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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93화 (93/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3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3)

뒷발로 서서 앞발을 쭉 뻗어 봤지만 닿지 않자 포이는 끼이잉 콧소리를 내면서 제이든을 돌아봤다.

“왜? 만지고 싶어? 안 돼. 중요한 물건이야.”

포이가 호기심이 많기는 하지만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거나 하진 않는데.

제이든이 포이를 말리려고 할 때 칼리스타가 유리 상자의 덮개를 열더니 나무 그릇을 꺼내 들었다.

“포이, 이 그릇이 궁금하니?”

포이가 고개를 까딱까딱 숙이자 칼리스타는 루터 박사에게 말했다.

“루터,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예. 나중에 부르십시오.”

루터 박사가 방에서 나가고 나자 칼리스타는 포이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자, 맘껏 보렴.”

“칼리스타 님, 제자분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유물인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포에니 토끼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데 포이가 관심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자, 포이 마음대로 보렴, 만져 봐도 돼.”

“하지만…….”

제이든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겉으로 봐서는 정말 평범한 나무 그릇인데 이 그릇 때문에 2급 감정사가 혼수상태에 빠져서 8년이나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지 않나.

아무리 포에니 토끼가 행운의 동물이라지만 혹시라도 포이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주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는데 포이는 칼리스타가 보여주는 그릇을 냉큼 앞발로 붙잡았다.

조그만 머리를 양쪽으로 갸웃거리면서 그릇을 들여다보는 포이를 보면서 칼리스타가 말했다.

“오레스는 고아였어. 부모는 일찍 죽고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려서 헤어졌다더군. 혼자서 어렵게 자라다가 어찌어찌 후원자를 만나 아카데미에 입학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감정사의 재능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어려운 일이 무척 많았다네.”

그녀는 물속에 떠 있는 오레스를 바라보았다.

암사자처럼 강인해 보이던 얼굴에 쓸쓸하고 피로한 빛이 돌았다.

“감정사라면 이론에도 박식해야 하고 물건 보는 눈도 좋아야 하고 유물과의 유대감도 강해야 하지. 이론이나 지식, 물건 보는 눈 등은 공부와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나 유물과의 유대감은 타고나는 능력에 많이 좌우되지. 오레스는 선천적으로 물건과의 유대감이 굉장히 좋은 감정사였다네. 자네도 그런 쪽이지?”

“예, 그렇습니다.”

“유물과의 유대감이 먼저 이루어지고 지식과 이론을 나중에 쌓아 올리는 감정사의 경우 그 재능 덕분에 유물의 내력을 빨리 보는 편인데, 반면에 또한 그 재능 때문에 유물에 감정이입되어 환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위험도 크다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아실리도 제이든에게 그 부분에 대한 경고를 했었다.

“오레스는 아카데미 때부터 우수한 실력을 보였지만 환경이 좋지 않았지. 나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긴 해도 따로 제자를 받지 않았었는데 오레스는 그냥 두기 아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제자로 받았다네. 제자로 받아 놓고 보니 생각보다 더 뛰어난 데다 노력은 또 얼마나 하는지, 천재가 노력까지 하니까 조만간 제국의 1급 감정사가 한 명 더 늘겠다 싶었는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유물의 내력을 보는 건 되도록 혼자 연습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밤낮으로 연습하더니만.”

칼리스타는 물속의 제자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녀 자신도 오레스나 마찬가지로 외로운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었다.

칼리스타는 오레스처럼 고아가 아니었지만 때로는 차라리 자신이 고아였으면 했었을 때가 있었다.

그녀는 부유한 귀족 가문의 장녀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용모와 총기를 지녔던 그녀에게 부모는 기대가 많았다.

자녀에게 기대를 갖지 않는 부모는 없겠지만 칼리스타의 부친은 그 기대치가 일반적인 기준을 훨씬 넘어섰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청년 시절 황궁에 출입하는 고위 관료가 되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가문의 뒷받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사업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상재가 있었던지 손대는 족족 성공해서 막대한 부를 얻었다.

그는 태어나는 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고위 관료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칼리스타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짜 놓은 계획표에 따라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다소 미련하다 해도 최고의 선생들을 붙여 어떻게든 수재 소리를 듣게 길러낼 각오였던 부친인데, 금상첨화로 딸은 타고난 천재이기까지 했다.

가정교사들마다 칼리스타의 총명함을 칭찬하고 빠른 습득력에 감탄했다.

어린 칼리스타는 그럴 때마다 부친이 기뻐하는 것이 뿌듯했지만 차차 부친이 기뻐하는 것이 자신이 훌륭한 도구로 자라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어떤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고위 관료가 되어 가문의 이름을 빛내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길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칼리스타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자아가 강한 성격이었다.

대부분 15세에 입학하는 아카데미에 빠른 학습 수준을 인정받아 14세에 입학했을 때였다.

처음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보통 집이 그리워 향수병에 걸리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는데 칼리스타는 처음으로 숨을 편하게 쉬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짜여진 계획표로 살아가고, 아버지의 계획에서 빗나가는 다른 길은 쳐다볼 수도 없었던 삶이 얼마나 숨 막히는 삶이었던지.

“감정사가 되겠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1년 만에 칼리스타는 감정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말을 들은 부친은 노발대발하며 그녀의 뜻을 일축했다.

“그러라고 이때까지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온갖 교육을 다 받게 하고 곱게 키운 줄 아느냐?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널 위해 모든 걸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절 위해서인가요?”

“그럼 널 위해서지. 애비가 닦아준 길을 따라가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게 너지 그럼 누구냐?”

“제가 원하지 않는데도요?”

“네가 어려서 철이 없어 몰라서 그런다. 감정사도 물론 좋은 직업이지. 하지만 우리 딸은 관료가 돼야 해. 넌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 너 정도면 카이엔 최초의 여재상이 될 수도 있어.”

“아버지, 저는 감정사가 천직이라고요! 아카데미의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부녀간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지만 칼리스타는 굽히지 않았다.

부친은 재정적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리긴 해도 혼자 몸은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그녀는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에 조금의 반항도 못 하고 무조건 아버지를 따르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도 않았고. 가문에서 내쫓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가문과 연을 끊고 성까지 버리고 새로운 성을 신청해서 클론이라는 호적을 새로 만든 것은 동생의 죽음 때문이었다.

칼리스타가 집을 나간 후 딸에게 실망한 그녀의 아버지는 여섯 살 아래인 남동생을 고위 관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칼리스타보다 온순한 성격이었던 남동생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 누나는 네 나이 때 벌써 3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네 누나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자마자 천재라고 교수들 간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네 누나는…….”

아버지의 압박과 요구 속에서 숨 쉴 틈 없이 꽉 짜인 계획표에 쫓기며 살아가던 동생은 열다섯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난 그저 저들 잘되라고 그랬을 뿐인데. 다 저네들 잘되라고 그런 건데. 딸년이건 아들놈이건 왜 이리 부모 맘을 모르고 제멋대로인 건지. 딸년은 너무 강하고 아들놈은 너무 나약하고.”

장례식에서 한탄하는 아버지에게 칼리스타는 냉정하게 선언했다.

“저는 아버지의 성을 버릴 겁니다. 아버지는 오늘 아들뿐 아니라 딸도 영원히 잃으신 겁니다.”

어쩌면 내가 집을 나오지 않고 방패 역할을 해주었다면 동생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폭군 같은 아버지의 손에 동생을 놔두지 말고 함께 데리고 나왔어야 했었을까?

동생의 죽음이 마치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서 칼리스타는 오래오래 괴로웠다.

“오레스는 보면 볼수록 어릴 때 잃은 남동생 같았다네.”

그녀는 호탕하고 시원스러운 성격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의외로 사람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성장 환경 때문인지 그녀에게는 일정 간격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사람에게는 벽을 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벽을 깨뜨리고 그녀의 마음을 녹인 것이 오레스 아켈리오였다.

“스승님, 이거 좀 드셔 보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이런 꿀꿀이죽을 누가 먹니?”

“보기는 이래도 맛이 괜찮아요. 스승님.”

“오레스, 왜 우는 거냐?”

“스승님, 이 유물의 이야기가 너무 슬픕니다. 도와주고 싶어요.”

“그거 삼백 년 전 비파다. 그거 타던 악사는 이미 흙이 되었거나 환생했을 텐데.”

“그렇겠지요? 그래도 비파가 아직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오레스, 꼬마들이랑 뭐 하고 있는 거냐?”

“감정 중입니다.”

“사과를?”

“예. 동네 아이들이 이 사과가 에녹 사과인지 데포른 사과인지 다투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3급 감정사의 위엄으로 감정해 주기로 했습니다.”

오레스는 감정사로서의 재질도 뛰어났지만 천성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혹독한 성장 환경을 거쳤음에도 따뜻하고 선량한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가 커다란 강아지처럼 스승님! 하고 부르며 쫓아올 때면 어린 시절 누나를 부르며 쫓아오던 남동생 생각이 나곤 했다.

오레스가 제자가 된 후 칼리스타의 성격도 좀 더 편안해지고 너그러워졌다.

사제지간이 된 지 몇 년 후 이제 충분히 한몫하는 감정사가 되었으니 독립해서 나가라고 했더니 오레스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했었다.

“스승님…….”

“너도 이제 가정도 꾸리고 해야지 언제까지 내 수발들면서 살래? 너 좋다는 아가씨들도 많던데.”

“가정을 꾸릴 때는 꾸리더라도 미리부터 나가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은데.”

“독립해도 배울 수 있다.”

“스승님, 저는 부모 밑에서 자라질 못해서 스승님이 제 어머니이고 아버지인데, 계속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거 참 녀석도.”

“스승님, 비도 오는데 출출하지 않으세요? 제가 맛있는 스튜 한 그릇 끓여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할게. 네가 하면 주방 엉망 된다.”

사제지간이 된 지도 십여 년이 훌쩍 넘은 후, 오레스가 2급 감정사가 되어 한참 유물의 내력을 보기 시작했을 무렵의 어느 날.

마탑의 감정 의뢰를 받고 사흘간 집을 비웠다 돌아왔을 때 오레스는 제 방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또 밤낮으로 유물을 보는 연습을 했는지 서너 가지의 유물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는데 바닥에 쓰러진 오레스의 손에는 처음 보는 나무 그릇이 쥐어져 있었다.

“그게 이 그릇인 거지요?”

“음.”

칼리스타는 포이가 갖고 놀고 있는 나무 그릇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의뢰받은 유물은 아니야. 하지만 오레스는 마을 할아버지가 감정해 달라고 갖고 오는 요강 단지도 소중하게 받아주는 녀석이라 누가 갖다 맡겼는지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르지.”

유물이 사람을 고른다는 말이 있다.

2급 감정사 때는 유물이 허락하는 경우에 한해 그 내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제이든의 현재 상태가 그런 셈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유물의 내력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환각 속에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되면 1급 감정사 수준이라고 한다. 이 경우 보통 감정 관련 마법에도 능통한 수준이고.

1급 감정사가 내력을 볼 수 없는 유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강한 자아를 지니고 있어서 1급 감정사라 해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경우이다.

또 하나는 반대로 지나치게 평범한 물건인 경우이다.

기계로 찍었거나 사람이 만들었다 해도 장인의 혼이나 마음이 깃들지 않은 물건이라 감정사가 볼만한 게 없는 것이다.

이 그릇은 아무리 봐도 후자인데.

제이든은 포이가 앞발로 감싸고 있는 그릇을 다시 보았다.

“자네가 다시 한번 봐주겠나?”

칼리스타는 간절한 얼굴로 제이든을 보았다.

“내가 오레스를 깨워 보려고 안 찾아 본 약이 없고 찾아보지 않은 마법이 없다네. 혹시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해서 8년간 대륙의 마법사와 약사, 치유사는 모두 찾아가 봤지. 오레스의 환각이 이 그릇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다른 감정사에게도 부탁해 봤는데 아무도 환각을 보지 못했어. 하지만 자네는 좀 다른 것 같군.”

그녀는 포이와 제이든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행운의 포에니 토끼를 데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옛이야기에 나올 만한 일이지만, 자네 자신에게도 보통의 감정사와는 좀 다른 게 느껴져. 자네에게선 오레스와 비슷한 파장이 느껴지기도 하고. 다시 한번 잘 봐주게.”

그 간절한 표정 때문에 제이든은 고개를 숙이고 포이를 안아 올렸다.

자신은 없었지만 포이의 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빌며 다시 최선을 다해 볼 참이었다.

-이쪽으로 앉아.

방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아실리가 뛰어오르면서 말했다.

제이든은 포이를 안은 채 소파에 가서 앉은 뒤 포이에게서 그릇을 받아 탁자에 놓으려고 했다.

아실리가 야웅 울었다.

-그릇 빼지 말고 포이가 그냥 갖고 있는 채로 집중해 봐.

제이든은 아실리의 말대로 그릇을 안고 있는 포이를 무릎에 앉힌 채 다시 한번 온 마음을 다해 그릇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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