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90화
26. 셀리나의 고백(3)
영주의 성에 들어와 별관 하나를 통째로 처소로 받고 화려한 옷에 좋은 음식, 온갖 선물 공세를 받았지만 셀리나의 마음은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영주관에 들어온 것은 오직 복수를 위해서였으므로.
미켈레의 마음을 빼앗은 뒤 파비오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미켈레에게 애교를 떨거나 요염하게 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력을 한다고 그런 연기를 잘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었던 것이다.
밝고 순진하고 명랑하던 셀리나는 파비오와 함께 죽어 버렸고 마음속에 복수심을 품은 차갑고 건조한 여자만이 남았다.
하지만 미켈레는 셀리나의 그런 면에 더 홀렸는지 셀리나의 마음을 얻으려고 기를 썼다.
영주관에 들어온 직후 그녀의 임신 소식이 있자 그는 더욱 뛸 듯이 기뻐했다.
셀리나는 아이가 미켈레의 아이가 아니고 파비오와 마지막 헤어지던 날, 단 하루 함께한 날 밤에 생긴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겼다고 기뻐하는 미켈레에게 그것을 고백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를 한껏 기뻐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었다가 언젠가 때가 되면 한순간에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고 싶었다.
단지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었다.
엄마를 닮은 딸이 태어났고 미켈레는 공공연히 사비나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언하곤 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면서 셀리나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아이가 미켈레의 딸로서 정체성을 굳히고 부녀간의 정을 붙이기 전에 복수를 완성해야 할 텐데 복수의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성에 들어올 때는 틈을 보아 미켈레를 죽이고 함께 죽는 것을 생각했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복수를 하고 파비오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있었고 섣부르게 미켈레를 해쳤을 경우 남겨질 부모님이나 어린 동생에게 가해질 후환도 두려웠다.
어떻게든 후환 없이 복수를 해야 할 텐데.
그러던 어느 날, 사비나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친정 아버지의 병이 심하다고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다.
미켈레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걸 싫어했으므로 영주관에 들어온 이후 친정 마을에 가 본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기동이 어려울 정도로 위중하다는 말에 마지못해 내보내 주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친정에서 그녀는 문병을 빙자해 찾아온 파비오의 아버지를 만났다.
겨우 두 해 만에 알아보기 힘들 만큼 폭삭 늙어버린 파비오의 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다들 네가 부와 권력에 굴복해서 영주의 첩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부부는 믿지 않는다. 너와 파비오 사이가 어땠는지는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셀리나, 파비오의 목숨값을 받아낼 의향이 있느냐? 만약 네가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그렇다면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행복을 빌어 주마.”
셀리나는 맹세의 표시로 그의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대었다.
“아저씨, 어떤 것이든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는 산간 지역의 주술사에게 얻어 왔다는 필레니아의 즙을 그녀에게 주었다.
“내 수명의 10년을 대가로 얻어 온 약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약이고 맛도 냄새도 없는 데다 즉시 효과를 보는 독약이 아니라 서서히 생명을 깎아 먹는 마약이니 알아보는 자는 없을 거야. 이 약을 먹기 시작하면 약을 제공한 자에게 심신이 종속된다고 하더라. 셀리나, 부디 파비오의 원수를 갚아다오.”
셀리나는 영주관에 돌아와 몸에 좋은 약초를 달인 약차에 필레니아의 즙을 몇 방울 타서 미켈레에게 권했다.
“이번에 친정 마을에 갔을 때 구해 온 약차입니다. 굉장히 귀한 것이라 대공께서 주신 진주 목걸이를 주고 바꿔 왔답니다. 불면증을 없애 주고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니 한번 드셔 보시지요.”
미켈레가 셀리나에게 홀딱 빠져 있기는 해도 처음 보는 데다 뭔지 모르는 약차를 애첩이 준다고 해서 그냥 마실 정도의 호인은 아니었다.
그는 주치의를 불러 약차의 성분을 검사해 보고 해로운 물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셨다.
일단 한번 마신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잠도 잘 오고 피로도 쉽게 회복된다고 느끼게 된 미켈레는 약차를 자주 찾았다.
“이젠 없어요. 지난번에 가져온 차를 모두 마셨습니다.”
미켈레는 셀리나의 고향 마을에 사람을 보내 약차를 구해 오도록 했다.
하지만 필레니아의 즙이 들어가지 않은 약차는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고 미켈레는 금단 현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셀리나, 어떻게든 그때 그 약차를 다시 구할 수 없을까?”
“효과는 좋지만 중독 증상이 생기는 것 같은데 그만 드시는 게 어떨까요?”
셀리나는 짐짓 미켈레를 말렸지만 미켈레는 그럴수록 차를 구해 달라고 더 매달렸다.
“중독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어떻게든 그 약차를 좀 구해 와.”
그때쯤 파비오의 아버지가 셀리나에게 사람을 보냈다.
산간 지방에서 필레니아를 재배하다가 즙으로 가공하는 법을 알아낸 사람이라고 했다.
“이 약초 뿌리로 낸 즙을 약차에 타서 드시면 된다고 합니다.”
“셀리나, 나의 천사, 그대야말로 내 구원의 여신이야.”
“그런데, 굉장히 비싸요.”
“괜찮아. 그자를 소개해 줘.”
“혹시 중독이라도 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신경 쓸 거 없어.”
미켈레는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에게 필레니아의 즙을 조금씩 사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결국 그에게 거액을 주고 필레니아의 묘목을 사들이고 재배 방법을 배운 뒤 셀리나의 별관 구석에 필레니아를 재배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필레니아는 겉보기에는 흔한 들꽃 같아서 꽃이며 식물들과 섞어 심어 놓으면 누가 봐도 그냥 화단 같았다.
미켈레는 필레니아를 직접 사용할 뿐 아니라 재배해서 즙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이웃 영지에 퍼뜨릴 셈이었다.
그동안 영지의 사업에서 손해를 많이 봤기에 만회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위험하긴 해도 마약 유통만큼 큰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없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필레니아 재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지요. 산에서 키우지 않은 필레니아는 마약 효과가 있는 즙을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물론 그것은 셀리나가 손을 썼기 때문이기도 했다.
필레니아를 마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마법 처리를 한 비료가 필요했는데 미켈레는 그 비료를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셀리나는 그 비료를 갖고 있었지만 소량만을 사용해서 미켈레가 혼자 쓸 정도의 필레니아만 만들어지도록 조절했다.
미켈레는 점점 피폐해져 갔고 판단력이 떨어졌으며 감정적으로 불안해져서 희로애락의 기복이 심해졌다.
몸에는 부종이 생기고 얼굴빛과 입술 색이 어둡게 변색했다.
의사들은 모두 실레시온씨 병이라고 진단했고, 셀리나는 짐짓 필레니아를 끊어 보면 어떠냐고 간언했지만 미켈레는 필레니아를 끊지 못했다.
손대는 사업은 족족 실패했고 선대의 좋은 평판은 점점 더 망가져 갔다.
선대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손을 댔지만 성공하는 것은 없었고, 탄탄하던 영지의 살림은 점점 부실해졌다.
무너져가는 미켈레를 셀리나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직 그의 파멸만을 기다리며 그가 어떤 일을 하든 방관자처럼 바라보던 셀리나도 미켈레가 안젤리카를 엘로이드의 영주와 혼인시킬 생각을 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엘로이드라고요? 그 영주는 부인이 벌써 두 번이나 죽지 않았나요? 첩도 두셋 있다고 들었고 나이도 마흔 중반이 넘었을 텐데? 안젤리카 아가씨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인데요.”
“열여덟 살이면 다 컸지. 이제 밥값을 해야지. 엘로이드의 영주가 안젤리카와 결혼할 수 있다면 지참금도 필요 없고 대신 콜레디오바에 자금 후원을 해주겠다고 했어.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미켈레는 탁하고 차가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생긴 데다 똑똑하기까지 하단 말야. 괜히 중신 가문이나 이웃 영주들 가문에서 탐내면 곤란해져. 남편을 등에 업고 내정 간섭이라도 하게 되면 만만찮을 거야. 엘로이드의 영주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 자금 후원을 두둑이 받고 치워버리면 일석이조지.”
“하지만 동생인데…….”
“안젤리카도 안드레아도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 키워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안드레아 녀석은 사제가 된다 하지 않았으면 살려두지도 않았을걸.”
유배를 간 뒤로도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불안에 떨던 어린 안드레아는 결국 사제의 길을 택했다.
수도원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한 뒤에야 그는 비교적 마음 편히 살 수 있었다.
“안젤리카 아가씨나 안드레아 공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저는 더 마음을 굳혔습니다. 친형제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면 없애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가 대공이 된 후 콜레디오바 영지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을 거예요.”
그녀는 미리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안톤 사제의 서면 증언이 있습니다. 저는 파비오 레노의 사망에 대해 재조사를 요청합니다.”
칼리스타가 서류를 받아 훑어보았다.
“후계자 책봉식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테니 책봉식 후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터뜨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감정사님이 상자를 알아봐 주시는 바람에 일이 너무 잘 풀렸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이든에게까지 인사를 하고 난 셀리나는 잠시 눈을 들어 이미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약을 유통한 죄가 얼마나 큰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지한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미켈레 대공에게 약을 쓴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사비나가 어미의 죄를 함께 받지 않도록, 성을 나가서 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거의 무릎을 꿇듯이 몸을 숙인 채 말했다.
“저는 기꺼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순간 아실리가 캬옹 울면서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아실리, 왜 그래?”
제이든이 벌떡 일어섰지만 그보다 먼저 칼리스타가 번개처럼 빠르게 셀리나의 팔을 붙잡았다.
셀리나는 다른 손으로 바닥에 떨어뜨린 뭔가를 급히 주우려고 했지만 그 뭔가는 이미 아실리가 앞발로 꽉 누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마시오!”
그녀가 셀리나를 일으켜 한쪽으로 비키게 하자 레노아가 손수건을 들고 아실리의 옆에 앉았다.
아실리가 앞발을 들자 초록색 약초를 뭉친 환 같은 것이 있었다.
손수건으로 환을 감싼 레노아가 살짝 냄새를 맡았다.
“이거 미망인의 꽃입니다.”
‘미망인의 꽃’이란 강력한 독성을 지닌 독초 아트로피네 사이안의 별명이다. 안개꽃과 비슷한 형태의 조그만 보랏빛 꽃이 피는 독초인데 잎과 열매에 강력한 독성이 있다. 섭취하게 되면 온몸에 붉은 꽃 모양의 반점이 퍼지면서 몇 분 내에 사망한다.
셀리나의 뺨에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파비오의 곁으로 가서 속죄하려고.”
“아이는 어쩌려고, 죽으면 끝인 줄 아시오?”
칼리스타가 날카롭게 나무랐다.
“지금 당신 딸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두려울지 생각해 봤소? 죽어서 도망치는 거야말로 가장 쉽고 비겁한 일이오. 가서 딸을 지키시오.”
그녀는 시녀 몇 명을 불러 셀리나를 데리고 가게 하면서 단단히 일렀다.
“혼자 두지 말고, 절대 눈을 떼지 말게.”
칼리스타가 다시 방 안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건으로 고양이의 발을 닦고 있는 청년을 보았다.
“실리, 어쩌자고 그런 걸 함부로 만져! 하루에 앞발 백 번도 넘게 핥으면서 겁도 없이!”
“포잇!”
“너 이따 씻을 때까지 절대 발 핥지 마!”
“포잇!”
방 안에는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거나 머리를 흔들며 엄숙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는데, 그 앞에서 고양이의 발을 닦으며 잔소리를 하는 제이든과 옆에서 뒷발을 탕탕 치며 맞장구를 치고 있는 토끼의 모습은 마치 그 부분만 다른 세상에서 따 온 것처럼 동떨어져 보였다.
칼리스타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갑자기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잘했다. 야옹아.”
그녀가 칭찬하자 아실리는 아직도 잔소리 중인 제이든에게 앞발을 맡긴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답하듯 야옹 울었다.
칼리스타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탁자에 앉았다.
“자, 미켈레 콜레디오바의 필레니아 소지 및 사용에 대해서는 셀리나 부인이 증언했고 유통 경로 및 증거품도 제출했소. 콜레디오바의 내부인 외에 감정사 칼리스타 클론과 감정사 제이든 로스, 문관국 마법유물부의 레노아 데메스가 증언에 입회했고.”
칼리스타는 말을 이었다.
“파비오 레노의 살인 교사에 대해서는 당시 군종 사제였던 안톤 사제가 서면으로 증언을 제출했고 셀리나 부인이 재수사를 요청했소. 나 칼리스타 클론은 오늘 책봉식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황궁과 카이에른 치안국, 마관국으로 보낼 예정이오. 이의 있으신 분?”
시미타를 포함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