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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86화 (8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6화

24. 코끼리의 증거

물결이 이는 듯한 웅성거림 속에서 수백 명의 눈총을 한 몸에 받느라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지만 제이든은 꿋꿋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이게 무슨 망발이야? 네놈, 뭐하는 놈이냐?”

단상 위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미켈레 대공이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제이든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대주교가 대공을 향해 침착하라고 손짓을 해 보이자 미켈레가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도로 앉았고, 겨우 진정한 대주교가 제이든에게 물었다.

“신성한 책봉식에서 이의 표명을 하시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발언하시는 겁니까?”

“예.”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대주교가 장내를 향해 조용히 해달라고 손을 들어 올렸고 옆에서 보좌하던 젊은 사제가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정숙! 정숙해 주십시오. 정숙!”

겨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자 대주교가 말했다.

“후계자 선언에 이의를 표명하신 분이 나왔습니다. 성명과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이름은 제이든 로스, 신분은…….”

지나가던 선비, 아니 지나가던 감정사입니다.

“제이든 로스 씨, 사비나 데 콜레디오바 공녀의 후계 자격에 결격 사유가 있다면 발언해 주십시오.”

여섯 살, 이제 해가 바뀌어 곧 일곱 살이 된다는 사비나 공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어린 공녀를 보며 제이든은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주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비나 공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아는 것도 없는 놈이 왜 방해를 해!”

단상 위에서 노성이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미켈레 대공이 참지 못하고 제이든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딸에 대해 뭘 안다고 자격이 있네 없네 나서는 것이냐? 여행자면 그냥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대주교가 난처한 듯 젊은 사제에게 눈짓을 했고 사제가 재빨리 단상 위에 올라가 미켈레를 진정시키느라 땀을 빼었다.

“공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저 상자 말입니다. 콜레디오바의 상자.”

제이든은 사제가 벨벳 상자 위에 받쳐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2급 감정사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저 상자는 콜레디오바의 상자가 아닙니다.”

장내가 터질 듯이 시끄러워졌다.

“저 미친놈을 끌어내라!”

미켈레가 얼굴이 벌게져서 의자의 팔걸이를 부서져라 두드렸고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느라 장내는 물이 끓는 솥처럼 부글거렸다.

“정숙! 정숙! 조용히 해 주십시오.”

사제들이 목이 터지도록 외친 후 겨우 소란이 좀 가라앉자 대주교가 말했다.

“로스 감정사,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근거를 제시할 수 있나요?”

제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제가 듣기로, 콜레디오바의 선조는 마법왕국 아르카니오 출신이고 이 상자는 아르카니오의 마법사가 그 선조분께 만들어 준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 선조가 아르카니오를 떠난 것이 대륙전쟁 직후라 했으니 이 상자는 적어도 삼백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정확히 307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소.”

원로 가신이 말했고 제이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상자는 정말 훌륭합니다. 아마 웬만한 감정사는 모두 삼백 년 정도 된 상자라고 감정할 겁니다.”

그는 한 호흡 쉬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상자는 사실 만든 지 오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장내가 끓어올랐다.

“믿을 수 없소!”

지팡이를 흔들면서 앞으로 나온 것은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원로 가신이었다.

상자의 관리를 맡은 원로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이 상자를 삼십 년 넘게 보아 왔소. 물론 매일 보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확인하오. 나 혼자가 아니라 셋이 함께 확인하는데! 이 상자가 바뀌었다면 우리 셋 중 한 명도 모를 수가 없소.”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안경을 고쳐 쓰고 상자를 다시 보았다.

“더 볼 것도 없소. 이 상자는 내가 삼십 년을 지켜본 그 상자요. 조금도 다르지 않소.”

그의 뒤를 따라온 또 한 명의 원로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제이든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2급 감정사가 대단한 거야 알지만 아무래도 실수하신 것 같소. 나는 사실 대공이 상자를 바꿔칠까 봐 의심했소. 그래서 책봉식 전에 상자를 꼼꼼히 살폈는데 어떻게 보아도 진품이었소.”

그는 마치 상자가 가짜였기를 바라는 듯 탄식하면서 제이든의 귓가에 대고 모기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영지의 운명을 생각하면 사비나 공녀가 후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이 상자가 가짜라고 말할 순 없소.”

단상 위의 미켈레가 뒤를 휙 돌아보더니 소리쳤다.

“안젤리카, 네 짓이냐? 저놈을 매수한 거냐? 세렌토에서부터 같이 왔다더니!”

그가 안젤리카를 때리려는 듯 팔을 들어 올리자 키리안이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섰다.

“대공, 체통을 지키시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안젤리카가 그를 밀어내면서 대공의 앞에 마주 섰다.

“제가 매수했다면 아까 상자를 확인할 때 가짜라고 말했겠지요. 저도 진품이라고 확인한 걸 잊으셨나요?”

그녀는 단상 아래의 제이든을 내려다보면서 안타까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틀렸을까요? 콜레디오바의 직계 혈통과 저 상자 간에는 유대감이 있어요. 손을 대면 상자에서 빛이 나지요. 제가 오늘 저 상자에 손을 대 봤을 때 예전과 같은 빛이 났어요.”

그녀는 미켈레를 힐끗 보더니 한숨 쉬듯 말했다.

“솔직히 오라버니를 의심한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어요. 하지만 상자를 봤을 때 진품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녀는 조금 망설이면서 덧붙였다.

“제가 어렸을 적 아버님이 저 상자를 열어 보라고 제게 주셨지요. 저는 상자를 열었지만 실수로 상자를 떨어뜨려서 한쪽 귀퉁이에 손톱만 한 흠집이 생겼어요.”

“…….”

“아까 상자를 확인할 때 보니 그 흠집이 그대로 있었어요.”

안젤리카의 발언 후 장내의 소란이 다소 가라앉았으나 제이든은 고집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원래의 콜레디오바 상자를 본 일이 없어서 진품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상자를 만든 상아는 동방 대륙에서 온 겁니다. 셀레우코스 코끼리의 상아입니다. 원래는 아름다운 미색을 띠고 있고 파도처럼 부드럽게 돌출된 물결 무늬가 있습니다. 이 물결 무늬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코끼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아지고 짙어지기 때문에 상아를 보고 코끼리의 나이를 추정하기도 하지요.”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자는 셀레우코스 코끼리 상아의 아름다운 물결 무늬를 정교하게 깎아내서 매끈하게 갈아냈습니다. 그리고 섬세한 약물 처리로 상아 본연의 색조를 없애고 독특한 유백색이 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후 그 위에 조각을 하고 문양을 새겼지요. 왜 그랬을까요?”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어느새 조용해져서 제이든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건 말이죠. 셀레우코스 코끼리가 나타난 지가 오십 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셀레우코스는 오십여 년 전 실리만 코끼리의 변종으로 나타난 돌연변이입니다.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코끼리고 당연히 셀레우코스 상아 역시 없었습니다. 이 상아가 동방으로부터 카이엔에 들어온 시기는 더 짧아서 십여 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

“그러면, 혹시라도 누군가 알아볼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셀레우코스 상아로 이 상자를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셀레우코스 코끼리의 상아가 물결 무늬만 빼면 지금은 멸종하고 없는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와 재질이나 특성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제이든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콜레디오바의 상자를 본 일이 없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상자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그 상자는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는 아주 독특한 질감과 향, 색감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어떤 코끼리의 상아로도 비슷하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오직 셀레우코스 코끼리만이 거의 유사한 상아를 가지고 있지만 셀레우코스의 상아에는 물결 무늬가 있지요. 그래서 이 상자를 만든 사람은 물결 무늬를 지우고 누가 봐도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로 볼 수 있도록 가공한 겁니다.”

“만약 그 상자가 모조품이라면…….”

아까 제이든에게 귓속말을 했던 원로 가신이 망설이면서 말했다.

“왜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지 않은 걸까?”

제이든이 그를 향해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피오 코끼리는 멸종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도 그림에서만 보았습니다만 덩치는 코끼리들 중에서도 가장 큰 종류였지만 아름답고 순해서 길들이기 좋은 코끼리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아피오 코끼리를 사로잡아 길들여서 전투마 대신 썼습니다. 동방 대륙의 옛 포스타루미 전쟁이 코끼리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양국이 모두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검투장에서 사자며 표범과 싸우는 볼거리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을 든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했고요. 검투장에서 이기든 지든 코끼리의 마지막은 결국 죽임을 당하는 걸로 끝났습니다. 상아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는 마구잡이로 남획되어 장신구나 가재도구, 건축물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동방에서 한 마리의 아피오 코끼리도 찾아볼 수 없는 날이 왔지요.”

“…….”

“가공되지 않은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를 구할 수 없게 된 지가 백 년도 넘었습니다. 아마 대륙 전체를 뒤져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이 상자를 만든 사람은 그것과 가장 비슷한 셀레우코스 상아를 구해 셀레우코스 특유의 물결 무늬를 깎아낸 뒤 그 위에 섬세한 마법 처리를 해서 삼백 년 전 아피오 코끼리의 상아로 만든 상자로 보이도록 한 겁니다.”

“…….”

“물론 실력이 뛰어난 명인이 만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법사도 필요했지요. 이 상자를 아주 잘 아는 사람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만들고, 안젤리카 공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눈곱만 한 흠집까지 완벽하게 재현하고, 그 위에 진위를 판별하기 어렵도록 마법 처리까지 했거든요. 누구에게나 진짜처럼 보이도록.”

사람들이 조금씩 미심쩍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미켈레가 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네놈은 그걸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지?”

제이든은 그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저는 2급 감정사니까요.”

미켈레는 보랏빛으로 변색한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마법이 걸려서 진품으로 보이는 거라면 그 마법을 풀 수 있나?”

“안타깝게도 저는 마법을 꿰뚫어 볼 수는 있지만 풀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감정사지 마법사가 아닙니다.”

미켈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더니 레노아를 향했다.

“거기, 마법사 아가씨는?”

레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종류의 마법은 제가 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훨씬 수준이 높은 마법사, 마탑의 스승님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내가 자네들 말을 어떻게 믿지?”

그는 야비한 표정으로 안젤리카를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세렌토에서 왔지. 자네들이 내 친애하는 누이에게 매수되었거나, 아니면 콜레디오바를 노리는 센디니온이나 세렌토에 매수되었을 수도 있지 않나?”

“2급 감정사의 명예를 걸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황궁 감정소나 마탑에 이 상자를 보내서 감정을 받아 보시죠.”

제이든이 발끈했으나 미켈레는 팔짱을 끼고 턱을 쳐들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 영지에도 2급 감정사가 한 명 있거든. 삼백 년을 내려온 가보이고 우리 모두가 진품이라고 인정했는데 한낱 지나가는 감정사의 말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

그는 벽 쪽에 줄을 지어 서 있는 병사들에게 턱짓을 했다,

“이자들을 끌고 가라. 증거도 없이 허황된 말로 후계 책봉식에 소란을 일으킨 자들이다.”

그는 제이든을 노려보았다.

“원래 광장에서 참수해도 시원치 않지만 세렌토 영애의 위임장을 가지고 왔으니 목숨은 붙여 주마. 이자들을 영지 밖으로 내쫓고 다시는 콜레디오바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라!”

“오라버니!”

안젤리카가 소리쳤지만 무장한 병사가 다가와서 제이든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때 제이든이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벨벳 위의 상자를 집어들어 바닥에 힘껏 패대기쳤다.

“미쳤나, 자네?”

상자를 들고 있던 사제가 비명을 질렀고 미켈레가 부들부들 떨며 고함을 쳤다.

“이, 이, 무도한 놈이, 내 네놈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

병사가 제이든을 후려쳤지만 제이든은 막을 생각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상자에만 집중했다.

대리석 바닥에 온 힘을 다해 내던졌는데도 상자는 열리지 않았지만 뚜껑 한쪽 모서리가 깨져서 세모꼴로 떨어져 나왔다.

제이든이 크게 숨을 내쉬면서 그 조각을 집어들더니 높이 쳐들었다.

“보십시오.”

그는 깨져 나간 조각의 단면을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물결 무늬가 보이죠? 셀레우코스 코끼리의 상아는 그 안쪽에도 물결 무늬가 있습니다. 겉면의 물결 무늬를 깎아내고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처리했지만 안쪽의 물결 무늬까지는 없애지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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