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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87화 (87/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7화

25. 1급 감정사

“허, 정말 물결 무늬가 있습니다.”

제이든의 손에 있는 상아 조각을 들여다본 원로 가신이 중얼거렸다.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무려 후계자 책봉식이다. 이웃 영지의 귀빈들까지 모셔다 놓은 대규모 행사에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다니!

한동안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던 미켈레가 마침내 목구멍에서 소리를 짜냈다.

“이, 이, 빌어먹을 감정사 놈! 무슨 수작을 부린 게냐?”

“상아의 단면을 보십시오. 셀레우코스 코끼리의 상아인 게 명확한데 잡아떼실 겁니까?”

“시끄럽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빨리 끌어내!”

병사들이 제이든에게 다가서자 아까 제이든에게 귓속말을 했던 원로 가신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그가 미켈레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 이 문제는 확실히 밝히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제논! 자네 저 미친놈의 말을 믿는 건가? 바로 오늘 아침에 자네도 상자를 확인하지 않았나.”

“예. 지금도 제 눈에는 진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감정사가 직접 상자를 쪼개 단면을 보여주고 있잖습니까? 감정에 자신이 없다면 감정사로서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이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네가 미쳤구나. 후환이 두렵지 않으냐? 세루티, 너도 마찬가지 생각이냐?”

미켈레의 지목을 받은 것은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 가신이었다.

처음 제이든이 이의 표명을 했을 때 앞에 나서서 반론을 펼쳤던 백발의 원로는 주춤거리면서 망설이더니 결국 마음을 정했는지 한 손을 치켜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눈을 믿겠소. 상자는 진품이 맞다고 생각되오.”

미켈레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지막 원로를 향해 머리를 휙 돌렸다.

“바르톨로?”

상자를 관리하는 세 명의 원로 중 마지막 사람은 몸집이 작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인이었는데 여태까지 말 한마디 없이 뒤로 빠져 있었다.

미켈레의 재촉을 받은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제논이라 불린 원로의 옆에 나란히 섰다.

말은 없었지만 제논과 뜻을 같이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는 태도였다.

“네놈들이 정말 미쳤구나! 바르톨로! 네 아들도 믿지 못하나?”

바르톨로?

제이든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다 싶더니 리오 바르톨로가 콜레디오바 출신인가.

카이엔 제국에 2급 감정사는 다 합쳐도 열 두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모두 아는데 리오 바르톨로는 얼마 전에 갓 2급이 된 감정사였다.

미켈레가 으르렁거렸다.

“아들이 2급 감정사가 되었다고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더니. 네 아들은 어제 이 상자를 진품으로 감정했다. 네 아들을 믿을 것이냐,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저 떠돌이를 믿을 것이냐?”

그는 가신들이 앉아 있는 좌석 쪽을 향해 고함쳤다.

“감정사 바르톨로, 이리 나와라. 나와서 네 감정을 증명해!”

사람들이 두런거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리오 바르톨로!”

미켈레가 다시 불렀으나 나오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 일어서서 대답했다.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도망쳤네.

누군가 중얼거렸고 제이든이 실쭉 웃자 미켈레가 악을 썼다.

“바르톨로, 빨리 네 아들을 찾아와!”

그러자 노인은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대답했다.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실력이 모자란 걸 인정하고 나갔나 봅니다.”

그는 제이든 쪽으로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아들에게 당신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천재 감정사라고 자기는 따를 수 없다고 했는데.”

“…….”

“그때는 우리 아들이 겸손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알겠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었군요.”

“상아의 단면을 보는 순간 아드님도 이것이 모조품이란 걸 알았을 겁니다.”

상자가 깨지기 전이라면 2급 감정사라도 진품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상아의 단면에 셀레우코스 코끼리의 증거가 명확히 남아 있으니 제대로 된 감정사라면 당연히 이 상자의 수명이 몇 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다.

리오 바르톨로는 미켈레의 압박 속에 상자가 모조품이라는 증언을 하지 않으려고 몸을 피한 게 틀림없었다.

“이익! 아무튼 난 인정할 수 없다!”

미켈레가 흥분 상태에서 외쳤다.

“저자가 2급 감정사라지만 누군가에게 매수된 게 틀림없다. 우리 영지의 감정사는 진품이라고 감정했으니까. 저자를 빨리 끌고 나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그럼, 1급 감정사가 감정한다면요?”

웅성웅성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묻자 미켈레는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흥, 세시온 다미에르가 살아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야 뭐 받아들여야겠지.”

미켈레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좌중을 둘러보는 것이 절대 승복하지 않고 계속 우길 태세였다.

“좋소!”

사람들 사이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누군가 일어섰다.

“누구지?”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웅성거림 속에서 일반 객석의 중간쯤에서 일어난 여자는 두건이 달린 낡은 외투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구부정하게 걸어 나오는 모습이나 두건 언저리로 흩어져 나온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으로 보아 나이든 노파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면서 여자는 점점 더 허리를 곧게 폈다. 마치 앞으로 나올수록 몸이 길어지는 것 같았다.

단상 앞까지 걸어나왔을 때는 이미 걸음걸이도 성큼성큼 힘이 있었고 등과 허리도 쭉 편 채였다. 지팡이는 걷기를 보조한다기보다는 무기처럼 보였다.

여자가 두건을 뒤로 젖히자 사자의 갈기처럼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에 감싸인 이지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오십 대 후반이나 육십 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나이는 들었지만 조금 전까지 노파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강인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의 여자가 서 있었다.

마치 창을 짚고 서듯이 긴 지팡이를 비스듬히 짚고 선 여자가 제이든을 향했다.

“자네, 제이든 로스라고 했지?”

“예? 예.”

제이든이 대답하자 그녀는 싱긋 웃어 보였다.

다소 딱딱하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웃으니까 의외로 표정이 풍부하고 매력적인 얼굴이 되었다.

“세시온 다미에르 이후 최고의 천재라더니, 명불허전이구나.”

“가, 감사합니다.”

제이든은 그녀가 누군지 몰랐지만 일단 그녀의 기백에 눌려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럼 네가 레노아 데메스겠구나?”

“예. 마법유물부에 있습니다.”

레노아는 이미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듯 침착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래, 니콜레타 님은 잘 계시고?”

“예, 무탈하십니다.”

새로운 사람의 난입에 짜증이 난 미켈레가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넌 누구냐?”

“누굴까?”

여자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자 레노아가 좌중을 둘러보며 소개했다.

“미켈레 대공, 그리고 여러분, 칼리스타 클론 님이십니다.”

“헉!”

화들짝 놀라는 제이든을 보며 레노아가 미소 지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1급 감정사이십니다.”

칼리스타 클론이라니,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대륙 전체에 단 세 명밖에 없다는 1급 감정사, 황제가 불러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1급 감정사 중 한 명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칼리스타는 털털하게 레노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단상 위를 올려다봤다.

“자, 대공, 평생 한 번도 겪기 어렵다는 기회가 왔소. 1급 감정사의 감정을 받아볼 기회.”

그녀는 품속에서 1급 감정사만이 받을 수 있는 사각 자격증을 꺼내 미켈레를 향해 흔들었다.

얇은 금속 패에 새겨진 1급 감정사 자격증은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 북부 은빙어의 비늘처럼 오묘한 빛을 뿌렸다.

“황금을 싸들고 와도 받기 어렵지만 마음이 내키면 과자 한 조각을 받고 해주기도 한다는 1급 감정사의 감정!”

칼리스타는 마치 거리의 상인이라도 되는 듯 싱글싱글 웃었지만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암사자가 웃는다면 저렇겠지 싶은 위압감을 느꼈다.

미켈레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디 보자, 이게 문제의 상자로군?”

칼리스타는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자를 주워 올려서 살펴보고는 감탄했다.

“이렇게 잘 만든 모조품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게다가 눈속임 마법도 완벽해. 웬만한 감정사라면 다 속아 넘어가겠는데.”

그녀는 제논에게 벨벳 쿠션을 똑바로 들라고 하더니 상자를 쿠션 위에 다시 올려놓고 레노아를 향해 말했다.

“만든 자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마법 처리를 한 자는 짚이는 자가 있다. 특유의 마법 흔적이 남아 있거든. 니콜레타 님이 보신다면 더 확실히 아시겠지만 아마도 세르지오 아르카니오가 아닐까 싶구나.”

어디서 들은 듯한 이름인데?

제이든이 고개를 갸웃할 때 칼리스타가 지팡이를 들었다.

“아직도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내가 확실하게 보여주마. 자, 상자를 잘 들고 있게.”

보통 마법사들이 들고 다니는 짧은 지팡이와 달리 성인 가슴 높이까지 오는 긴 지팡이를 들어 올린 그녀가 입속으로 뭔가 주문을 외면서 지팡이 머리 부분으로 상자 윗부분에 도형을 그렸다.

지팡이의 궤적을 따라 공중에 금빛 선이 그려졌다.

금빛 선은 마치 상자를 새장에 가두듯이 감싼 채 한동안 빛나더니 차차 빛을 잃고 사라졌다.

“어엇!”

상자를 들고 있던 제논이 깜짝 놀랐다.

“이거, 색이 바뀌었습니다.”

상자의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독특하게 빛나던 유백색이 사라지고 연한 미색으로 바뀌었다.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색이 분명히 달랐다.

“셀레우코스 코끼리의 상아는 원래 이런 색이 나지. 이 상아는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 색처럼 보이게 하려고 마법을 쓴 거야.”

감탄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모조품이긴 했지만 아피오 상아의 독특한 색감만은 마법을 쓰지 않고는 재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제이든도 그걸 꿰뚫어 볼 수는 있었지만 마법을 해제할 수는 없어서 답답했는데 칼리스타는 몇 번의 손짓과 주문만으로 상자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고 원래의 색조가 드러나게 했다.

말로만 듣던 1급 감정사의 위력을 눈으로 보게 되자 감동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나도 감정사로서 꽤 자신만만했었는데, 저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면 얼마나 더 수련을 해야 할까?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구나.’

제이든이 모범적인 감정사답게 자기성찰을 하는 동안 칼리스타는 손을 털더니 세 명의 원로를 향해 말했다.

“자, 이제 이 상자가 진품 콜레디오바의 상자가 아니라는 건 3급 감정사가 와서 봐도 알 테니까 이건 됐고, 미켈레 대공을 좀 격리시켜야겠는데, 이 영지에서 대공이 자기 일을 못 하게 되면 대리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은 누가 있지? 서열이 어떻게 되나?”

세 명의 원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미켈레가 단상 위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나 보다.

“격리라니, 무슨 미친 소리냐? 가짜 상자를 내놓았다고 날 끌어내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음?”

칼리스타는 사자의 갈기를 닮은 머리를 흔들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자 때문에 당신을 격리한다고 누가 그래? 상자는 모조품을 모조품이라고 감정했을 뿐이고, 후계야 누굴 정하든 당신 마음이지, 그런 내정 간섭을 내가 왜 해?”

“그, 그럼 왜?”

그녀의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

“당신을 격리해야 하는 건 당신이 마약을 하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 미켈레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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