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1화
27. 깨어나지 않는 제자(1)
-그만 좀 닦아. 발 껍질 벗겨지겠어.
아실리가 제이든의 손에서 앞발을 잡아빼면서 투덜거렸지만 제이든은 아실리의 앞발을 고쳐 잡고 젖은 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한 방울만 삼켜도 즉사라는데, 넌 사람보다 몸이 더 작잖아. 혀끝에만 닿아도 죽을 수 있어. 털끝에 약 가루라도 남아 있으면 어떡해?”
“포잇, 포잇!”
포이가 옆에서 제이든의 말이 맞다는 듯이 조그만 머리를 헤드뱅잉하듯 힘껏 끄덕였다.
-어제도 닦고, 오늘도 닦고, 털 다 빠지겠네.
아실리는 한숨을 쉬면서도 포이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고는 순순히 제이든에게 발을 맡겼다.
“자, 설마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건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 마를 때까지 핥지 마. 칼리스타 님이 그러는데 24시간은 지나야 확실히 안전하다고 했어.”
겨우 제이든이 앞발을 놓아 주자 아실리는 무심코 그 앞발을 입에 가져가 핥으려고 했다.
제이든이 흠칫 놀라며 손을 내젓자 아실리는 입에 다 가져갔던 앞발을 내려놓고 다른 쪽 앞발로 발등을 꼭 눌렀다.
-아이, 진짜! 고양이가 앞발 그루밍을 참아야 하다니 마약 끊는 것만큼 어렵네!
전날 저녁부터 앞발 핥기를 금지당한 아실리는 금단 현상을 보이며 털을 세우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위험한 걸 함부로 만지래?”
제이든은 아실리의 머리를 콩 쥐어박을 듯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펴서 머리를 쓰담쓰담 쓸어주었다.
“그래도……, 잘했어. 그 부인 우리 눈앞에서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응, 딸도 아직 어린데 엄마가 죽어 버리면 안 되잖아.
“본인이 마약을 사용하진 않았고 소량이라곤 하지만 재배, 소지, 유통에 다 걸리는 거 아냐? 형이 무거울 텐데.”
-정상 참작이 좀 되지 않을까?
“되면 좋겠다. 그 부인도 딸도 안쓰러워. 수명을 담보로 약을 받았다는 아저씨도 그렇고.”
-셀리나 부인의 선택이 좋은 방법이라곤 할 수 없지만…….
아실리는 말꼬리를 흐렸고 제이든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또 얼마나 있었을까?
내가 그녀와 같은 일을 겪는다면 같은 형태로 복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똑똑, 똑.
“레노아입니다. 칼리스타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레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이 일어서서 문을 열어 주자 레노아가 칼리스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젤리카와 키리안, 중요 가신들과 함께 밤샘 회의를 한다더니 둘 다 눈 밑이 푸르스름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가서 좀 주무시지 않고요.”
“예. 이제 급한 불은 대충 끈 것 같아서 좀 쉬러 갈 참입니다. 그전에 칼리스타 님이 제이든 씨를 좀 만나고 싶다 하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칼리스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기면서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를 향했다.
“자네는 회의에 참석 안 해서 다행이야. 잠도 못 자고 머리가 터질 뻔했다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분간 영주 대리는 안젤리카 영애가 맡기로 했다네.”
“잘됐네요. 그, 저, 셀리나 부인은 어떻게 됩니까?”
제이든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고 칼리스타는 싱긋 웃었다.
“마음씨 고운 감정사로군, 하긴 자네의 용감한 고양이가 구해 준 목숨이니까.”
“냥!”
칼리스타가 아실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자 아실리가 대답하면서 가슴을 폈다.
“그래, 야옹이 네가 사람 하나 살렸다. 아니 딸까지 생각하면 둘을 살린 셈일지도.”
“냥!”
“그런데 야옹이는 발을 잘 씻었나? 그거 조금만 입에 닿아도 이렇게 작은 동물에겐 치명적일 수 있으니 조심하게.”
“예, 물론입니다. 몇 번이나 물을 갈아서 깨끗이 씻겼습니다.”
제이든이 대답하자 아실리는 불만스럽게 냐옹냥냥 울면서 고자질하듯 앞발을 들어 보였다.
-말도 마. 어제 방에 돌아오자마자 비누로 박박 씻고, 밤에 잠도 안 자고 물수건으로 닦고, 오늘 아침에도 또 닦고, 이 발이 지금 벌에 쏘인 것처럼 얼얼해.
사실 제이든은 아실리가 자다가 앞발을 핥지 않도록 양말을 씌우고 고무줄로 묶어 주려고 했는데 아실리의 강력한 거부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아깽이도 아니고 체면이 있지.
칼리스타와 레노아는 아실리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새침하게 고개를 흔드는 아실리의 모습을 보고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고양이는 역시 자존심이지.”
칼리스타가 웃으면서 아실리의 머리를 쓸어 준 뒤 말했다.
“셀리나 부인은 중앙에서 지침이 내려오는 걸 기다릴 때까지는 본인이 쓰던 별관에서 사비나 양과 함께 지내게 했고, 외출만 하지 못할 뿐 일상 생활에는 큰 불편함이 없을 걸세. 원래라면 엄중한 처벌을 받겠지만.”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중벌을 받진 않을 걸세.”
“딸이랑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렇지. 아이는 죄가 없는데 이미 상당히 혼란스러울 테니까.”
반면에 미켈레는 중형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지금은 감금된 상태인데 곧 수도에서 사람이 와서 압송해 갈 모양이었다.
“이미 중독 증상이 심해서 오래 살 것 같진 않더라만.”
칼리스타는 의자에 걸터앉더니 아실리의 등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포이를 주시했다.
“니콜레타 님이 자네를 만나면 아주 흥미로운 친구들을 볼 수 있을 거라 하시더니.”
그녀는 아실리를 보고 다시 포이를 보면서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굉장한 친구를 데리고 있군.”
제이든이 레노아를 쳐다보자 레노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칼리스타는 포이의 본모습을 알아보는 것이다.
하긴 1급 감정사인데 토끼도 감정할 수 있겠지.
“부탁이 있는데, 자네 토끼를 좀 빌릴 수 있을까?”
“예?”
제이든의 음성이 높아지자 칼리스타가 얼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아니, 물건처럼 빌리자는 말은 아니고!”
“?”
“가까운 곳에 내 제자가 잠들어 있는 시설이 있네. 그 아이를 깨워 보려고 내가 안 써 본 방법이 없어. 그런데 여기 행운을 가져온다는 전설의 포에니 토끼가 있으니……, 어떤가, 자네가 토끼를 데리고 내 제자를 한번 방문해 줄 수 있을까?”
암사자처럼 당당하던 칼리스타의 목소리가 아픈 새끼를 가진 어미 사자처럼 부드럽게 낮아졌다.
“포에니 토끼 덕분에 내 제자가 깨어난다거나 하는 기적을 기대하는 건 아니야. 단지……, 가능하다면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아 보려는 마음이랄까?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그 아이에게 토끼가 가진 행운의 한 조각, 아니 부스러기 조금이라도 흘려 줘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일세.”
목소리에 가득 배어나오는 간절함에 제이든은 저절로 마음이 움직였다.
자식도 아니고 제자인데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아끼다니.
그가 아실리와 포이를 돌아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뒷발로 일어서 있던 포이가 귀를 까닥까닥 움직였다. 마음이 내키는 모양이었다.
-뭐, 괜찮지 않겠어? 칼리스타 클론은 세시온이 눈여겨보던 감정사니까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아실리가 자꾸 올라오려고 하는 오른쪽 앞발을 꼬리로 감으면서 새침하게 야웅거렸다.
-그리고 마탑에서 특별히 만들었다는 그 보호 시설은, 나도 말로만 들었지 못 본 곳이라 한번 보고 싶기도 해.
제이든이 마음을 정하고 칼리스타에게 대답했다.
“예.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 애들을 데리고 같이 가보겠습니다.”
칼리스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맙군.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아침 먹고 출발하면 그다음 날 오후가 되기 전에 도착할 걸세.”
벽 쪽에 서 있던 레노아가 하품을 했다. 항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레노아지만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어서 가서 좀 자거라. 나도 좀 자야겠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스타가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녀가 손을 펴자 손안에서 보랏빛 열매 몇 개가 공중으로 떠올라서 제이든 쪽으로 비눗방울처럼 동동 떠 왔다.
“포잇! 포잇!”
포이가 보랏빛 열매를 붙잡으려고 깡충깡충 뛰었다.
“라벤더베리네요? 이 계절에 싱싱한 라벤더베리가 있다니?”
“레노아 말을 들으니 자네 고양이랑 토끼가 라벤더베리를 좋아한다면서? 뇌물이라네.”
칼리스타는 웃으면서 레노아와 함께 문밖으로 나갔다.
“신기하네. 얼린 거라면 모르지만 보관을 어떻게 했기에 이 겨울에 싱싱한 라벤더베리가 있지?”
공중에 떠 있는 라벤더베리를 하나 잡아든 제이든이 이리저리 돌리면서 살펴보았다.
“진짜 라벤더베리야.”
-1급 감정사쯤 되면 마법에도 꽤 능할 테니까 무슨 수를 썼겠지.
아실리가 사뿐 뛰어올라 동동 떠가는 라벤더베리 하나를 낚아챘다.
“포잉!”
라벤더베리를 쫓아 팔짝팔짝 뛰던 포이도 마침내 하나를 붙잡았다.
포이가 만족스럽게 라벤더베리를 깨물자 새콤달콤한 베리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졌다.
* * *
“레노아 양은 같이 안 가나요?”
“응, 아직 영주관이 어수선하고 수도의 연락도 받아야 하는데 나와 레노아가 둘 다 자리를 비우기는 좀 어렵지.”
“말은 제가 모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날씨도 추운데.”
“오, 노인 우대인가? 하지만 자넨 길을 모르잖아.”
칼리스타는 썰매의 마부석에 훌쩍 뛰어오르면서 제이든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툭 두드렸다.
‘보기보다 연세가 많으시다던데.’
레노아에게 칼리스타의 나이를 귀띔받은 제이든은 깜짝 놀랐었다.
겉보기에는 오십 대 후반이나 많이 봐야 육십 대 초반처럼 보이는 칼리스타가 실제로는 칠십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안 보이는데, 게다가 저렇게 강인해 보이시는 분이……. 싸우면 제가 두드려 맞을 것 같은데 연세가 그렇게 되셨나요?”
“예. 그렇지만 모르는 척하세요.”
“예에…….”
“실제로 신체 나이는 오십 대도 안 되실 거예요. 원래 1급 감정사쯤 되고 나면 신체적 나이를 잘 먹지 않는데 칼리스타 님은 젊어서부터 몸을 단련하신 분이라.”
그렇다고는 해도 이 한겨울에 칠십 노인이 모는 썰매를 편하게 뒤에서 타고 가려니 여간 황송스러운 게 아니었다.
마부를 데려가면 편하겠지만 오레스 아켈리오를 보호 중인 마탑의 시설이 외부인을 데려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저도 외부인이잖습니까?”
“자네는 내 손님이니까 다르지.”
이번에 탄 썰매는 지구에서 흔히 산타클로스의 썰매라고 불리는 휘어진 곡선의 커다란 썰매였다. 그 위에 서부 마차처럼 포장을 두를 수 있게 되어 있다.
눈길을 달려가는 썰매 위로 겨울바람이 휘파람처럼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포이, 춥지 않아? 담요 안 덮어도 돼?”
“피이잉.”
포니가 선물해 준 빨간 외투를 입은 포이는 썰매의 가장자리에 뒷발로 서서 바깥 구경을 했지만 아실리는 담요를 덮고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이 난로 성능이 아주 좋네.
“그러게.”
제이든과 칼리스타가 제자를 보러 간다는 말을 들은 안젤리카가 난로를 보내 주었다.
타원형의 작은 베개처럼 생겼는데 안에 화염의 마석이 들어 있어서 담요 안에 넣고 있으면 금방 후끈후끈할 정도로 따뜻해졌다.
마부석의 칼리스타도 무릎에 하나 놓고 있지만 아실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옛날엔 이런 거 없었는데.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
하루하고도 반나절 썰매를 달린 후, 썰매는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한적한 호숫가에 도달했다.
근처에는 인가가 전혀 없었는데 칼리스타는 호숫가의 숲에 썰매를 세웠다.
“자, 이제 다 왔네.”
시설이라고 해서 막연히 요양소나 병원 같은 곳을 생각하고 있던 제이든은 어리둥절했다.
주변에 건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꽁꽁 얼어붙어서 한낮의 태양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광대한 호수와 흰 자작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는 숲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