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9화
26. 셀리나의 고백(2)
천하의 칼리스타 클론도 셀리나의 말을 듣고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부인이 필레니아를 미켈레 대공에게 제공했단 말이오?”
“예. 처벌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셀리나,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입 다물어!”
미켈레가 소리쳤지만 셀리나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칼리스타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음,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군. 일단 여기 정리부터 좀 하고.”
* * *
난장판이 된 책봉식을 정리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안젤리카와 키리안이 가신들 중 책임 있는 중신들을 모아 뒷정리를 할 동안 제이든은 방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칼리스타 클론이 왔다고?
초록색 눈을 커다랗게 뜬 아실리가 제이든의 옷소매를 당겼다.
“응, 기백이 대단한 분이시던데!”
아실리가 야오옹 울면서 앞발을 핥았다.
-어릴 때 두어 번 봤는데 그때부터 남다르긴 했어. 이쪽으로 올 때 혹시 칼리스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 만날 줄은 몰랐네.
“니콜레타 님과 친분이 있나 봐. 레노아 양이 연락을 했다던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람이라 연락한다고 해도 날짜 맞추기 어려웠을 텐데 용케 시간이 맞았나 보네. 그 사람 제자가 이 근처 시설에 있어서 그래도 이쪽 지방에 많이 머무는 편이지만.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응. 오레스 아켈리오? 1급 감정사의 문턱에서 주화입마……, 아니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고 그랬지?”
-맞아.
제이든은 아실리의 등을 쓸어 주면서 포이의 눈치를 봤다.
토끼는 동그란 등과 꼬리를 제이든 쪽으로 향한 채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포이, 아직도 삐친 거야?”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붙어 있는 솜뭉치 같은 꼬리가 콧방귀를 뀌듯이 팽 흔들렸다.
“포이 원래 사람 많은 데 싫어하잖아, 그래서 안 데려간 거야.”
낯을 가려서 낯선 사람이 있으면 밖에 나가지도 않으려 하던 토끼는 언제부터인지 낯가림도 줄고 나가는 걸 좋아하게 되더니 제이든이 책봉식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토라져 있었다.
-한나절 넘게 제이든과 떨어져 있어서 속상했나 봐.
“전에 세렌토에서도 떨어져 있었던 적 있는데 그땐 괜찮았잖아?”
-그때는 포니가 있었으니까. 오늘은 우리 둘이만 방에 있어서 답답했나 봐.
우리 포이, 많이 컸네. 언제는 아실리만 있으면 되는 것 같더니만.
그동안 포이에게 자신이 그만큼 큰 존재가 된 것 같아 제이든은 은근히 기뻤다.
“포이, 이제 기분 풀어, 자, 우리 간식이라도 좀 먹을까?”
“포잉?”
간식 소리를 듣자 포이가 토실토실한 어깨 너머로 머리를 돌리면서 제이든을 옆눈으로 쳐다봤다.
“이거 봐, 이제 몇 개 안 남았네. 포이 안 먹으면 그냥 형이 먹어 버릴까?”
“피잇!”
마법 배낭 속에서 꺼낸 건 봉지에 담은 라벤더베리 빙과였다.
세렌토 영주관의 주방장이 솜씨를 부린 겨울 과자인데 늦가을에 딴 라벤더베리에 설탕 시럽을 묻혀 얼려서 빙과로 만들어 보관한 거였다.
원래 라벤더베리를 엄청 좋아하는 포이가 세렌토에서 먹어 보고 눈에서 별이 튀어나올 듯이 좋아하는 걸 보고 디안느 영애가 얼음을 채운 상자에 넣어 한 상자를 주었다.
니콜레타의 마법 배낭을 시험해 보자 얼음 상자보다 더 보관이 잘 되기에 세렌토를 떠날 때 커다란 봉지로 하나 가득 담아 왔는데 포이가 매일 한두 개씩 까먹어서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봉지를 찢자 달착지근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우훔, 맛있는 냄새다.”
“포오잉!”
제이든이 라벤더베리를 꿴 꼬치를 들고 맛을 보자 포이가 얼른 돌아서더니 깡충 뛰어와 제이든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린 포이가 꼬치를 든 제이든의 손목에 머리를 콩 박았고 제이든이 안아 주자 마지못한 듯이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우리 포이는 정말 라벤더베리를 좋아하네.”
이렇게 차가운 과자는 여름에 먹는 게 제격이겠지만 겨울에 먹는 것도 또 색다른 맛이 있다.
제이든과 포이가 빙과를 하나씩 먹고 좀 쉬고 있으려니 레노아가 직접 부르러 왔다.
“셀리나 부인의 진술을 들을 준비가 다 되었으니 참관하러 가시죠.”
“포이이…….”
제이든이 몸을 일으키자 포이가 얼른 제이든의 바짓자락을 잡아당겼다.
분홍색 코가 발름거리면서 양 뺨이 뾰로통해지는 걸 보고 제이든이 난처하게 머리를 긁었다.
“오늘 너무 오래 떼어놨더니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데, 어쩌죠? 심각한 자리일 텐데 저는 참관을 빠질까요? 제가 도움이 될 자리도 아닌 듯하고.”
“삐이잉.”
같이 가고 싶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는 포이를 보면서 레노아가 웃었다.
“같이 가시죠. 칼리스타 님은 별말씀 안 하실 겁니다.”
“정말요? 엄격해 보이시던데…….”
“어쩌면 더 좋아하실지도 모릅니다.”
레노아의 말이 끝나자 아실리가 냉큼 일어나 제이든의 옆에 따라붙었다.
포이처럼 어리광은 안 부렸지만 내심 같이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실리, 포이한테 같이 가자고 떼 쓰라고 네가 시킨 거 아니야?”
제이든이 포이를 어깨에 올려 놓으며 아실리에게 속삭이자 아실리는 딴청을 피우면서 냐옹 울었다.
-그럴 리가 있어? 난 포이를 돌봐 주러 같이 가는 거야.
“정말?”
-으응, 칼리스타도 한번 보고 싶고 그 필 뭐라는 마약 얘기도 궁금하긴 해.
“그럼 그렇지.”
제이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자 아실리는 새침하게 코를 울렸다.
-고양이가 호기심이 많은 건 타고난 거야. 그리고 너 혼자 보내면 안심도 안 되고.
날이 이미 저물어서 사용인들이 성내의 램프에 불을 켜고 있었다.
천장에는 마석으로 작동한다는 마법등이 걸려 있었지만 벽 쪽에 있는 작은 램프에는 기름을 쓰는지 사용인들이 긴 막대 끝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문 옆이나 복도 모퉁이 등 요소요소에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어수선하고 불안한 분위기가 영주관 전체에 팽배해 있었다.
레노아의 뒤를 따라서 어깨에 토끼를 앉힌 채 고양이와 함께 걸어가는 제이든을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았다.
“원래는 회의실로 쓰이던 방입니다.”
레노아가 안내한 방은 꽤 컸고 커다란 원형 탁자 주위로 열댓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상석에는 안젤리카, 키리안, 안드레아, 대주교, 그리고 칼리스타가 있었고 상자를 보관하던 세 명의 원로를 비롯해 가신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세렌토에 사절로 왔던 미켈레의 측근 시미타의 얼굴도 보였다.
가신들의 얼굴은 대체로 어둡거나 불안해 보였고 특히 시미타의 얼굴은 썩어들어갈 것 같았다.
가짜 상자 때문에 후계자 책봉식이 난장판이 된 데다가 영주가 마약 사용 혐의로 격리되었고 그걸 증언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영주의 애첩이다.
다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혼돈의 도가니가 아닐 수 없었다.
“감정사 제이든 로스 씨 오셨습니다.”
레노아가 제이든을 자리로 안내하며 말하자 안젤리카와 키리안은 눈으로 인사를 보냈으나 몇몇 사람들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아니 저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토끼랑 고양이를 달고 온 게야?”
“그러게요. 콜레디오바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애당초 이 자리가 감정사가 참석할 자리인가요?”
시미타가 먼저 화를 냈고 그 옆의 누군가가 그에게 동조하면서 제이든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제이든 로스 감정사의 참관은 제가 허락, 아니 부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안젤리카 아가씨!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런 자리에 애완동물을 달고 왔겠습니까? 체면이 안 서서 정말!”
안젤리카가 시미타를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콜레디오바에 지금 더 떨어질 체면이 있습니까?”
“…….”
시미타가 목을 움츠리면서 입을 다물었고 칼리스타 클론이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제이든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제이든이 들어올 때부터 아실리와 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제이든 로스가 이 자리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고양이와 토끼를 함께 데려온 것에도 사정이 있겠지.”
칼리스타의 말에 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안젤리카가 이어서 말했다.
“원래 대공비께서 함께 참석하셔야 하겠지만 충격을 받아 자리에 누우셨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제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고 대주교께서 입회하셨어요. 그럼 이제 셀리나 부인을 들여서 진술을 듣겠습니다.”
안쪽 별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셀리나가 걸어 나왔다.
“셀리나 부인, 미켈레 대공이 필레니아를 마약으로 조제해 복용했다는 것을 증언하실 수 있다고 하셨지요?”
“예.”
셀리나가 깊게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긴 자물쇠가 저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 * *
셀리나는 콜레디오바 외곽 지역 작은 포목상의 딸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눈에 띄게 예뻤다.
딸이 너무 고와서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사람이 많다 보니 허영심 많은 성격으로 자랄까 싶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반듯하게 키우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열서너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지방 유지, 부유한 상인, 귀족 집안에서까지 혼담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셀리나가 좋아한 것은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이웃집의 파비오였다.
파비오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지만 파비오는 일찍부터 치유사의 능력을 보여서 당시 명성이 높던 치유사의 제자가 되었다.
양가 어른들도 아이들도 사이가 좋았고, 온화하고 성실한 파비오는 언제나 셀리나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었다.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을 때, 셀리나의 부친은 딸이 큰 부잣집이나 귀족 가문에도 시집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좀 아쉬워했으나 모친은 오히려 기뻐했다.
그녀는 셀리나가 화려하고 도도한 외모와는 달리 소심하고 소박한 성격이라서 큰 가문의 안살림을 맡거나 후원의 암투가 심한 귀족 가문에 들어가면 견디기 힘들 것을 알고 있었다.
파비오라면 항상 셀리나를 아껴 주고 끝까지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사윗감으로 더할 나위 없다고 적극 지지해준 어머니의 비호 아래 셀리나와 파비오는 열여덟 살 때 약혼했다.
파비오가 정식 치유사 자격을 얻고 나면 혼인하기로 했고, 스무 살 때 파비오가 근동에서 가장 젊은 나이로 정식 치유사가 되면서 곧 혼인을 앞두게 되었다.
그런데 그즈음 사냥을 나왔던 미켈레가 셀리나를 보고 말았다.
미켈레는 이미 정비가 있었지만 셀리나를 후비로 들이겠다고 사람을 보냈으나 셀리나는 이미 약혼했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선대 대공과는 달리 폭군이라는 평을 받는 미켈레의 눈에 든 것이 아무래도 불안해 양가에서 혼인을 서두르려는 참에 콜레디오바의 북쪽 경계 지방에 마수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마수 토벌단이 꾸려졌고 치유사로 파비오의 스승과 파비오가 함께 포함되었다.
“걱정하지 마, 셀리나, 치유사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어. 늦어도 두 달이면 돌아올게.”
햇살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남긴 입맞춤이 파비오의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몰랐다.
두 달은커녕 열흘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마수에게 찢긴 파비오의 시체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파비오의 묘에 덮은 흙이 마르기도 전에 대공에게서 또 사람이 왔으나 셀리나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대공의 성격으로 보아 양가에 큰 후환이 있을지 모른다고 가족들은 두려워했고 실제로 알게 모르게 압박이 있었지만 셀리나는 마음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 목도리를 볼 때까지는.
평생 혼인하지 않는 여사제가 될 마음으로 수도원에 교육을 신청한 날, 나이 지긋한 사제 한 명이 그녀를 찾아왔다.
수도원의 수련생이 될 수 있을지 적합성을 확인하기 위한 면담이라고 했다.
그 면담에서 셀리나는 사제가 되기에 적합지 않다고 수도원 입교를 거부당했고, 소식을 들은 미켈레가 또 사람을 보내자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영주관으로 들어왔다.
“역시 얼굴값을 하네. 약혼자 죽자마자 영주의 첩으로 들어간 걸 봐.”
“수도원 들어간다더니 마음이 빨리도 바뀌었네.”
“부귀영화 마다하는 사람 있겠어. 대공이 대공비는 허수아비로 두고 셀리나만 아낀다는데.”
“그런 말 하지 마, 셀리나가 영주의 첩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가족들 모두 편히 살게 두지 않는다고 위협을 받았대.”
“당장 포목 거래 모두 끊길 뻔했다던데.”
“쉿, 거래가 다 뭐야, 파비오의 아버지는 산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했다더군.”
사람들은 저마다 한두 마디씩 뒷말을 했지만 셀리나가 영주의 말을 받아들인 진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면담을 왔던 안톤 사제는 그녀에게 남몰래 찢어진 목도리 하나를 전해주었다.
그녀가 직접 뜨개질해서 파비오가 떠날 때 목에 둘러 보냈던 목도리에는 검붉은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수 토벌단에 종군 사제로 함께 참전했습니다. 당신의 파비오는 불의의 사고로 마수에게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미켈레 대공의 명으로 살해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