스 아켈리오의 꿈속에 들어온 거야?”

“포잇!”

포이가 큰 소리로 대답하면서 앞발로 손뼉을 쳤다.

* * *

“포에니 토끼는 반려인에게 기적의 행운을 가져다준다더니.”

“포잉.”

제이든은 포이를 안은 채 자작나무 숲을 헤쳐 나가며 중얼거렸고 포이는 그 말이 맞는다는 듯 대꾸하면서 제이든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전에 아실리가 보여준 책을 보니까, 포에니 토끼는 행운의 영물이지만 반려인에게 가져다주는 기적은 토끼와 반려인의 친밀도에 비례한다더라.”

“포잇.”

“사람의 꿈속에 함께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보이다니! 우리 포이 형아 많이 좋아하는구나?”

“포오이잉.”

포이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제이든의 턱 밑에 머리를 밀어 넣고 비볐다.

아우, 귀여워서 숨넘어가겠네.

제이든은 포이의 보들보들한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넌지시 물었다.

“포이야, 그럼……, 아실리가 좋아? 형아가 좋아?”

“…….”

포이는 당황한 얼굴로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호하게 아실리를 선택했는데 이젠 당황하는 걸 보니 포이의 마음속에서 내 위치가 많이 올라간 게 틀림없어!

저절로 입가를 늘어뜨리던 제이든은 정신을 차리고 숲 바깥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실리가 봤으면 지금이 어느 때라고 엉뚱한 생각 중이냐, 환각에나 집중하라고 하악질 두어 번은 날렸을 것이었다.

어쩌면 솜방망이 냥냥펀치도 한 대쯤 맞았을지 모르고.

언제나 옆에 있던 아실리와 요즘 떨어져 있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는 듯해 마음이 조금 헛헛했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오자 나직한 산기슭 아래로 옹기종기 집들이 붙어 있는 마을이 보였다.

전혀 낯선 풍경이고 주변을 둘러봐도 호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티아룬 호숫가는 아니었다. 해 질 무렵이라 하늘에 노을이 퍼지고 있었다.

제이든은 포이를 안은 채 마을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어?”

마을 어귀에 둥치가 몇 아름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데, 그 아래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약간 호리호리한 몸에 짙은 갈색 머리,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나무 위를 골똘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오레스 아켈리오?”

좀 전에 운디니움의 수조 속에 눈을 감은 채 잠겨 있던 바로 그 남자가 개암나무 열매 같은 밤색 눈을 크게 뜬 채 나무 위를 보고 있었다.

제이든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깜짝 놀라면서 중얼거렸다.

“누구지? 설마, 내가 보이는 건가?”

이번에는 제이든이 놀랐다.

“아켈리오 씨, 내가 보이나요?”

두 명의 감정사는 놀란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제이든의 품에 안긴 포이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 * *

“내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고요?”

오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음…….”

오레스는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더니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니까 나는, 집에서 유물의 내력을 보는 수련을 하고 있었어요.”

그날은 칼리스타가 마탑의 의뢰를 받고 집을 비운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왔고, 혼자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서 유물의 내력을 보는 수련을 시작했다.

유난히 유물과 연결이 잘 되는 날이었다.

처음 연습한 대상은 엘데온의 골동품 조각상이었는데 한 번에 바로 조각상이 만들어졌던 시기의 환각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오레스가 보았던 환각 중 가장 선명하고 상세한 환각을 볼 수 있었고 환각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조각상의 사연이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어서 환각을 보고 난 후유증도 없었고 오히려 개운하고 좋은 기분이었다.

반면에 두 번째 유물은 조금 우울한 사연을 보여주었다.

오레스처럼 감정 이입이 잘 되는 감정사는 우울하거나 슬픈 사연을 보게 되면 마음뿐 아니라 몸도 힘이 든다.

“스승님도 유물의 내력을 보는 수련은 많이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하루에 두 점의 환각을 본 것으로 이미 심신이 많이 피로해졌다.

“거기서 그쳤어야 하는데 그날따라 유물의 내력이 너무 잘 보여서 욕심이 났습니다.”

아직은 보려고 해도 못 볼 때가 많은데 선택한 유물 두 점이 연속으로 사연을 보여주는 바람에 고무된 오레스는 딱 하나만 더 보기로 했다.

귀한 물건이거나 감정이 어려운 물건은 빼고 가볍게 볼만한 게 있을까 하고 보관해 둔 유물을 살펴보는데 문제의 나무 그릇이 눈에 띄었다.

“정식으로 의뢰받은 물건은 아니었고, 그 몇 달 전에 감정 의뢰를 받아서 일을 다녀오다가 길에서 잡동사니를 파는 소녀에게서 샀던 그릇이에요.”

춥고 배고파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무로 깎은 목걸이며 팔찌, 꽃병 등을 길가에 펴놓고 팔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뭐라도 하나 사 주려고 살펴보다가 그릇을 보았다.

“다른 것은 다 최근에 깎은 거였는데 그것만 오래된 거라 눈을 끌었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다른 건 식구들이 만들었지만 그 그릇은 예전부터 집에 있던 거라 하더라고요.”

깎은 솜씨는 어중간했고 모양 역시 술잔도 아니고 찻잔도 아니고 식기도 아닌 어중간한 그릇이었다.

그래도 뭔가 사 주고 싶었던 오레스는 그중 오래된 그 나무 그릇을 골라서 아이가 부른 것보다 몇 배나 되게 넉넉한 값을 쳐주고 샀다.

집에 와서 다시 봐도 너무 평범한 물건이라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날 그 나무 그릇이 눈에 띈 것이다.

“찻잔도 아니고 식기도 아니고, 뭘 만들려고 했던 걸까?”

칠팔십 년 전 카이엔의 평민 가정이라면 이런 손으로 깎은 나무 그릇은 집집마다 굴러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내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특이한 모양 때문에 손에 들고 굴리면서 자세히 보는 중이었는데 한순간 의식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저 마을에서 깨어났지요.”

그는 마을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 나무 그릇의 내력입니까?”

“그래요. 그 그릇은 저 아이가 만들었어요.”

오레스가 손을 들어 나무 위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나무 위를 보니 그제야 굵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조그만 사내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열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나무 위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애 이름은 에롤이에요. 지금 일 나간 할머니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어요.”

* * *

에롤은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였다.

에롤이 아직 아기였을 때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고 그때 부모를 모두 잃은 에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에롤을 키웠는데, 음식 솜씨가 좋은 할머니는 요즘 가까운 도시의 식당으로 일을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오는 늦은 저녁이 되면 에롤은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나와서 조금이라도 할머니를 빨리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 도시로 통하는 길을 내다보고 있곤 했다.

“할머니, 할머니!”

멀리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자 에롤은 나무 위에서 벌떡 일어나 한 손으로 가지를 붙잡은 채 다른 손을 막 흔들었다.

“아이고, 에롤. 떨어지면 어쩌려고! 위험하니까 나무 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잖니.”

멀리서 여자의 목소리가 아슴푸레 들려왔다.

“괜찮아요. 가지가 이렇게 굵은데,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무를 잘 타는데!”

아이는 밟고 서 있던 나뭇가지 위에서 두어 번 깡충깡충 뛰어 보이더니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고 내려와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내 강아지, 밥은 잘 챙겨 먹었누?”

“응, 빵이랑, 수프랑, 우유랑, 뒷산에서 딴 루스틴 열매하고.”

“채소는?”

아이는 얼굴을 살짝 할머니의 등 뒤로 숨기며 에헤헤 웃었다.

“또 가려 먹은 게야?”

“내일은 빼먹지 않고 채소도 먹을게요.”

“학교는?”

“잘 갔다 왔어요. 데얀 선생님이 나 공부 열심히 했다고 칭찬해 줬어요. 나하고 케인하고 다음 달에 도시에 가서 시험을 보자고 했어요.”

“으응.”

에롤의 말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이 조금 흐려지는 듯했지만 금방 웃음을 되찾으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손자 정말 대견하구나.”

할머니와 손자는 서로 꼭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며 오레스와 제이든의 앞을 지나갔다.

그들에게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애가 공부를 참 잘해요.”

오레스가 말했다.

“여기 애들은 대부분 사냥을 하거나 일꾼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도시에서 부잣집 가정교사 일을 오래 했던 선생 하나가 낙향해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따로 건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집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학교라고 부르며 공부할 의욕이 있는 아이들을 보낸다고 했다.

“읽고 쓰기와 계산 등 기본적인 교육을 하는데, 이 마을에서 에롤이 공부를 제일 잘해서 선생이 아깝다고 도시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합니다.”

“무척 자세히 아시네요?”

제이든의 말을 들은 오레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요.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제가 저 아이를 참 오래 지켜봤나 봐요.”

“그릇이랑은 무슨 관계가 있지요?”

“아, 그릇…….”

오레스는 그제야 생각난 듯이 바위에서 일어섰다.

“가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가 제이든의 팔에 손을 얹자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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