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2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2)
자작나무에 말고삐를 묶는 칼리스타를 보면서 제이든도 따라 내렸다.
“어떤가?”
칼리스타가 그에게 물었지만 제이든은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예……, 숲도 운치가 있고 호수도 아름답네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제이든의 뒤쪽을 보면서 칼리스타가 빙그레 웃었다.
“자네 고양이가 자네보다는 눈이 좋은 모양이야.”
제이든이 뒤를 돌아보자 아실리가 썰매의 가장자리 위에 올라앉은 채 얼어붙은 호수의 한 부분을 골똘히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포이는 그 옆에서 아실리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아실리가 보는 곳을 자기도 바라봤다.
작은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집중해서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다시 아실리를 올려다본다.
“토끼는 보지 못하는구나. 사실 안 보이는 게 정상이지.”
“제자분이 계시는 시설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이든이 묻자 칼리스타는 마부석 옆에 걸쳐 뒀던 지팡이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맞아, 이제 갈 테니까 토끼와 고양이를 안아 주게.”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가야 하나 보네.
제이든이 아실리와 포이를 안아 들자 칼리스타는 앞장서서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칼리스타 님, 조심하세요. 땅이 얼어서 미끄러운데.”
호수의 가장자리 쪽으로 나직한 둔덕이 이어져 있었다.
사람 손이 닿은 것 같지는 않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듯 높이가 고르지 않았다.
둔덕 위에 선 칼리스타가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와 보게.”
제이든이 칼리스타의 옆에 서자 은빛 호수가 눈앞으로 넓게 펼쳐졌다.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이 햇빛을 받아 눈부셨다.
“여기가 티아룬 호수라네.”
“예. 짐작은 했습니다.”
콜레디오바와 센디니온 사이에 있는 넓은 호수, 아마릴리스의 섬이 있다는 이 호수는 특이하게도 어떤 영지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랄까.
제이든은 카티야를 생각하면서 호수 가운데 쪽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녀의 섬이 보일까 하고.
얼음이 햇빛을 반사해서 눈이 부신 탓인지 섬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호수네요. 얼어 있어서 원래의 경관을 볼 수 없는 게 아쉽지만 겨울 호수는 또 겨울 호수의 운치가 있군요.”
호수를 보는 제이든 옆에서 칼리스타가 품속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콩알처럼 조그만 사탕이었다.
“자, 이걸 하나씩 먹게. 몸이 따뜻해질 걸세.”
“?”
“얼른.”
제이든은 알약처럼 조그만 주황색 사탕을 받아 입에 넣고 아실리와 포이에게도 하나씩 먹였다.
“맛있네요.”
사탕이 입안에서 녹으면서 몸 안에서 따끈한 기운이 퍼졌다.
“그럼 이제 가볼까?”
칼리스타가 갑자기 제이든을 호수 쪽으로 떠밀었다.
“우와악!”
아무 준비도 없이 호수 쪽으로 고꾸라진 제이든의 눈앞으로 얼어붙은 은빛 호수의 표면이 덮쳐왔다.
아니, 덮쳐온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일렁이면서 얼음판이 사라졌다.
잠시 후 제이든은 낯선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균형을 잡는 그의 팔을 칼리스타가 잡은 채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고 아실리와 포이는 제이든의 품 안에 안전하게 안겨 있었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떠미시면 어떡합니까? 애들 놓쳤으면 어쩔 뻔했어요!”
“미안, 미안, 그런데 자네 생각보다 균형 감각이 좋군.”
제이든이 버럭 짜증을 내자 칼리스타가 웃으면서 그의 등을 토닥였다.
“좀 놀라게 해 준다는 게 과했군, 사실 이 시설에 들어오는 길은 외부인에게 알릴 수 없어서 그랬다네.”
정신을 차린 제이든의 머리 위, 반쯤 투명한 천장 위로 하얀 물고기가 두어 마리 스쳐 갔다.
“헉, 설마 여기가…….”
제이든은 안고 있던 포이를 어깨에 올려 놓고 눈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은 단단하고 불투명한 재질이었지만 벽은 성인의 허리쯤 될 높이부터 천장까지 둥그스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었고 반투명한 재질이라 바깥이 보였다.
모양이 특이한 바위와 돌, 천천히 일렁거리는 수초 사이로 크고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느릿느릿 지나갔고 짙은 회색의 물고기 한 마리는 벽에 찰싹 붙어 지느러미를 팔락거리며 안쪽을 궁금한 듯 들여다보았다.
제이든이 놀란 눈으로 칼리스타를 보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시설은 호수 아래에 있다네.”
* * *
“오셨습니까?”
회랑 끝에서 흰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나타나 제이든 일행에게 가까이 오며 말을 걸었다.
“이런, 오늘은 아주 귀여운 손님들과 함께 오셨네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 남자는 한눈에 보아도 뭔가 의료 계통에 종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여기는 운디니움의 수석 치유사인 에밀리오 루터 박사, 이쪽은 감정사인 제이든 로스, 그리고 아실리와 포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이 시설의 이름이 운디니움인가 보다.
“오레스는? 여전하지?”
“보고 가신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요. 신체 상태는 잘 관리되고 있지만 여전히 잠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친구들에게 오레스를 한번 보여주면 좋을 듯해서 데려왔네.”
“예. 미리 보내주신 전서구 편에 전갈은 받아 보았습니다.”
그는 제이든 일행을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추워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사탕은 미리 드셨지요?”
“그럼, 호숫가에서 미리 줬지.”
칼리스타가 제이든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떤가? 춥진 않지?”
“예, 괜찮은데요.”
좀 서늘하긴 하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었다.
얼음으로 덮인 호수 밑바닥이니 수온도 엄청 찰 텐데 이 정도면 난방이 잘 돼 있는 건가 했는데.
“여기가 사실 굉장히 춥거든. 그래서 체온을 보존할 수 있는 사탕을 미리 먹인 거라네. 이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방문객들에게만 제공되는 사탕이지.”
“많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요. 애당초 운디니움에는 일반인 방문이 어려운데 이렇게 함께 오시고, 게다가 토끼와 고양이까지 데리고 오신 걸 보니 칼리스타 님께 특별한 생각이 있으신가 봅니다.”
“음, 서로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이 친구가 지금 오레스가 잠들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인 것 같네.”
“정말입니까?”
루터 박사는 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이든을 다시 보았다.
“이렇게 젊으신데 벌써 그런 단계가 되셨군요.”
“아니, 이제 막 유물의 내력을 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제이든은 좀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그맘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감정사가 아니지만 그 즈음에 유물의 환각 속에 갇힌 감정사를 둘이나 봤습니다.”
“둘이나요?”
“한 분은 여기 입원해 계신 오레스 아켈리오 감정사고, 또 한 분은 환각에 빠지긴 했지만 사흘 만에 깨어나서 퇴원하셨습니다.”
살짝 겁이 난 제이든이 물었다.
“감정사들이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입원하는 일이 더러 있습니까?”
“아닙니다. 애당초 그 단계에 오르는 감정사가 많지도 않고요. 유물의 내력을 보기 시작한 2급 감정사가 환각에서 제때 못 빠져나오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대개 몇 분, 길어도 몇 시간 이내에 깨어나니까 이런 시설에 들어올 정도가 되는 일은 많지는 않지요.”
“예에.”
“원래 운디니움은 마법 수련 중에 코마에 빠진 마법사를 위한 시설입니다. 감정사보다는 마법사가 코마에 빠지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루터는 칼리스타를 곁눈질하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오레스 아켈리오 감정사처럼 8년이나 깨어나지 않는 경우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정말 드물지만요.”
수련 중 혼수상태에 빠진 마법사는 보통 마법사 전용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코마라 부르는 장기 혼수상태라 해도 대개 3개월 안에 깨어난다고 한다.
혼수상태가 3개월이 넘는 경우에만 운디니움에 입원하게 되는데 운디니움에는 대개 1년에 3~4명 정도의 환자가 들어오고 오레스 아켈리오는 운디니움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코마 상태에 빠져 있는 환자라고 했다.
“대체 무엇이 그 아이를 이렇게 오랫동안 꿈속에 잡아두고 있는 건지…….”
칼리스타의 나직한 탄식을 뒤로하고 루터 박사가 문을 열었다.
“자, 들어오세요.”
문 안쪽은 제이든이 생각한 병실과는 좀 달랐다.
문에서부터 방의 절반 정도는 일반적인 방 같았으나 안쪽 절반은 투명한 벽 안에 마치 수조처럼 물이 차 있었고 그 물속 중간쯤에 환자복처럼 보이는 옅은 색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누운 자세로 떠 있었다.
물속의 남자는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편안하게 사지를 늘어뜨리고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이 마치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에 연결된 몇 가닥의 선이 벽 바깥에 놓인 수정구며 마법 도구처럼 보이는 몇 가지의 설비에 이어져 있었다.
벽에 살짝 손을 댔던 제이든은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사탕을 먹었는데도 손에서 냉기가 전해져 왔다.
차가운 벽은 딱딱하지 않고 고무처럼 말랑말랑하고 탄성 있는 재질이라 누르면 풍선처럼 움직였다.
안쪽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차 있는 물도 일반적인 물은 아닌 듯했다. 투명하지만 젤리처럼 약간의 질감이 느껴졌다.
“물속에 잠겨 있는데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네요? 숨 쉬는 건 괜찮은지.”
“티아룬 호수의 물을 특수하게 가공한 용액이라 호흡에 문제가 없습니다. 젖지도 않고요. 지금은 거의 동면 상태여서 호흡도 매우 느리긴 합니다만.”
장기적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신체를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던 마법사와 치유사들은 환자의 몸을 동면에 가까운 상태로 유지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마법 보호구나 빙벽 안에 시설을 짓고 얼음 안에 환자를 보호하는 방법도 연구했는데, 신체 상태를 보존하는 데는 빙벽이 나았지만 지속적인 관리와 치유를 위해서는 티아룬의 물이 가장 좋았습니다. 결국 이 호수 바닥에 시설을 짓게 되었지요.”
지구에서도 불치병 환자를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동결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비슷한 건가.
제이든이 루터 박사의 말을 듣는 동안 칼리스타는 벽 가까이에서 환자의 얼굴을 쓰다듬듯 손으로 벽을 쓰다듬고 있었다.
강인해 보이는 얼굴이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포이이?”
뒷발로 일어선 포이가 벽을 톡 건드려 보더니 벽이 출렁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
“포잇?”
포이가 이것 보라는 듯 아실리를 돌아봤는데 아실리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오레스의 몸 상태를 관리하는 듯한 마법 설비들 옆에 유리 상자에 들어 있는 나무 그릇이 하나 있었다.
술잔이라기엔 크고 식기라기에는 작았다. 손잡이가 달린 형태로 보면 찻잔 같기도 했지만 찻잔이라기엔 좀 넓었다.
나무로 투박하게 깎은 그릇이고 나름 공들인 세공이 되어 있었지만 만든 솜씨가 좋지는 않았다.
“평범하지?”
아실리를 따라 제이든이 그릇을 보고 있자 칼리스타가 말했다.
“예. 그냥 일반인이 취미로 만들어 본 것 같은 그릇인데요?”
나무는 좋은 걸 썼지만 깎은 솜씨가 서투르다 할 정도로 평범했다.
만든 시기도 칠팔십 년 전 정도일까? 백 년이 안 되어 보여서 유물이나 골동품이라 부르기엔 좀 모자랐다.
“그런데 그걸 보다가 오레스가 환각에 빠진 거라네.”
“예?”
제이든은 놀라면서 그릇을 다시 보았다.
이렇게 평범한 물건은 감정은 가능하지만 내력이 보이는 일이 거의 없다.
제이든의 경우에도 내력을 볼 수 있었던 건 장인이 혼을 담은 명품의 경우에만 가능했다.
혹시라도 잘못 봤을까 싶어 그릇에 다시 집중해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내가 볼 수 있었다면 칼리스타가 먼저 봤겠지.
제이든이 너무 힘을 줘서 시큰거리는 눈두덩을 손등으로 비비는데 포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포이이.”
토끼가 귀를 뒤로 젖히고 일어서더니 그릇이 든 유리 상자를 향해 앞발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