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8화
26. 셀리나의 고백(1)
이미 푸르죽죽하던 미켈레의 낯빛이 더 시커멓게 죽었다.
“무, 무슨 소리를!”
카이엔은 기본적으로 각 영지의 자치권이 강해서 후계 문제라면 미켈레가 가짜 상자를 만들어 사람들을 속였다 해도 영지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지 황궁이나 중앙 정부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약이라면 전혀 다른 문제다.
흑마법, 아동 관련 범죄, 그리고 마약은 카이엔에서 가장 강력하게 규제되는 종목이며 처벌 수준 또한 높다.
그런 만큼 마약관리국, 속칭 마관국에서 마약 관련 의심으로 검사를 요청하면 귀족이든 영주든 검사를 거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당신이 뭔데? 감정사라면서?”
미켈레의 부르짖음에 칼리스타가 대답했다.
“마관국의 객원 요원이기도 하지.”
그녀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수석제자가 감정 중 유물의 과거를 보다가 혼수상태에 빠져서 깨어나지 못한 지가 몇 년 되었소. 내가 그 아이의 회복을 위해 약을 구하러 대륙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 알려진 약이건 알려지지 않은 약초건 온갖 약을 다 시험해 보고 연구해 보고 하다 보니 약사는 아니어도 약에 꽤 익숙하게 되었거든.”
1급 감정사의 특성상 많은 약을 오랫동안 보다 보니 감정의 능력이 개발되었다.
“마약 중에는 드물지만 마약 검사에 잘 드러나지 않는 종류도 있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약과 비슷한 효과를 보이는 약초도 있지. 그런 것들을 잘 알아보게 되면서 마관국의 요청으로 객원 요원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레노아를 가리켰다.
“내 제자가 입원해 있는 곳이 이곳과 멀지 않아서 제자를 보러 오는 길에 이 친구의 연락을 받았지. 혹시 가능하면 잠시 들러서 콜레디오바의 상자를 한번 봐 달라고. 상자만 넌지시 보고 가려고 했는데.”
칼리스타는 미켈레를 가리켰다.
“뜻밖에도 대공의 상태가 저 지경일 줄이야!”
사람들의 의심 가득한 웅성거림이 커지자 미켈레가 악을 썼다.
“나, 나는 병일 뿐이야. 건강이 나쁠 뿐인데 마약이라니!”
“정말 그럴까?”
칼리스타가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물론이지, 만약 검사를 해서 마약의 흔적이 나오지 않으면 당신이 책임질 건가?”
미켈레가 지지 않겠다는 듯 칼리스타를 마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셀리나 부인이 단상 위에서 일어났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셀리나는 미켈레가 아니라 칼리스타 쪽을 보고 물었다.
칼리스타는 한쪽에 비켜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비나를 보고는 셀리나 부인을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어린애가 봐서 괜찮은 풍경이 아닌데 우리 생각이 짧았군, 어서 데려가시오.”
셀리나는 미켈레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단상에서 내려오더니 사비나의 손을 잡고 성 안쪽으로 통하는 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느라 잠시 팽팽한 긴장 상태가 깨어졌을 때 객석 쪽에서 누군가 칼리스타를 불렀다.
“저, 감정사님.”
“음?”
일반 가신들이 앉은 객석 쪽에서 일어난 사람은 안경을 쓴 중년 남자였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콜레디오바 가문의 주치의 루치아노입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시작했다.
“최근 몇 해 동안 대공의 건강이 계속 나빠지고 있어 저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대공의 상태가 정상은 아닙니다. 증상으로 볼 때 실레시온씨 병을 의심하여 약을 써 봤지만 상태가 좋아지지 않고 감정적 변화도 계속 불안정했습니다.”
그는 다시 안경을 치켜올렸다.
“저, 저도 마약을 의심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혈액 검사나 표준 마약 검사인 에스티온 검사를 진행했을 때도 마약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중하지만 뚜렷한 어조로 말했다.
“안색이나 입술 색의 변화, 쉽게 흥분하는 증상 등을 보면 중추신경계 마약의 일종인 키키타를 의심해 볼 수 있겠지만 키키타를 흡입하거나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동공 수축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동공 수축이 일어나지 않는 의료용 마약인 세피데넴을 생각해 봤으나 세피데넴으로는 몸의 부종이나 입술의 변색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약이라기보다는 역시 실레시온씨 병의 변종이 아닐까 하는 게 제 소견입니다.”
“그래, 맞다, 우리 주치의 말이 맞고말고! 이봐라, 이 감정사는 환자를 마약 중독자로 몰려고 하는 파렴치한 자다!”
미켈레가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폈지만 칼리스타는 머리를 흔들었다.
“루치아노 의사의 말은 잘 알겠소. 현재 의사나 치유사로서는 그렇게 판단하는 게 옳겠지만 내 제자 때문에 약초를 연구하다가 알게 된 건데 필레니아라는 약초를 아시오?”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북부 산간 지방에서 불면증 치료제로 쓰이는 약초지요.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 자랄 뿐이고 다른 약재에 비해서 약성이 낮고 효과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쓰이진 않는 것인데요.”
칼리스타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필레니아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의사 양반 견문이 넓으시군. 나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필레니아를 특정한 비료로 응달에서 키우면 잎의 성질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뿌리에 독특한 성질이 생긴다오. 그 뿌리를 즙을 내서 복용하게 되면 중추신경흥분제 역할을 하지.”
그녀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공중에 뾰죽뾰죽하고 가냘픈 잎새에 비해 굵은 뿌리를 가진 약초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사용 시 불면증에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활력과 자신감을 갖게 하고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을 받지만 강력한 중독 증상과 치명적인 부작용을 갖고 있어서 마관국에서 최근 마약으로 분류한 약초라오. 공시가 늦어진 것은 필레니아를 마약으로 가공하는 데 약간의 마법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걸 단순 마약으로 분류해야 할지 흑마법으로 분류해야 할지 의견이 갈리고 있기 때문이오.”
칼리스타는 의사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최근 암암리에 필레니아를 마약으로 유통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마관국에서 주시하고 있는 중인데, 키키타나 세피데넴에 비해서는 탐닉 증상이 약하지만 이것을 선호하는 자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마약이라는 점도 있지만, 필레니아가 혈액 검사나 에스티온 검사에서 추출되지 않기 때문이오. 그리고 동공 수축도 없지.”
그녀는 미켈레 대공 쪽을 힐끗 보았다.
“표준 마약 검사로 검출되지 않고 동공 수축이 없으면서 몸의 부종, 빠른 노화, 판단력 저하, 급격한 감정 변화, 입술의 보라색 변색과 안색의 변화 등을 감안하면 실레시온씨 병으로 보기 쉬운데, 필레니아 중독이 실레시온씨 병과 뚜렷하게 다른 증상이 한 가지 있지.”
칼리스타가 공간을 격해 미켈레를 찌르듯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필레니아 중독자의 귀 뒤쪽에는 흰 반점이 생긴다오. 중독 기간이 길수록 흰 반점이 점점 커져서 귓바퀴까지 모두 희게 물들게 되지. 자, 대공, 당신의 귀는 어떻지?”
미켈레는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귀를 가렸으나 그의 뒤에 있던 키리안과 안젤리카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붙잡고 귀를 확인했다.
“정말 귀 뒤에 흰 반점이 있어요!”
안젤리카가 슬픔과 분노가 섞인 소리로 외쳤다.
“아니야! 아냐! 이이익!”
미켈레는 마치 이성을 잃은 것처럼 흥분해서 손발을 마구 휘둘렀다.
단상 위의 사람들이 놀라서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키리안과 안젤리카는 오히려 그에게 다가들어 팔을 붙잡았다.
“저리 비키지 못해? 안젤리카, 네 수작이지? 거기 감정사, 네년도 감정사라면 상자나 보고 갈 일이지 무슨 간섭이냐? 가만히 둘 줄 알아? 키논! 빨리 이놈들을 쓸어 버려라!”
“대공, 대공, 진정하세요.”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시끄러워, 다들 날 끌어내리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안젤리카, 네가 이런다고 후계자가 바뀔 줄 알아? 키논! 뭘 하느냐?”
영주의 호위대장인 키논은 단상 아래에 창을 짚고 서 있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 제이든을 끌어내려던 병사들도 키논의 눈치만 보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키논, 경거망동하지 말게. 대공이 이미 가짜 상자를 사람들 앞에 내놓았고, 마약 문제가 있다면 후계자가 문제가 아닐세. 영지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큰일이야!”
원로인 제논과 바르톨로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채 일침을 놓았고 키논은 창을 든 채 단상으로 오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키논! 너마저도 매수된 거냐? 이 배은망덕한 놈들! 그까짓 상자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망할 놈, 아무도 모를 거라 하더니!”
대공비와 안젤리카를 비롯해 몇 명의 가신이 달라붙어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미켈레는 흥분한 나머지 눈이 붉어졌고 생각도 거치지 않는 듯 마구 말을 내뱉었다.
제이든이 보기에도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대공을 방으로 모시게.”
“잠깐!”
사람을 불러 미켈레를 방으로 데려가려는 키리안을 멈춰 세운 칼리스타가 미켈레에게 다가갔다.
“아무도 모를 거라 했다고? 그런 말을 한 게 누구지?”
“그, 그 노인, 상자를 만들어 준 골동품상…….”
흥분 상태에 빠진 미켈레가 중얼거렸다.
“골동품상…….”
“아무도 그 상자가 모조품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없을 거라 했는데, 바르톨로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미켈레는 미리 2급 감정사에게 상자를 보여주고 그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안심하고 후계 책봉식을 치르려고 했던 거였다.
“그 노인이 당신에게 필레니아도 알려줬나?”
“아니, 아니야.”
“그럼 필레니아는 어디서 구했나?”
“흥! 필레니아가 뭔지 난 모른다! 귀에 반점이 생긴 정도로 내가 마약을 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겠나? 당신 말뿐이잖아? 아직 검사 방법도 나오지 않은 약초라면서.”
미켈레는 비웃는 듯한 눈길을 칼리스타에게 던졌다.
칼리스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필레니아 복용은 사실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귀의 반점을 지적해서 자백을 받아낼 생각이었는데 미켈레가 끝내 잡아뗀다면 일이 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 노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단단히 세뇌를 해 놓은 것 같군.”
칼리스타가 한숨을 쉬며 미켈레를 데려가라고 손짓을 할 때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대공이 필레니아를 했다는 건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 틈에 장내에 다시 나타나 있었다.
“셀리나 부인?”
아이를 방에 데려다 주고 돌아왔는지 은발의 미녀가 중앙 홀의 문 옆에 서 있다가 천천히 가운데 자리로 나왔다.
제이든은 무심코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얼굴에……, 표정이 생기고 있네?”
셀리나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건조하고 무표정하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한 겹 두르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고 표정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마네킹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 같달까?
“셀리나? 무슨 소리야?”
미켈레가 당혹스럽게 외쳤지만 그녀는 미켈레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똑바로 칼리스타를 향했다.
“그에게 처음 필레니아를 준 사람은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