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85화 (8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5화

23. 어떤 인연(10)

데메티스가 데려온 병력에는 군의관과 치유사도 한 명씩 섞여 있었다.

부상자를 점검하고, 다이스가 보낸 자객들 중 살아남은 자들을 추리고,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을 정하고, 키리안이 니코스, 데메티스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뒤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여간 똑 부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센디니온 공자의 외모가 온화해 보여서 다소 유약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당히 야무지네요.”

“그러게요. 안젤리카 아가씨가 신랑은 잘 고르신 것 같습니다.”

레노아의 말에 대답하는 오스틴은 마치 자기 딸이나 누이동생이 골라온 신랑감이기라도 한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키리안을 지켜보았다.

그 후의 여정에는 별 탈이 없었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고 심심찮게 눈이 오기는 했으나 더 이상 일행을 방해하는 세력은 없었고, 데메티스가 이끌고 온 병사들이 썰매를 호위하는 가운데 일행은 보무당당하게 콜레디오바 영지에 접어들 수 있었다.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영지의 경계선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콜레디오바의 관리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세렌토의 행렬에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출발할 때는 수행원이 열 명 안쪽이었다고 들었는데…….”

산을 넘어오는 동안 십여 명이 더 불어서 서른 명에 가까운 행렬이 된 세렌토의 일행을 보며 관리는 위압감을 느끼는 듯했다.

“콜레디오바 공녀와 센디니온 공자의 행렬인데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스틴 경의 말에 당황하던 관리는 곧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몸을 한껏 낮추었다.

“그렇지요. 기쁜 일입니다. 기쁜 일이고말고요, 공자님과 공녀님께 축하드립니다. 제가 예전에 선대 대공께서 계실 적에 연말 보고를 올리러 영주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가씨를 뵌 적이 있는데 벌써 이렇게 장성하셔서 혼인을 다 하시고…….”

관리는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레스틴의 눈치를 보았다.

천덕꾸러기였던 공녀가 센디니온과 혼례를 치르고 세렌토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듯한 게 아무래도 정권의 판도가 바뀔 것 같으니 일단 잘 보여두자 싶은 태도였다.

“자, 자, 며칠이나 산을 넘어오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푹 쉬시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지요. 이틀이면 영주관에 도착하니 후계 책봉식에 늦지는 않으실 겁니다. 준비된 숙소가 협소하니 수행원들의 숙소를 다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두 시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두어 시간 후 준비된 숙소에 안내받은 제이든 일행은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식사를 마친 후 편안한 잠자리에서 쉴 수 있었다.

“자, 수행원들은 여기 머물게 하시고 공자님과 공녀님은 제 사택에 머무시지요.”

관리가 손을 비비며 권했지만 키리안과 안젤리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머물겠다고 함께 숙소에 남았다.

여관 한 채를 통으로 비워 그들의 숙소로 내준 듯했다.

조촐하긴 해도 급히 준비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 싶었는데 제이든이 욕실에 다녀오다가 숙소에 배치된 하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휴, 급히 방을 모두 비우고 공녀님 쓰실 방은 단장도 새로 하느라 죽을 뻔했어. 빨리하라고 어찌나 닦달하던지.”

“원래는 방 서너 개만 비워서 공녀님을 묵게 하고 수행원들은 마당에 천막을 치고 묵게 한다더니.”

“특별히 시중들 것도 없고 여관 손님 대하듯 하면 된다더니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서 귀빈 대접하라고 난리야.”

박쥐 같은 관리는 다음 날 떠나는 안젤리카 일행을 제법 멀리까지 따라 나오면서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혔다.

“공녀님,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조르지오 루카입니다. 루카 가문의 방계이고요. 일정이 바쁘지 않으시다면 며칠 더 쉬어 가셔도 좋을 텐데, 아니, 제가 직접 영주관까지 모셔다 드리면 좋겠지만 책봉식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오가는 손님들을 접대해야 해서, 함께 모시지 못해 마음이 아픕니다. 부디 편안한 여정이 되시기를 빌면서…….”

일행이 모두 썰매에 탔는데도 쓸데없이 목청이 좋은 배불뚝이 관리는 노란 손수건이라도 흔들 기세로 인사를 계속했고 귀 밝은 아실리는 진저리를 치면서 담요 속에 기어 들어가 앞발로 귀를 막았다.

-가끔은 내가 사람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좋겠어.

“삐이이.”

포이도 엉덩이를 치켜들고 아실리의 옆에 엎드리면서 기다란 귀를 앞발로 접어 감추었다.

* * *

반면에 반가운 손님도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안젤리카 아가씨.”

“마르시오 경.”

안젤리카의 전갈을 받고 달려온 백발의 노신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마르시오 경은 선대 때부터의 중신인데 미켈레의 전횡에 맞서 간언하다가 변경 지역으로 쫓겨났어요. 하지만 마르시오 경이 이쪽에 있었기 때문에 제가 콜레디오바를 빠져나올 수 있었죠. 이분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꼼짝없이 엘로이드로 끌려갔을지 몰라요.”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가씨 일뿐 아니라 선대 대공께서 지금의 미켈레 대공을 보면 땅을 치실 겁니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콜레디오바를 모두 말아먹을 지경이라 오랜 가신들은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오면서 들으니 세금을 또 올린다면서요?”

“영지의 주 사업을 손대는 족족 말아먹으니 영지민들의 세금을 올려서 각종 경비를 충당할 셈인 거지요. 사업뿐 아니라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비용 소비가 막대하다고 합니다.”

“예……. 제가 갇혀 살다시피 해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미켈레나 대공비, 셀리나 모두 그리 사치스러운 사람은 아닌데.”

안젤리카가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되자 키리안이 그녀의 손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이제 전처럼 갇혀 살 일은 없으니 책봉식 후에 가신들과 이야기도 나눠 보고 대처 방법을 좀 강구해 봅시다.”

그는 마르시오 경을 향해서도 웃음을 보였다.

“내정 간섭을 할 마음은 없으나 아내의 친정이니까 도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겠습니다.”

마르시오 경은 아직 키리안의 영향력에 대해 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 * *

후계 책봉식은 영주관의 중앙 홀에서 열린다고 했다.

콜레디오바의 영주관은 세렌토와 마찬가지로 중세 느낌의 고성이었는데 아르카니오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영주관 도착 후 미켈레와의 접견이 허락된 것은 안젤리카와 키리안 외에 세렌토의 축하 사절인 루센시오 경까지 셋뿐이어서 나머지 일행은 바로 숙소로 안내되었다.

썰매를 끌던 말들을 마구간에 갈무리하고 숙소인 별채 쪽으로 가는데 웬 여자 한 명이 말을 타고 마구간 쪽으로 구보해 왔다.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승마복 위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치고 있었지만 후드를 등 뒤로 넘기고 있어서 은발이 겨울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우와!”

제이든 일행 중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여자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카티야 양만큼은 아니지만.’

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카티야를 뺀다면 제이든이 카이엔에서 본 여자들 중 가장 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살짝 목례하며 일행의 옆을 비켜서 지나갔고 역시 말을 탄 채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시녀 두 명과 함께 마구간 앞에서 말을 내렸다.

여자는 직접 말고삐를 잡고 말을 마구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셀리나 부인입니다.”

누군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알려 주는 바람에 제이든은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흠,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

미켈레의 혼을 홀딱 빼놓은 애첩이라 해서 막연하게 요염하고 화려한, 흔히 생각하는 색기 뚝뚝 떨어지는 미녀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본 셀리나는 오히려 단아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옷차림도 사치스럽지 않았고 말에도 장식이 없어서 소박해 보였는데, 표정이 없어서 그런가 좀 건조해 보이긴 했지만.

제이든은 무심코 목에 걸린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누가 뭐래도 미녀라면 카티야 양이야. 미녀 중의 미녀지.

“냐오옹.”

“포잇?”

어깨 위의 포이와 다리 옆의 아실 리가 왠지 동시에 콧소리를 내었다.

이 녀석들이 설마 내 생각까지 들여다보는 건 아니겠지?

제이든은 얼른 은화에서 손을 떼고 숙소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드디어 후계 책봉식의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영주관이 시끌시끌하더니 미리 참관 신청을 해 놓았던 제이든과 레노아에게도 연락이 왔다.

제이든이 중앙 홀에 들어섰을 때 이미 중앙 홀에는 사람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전면의 단상 위 높은 중앙 자리는 대공 부부의 자리고 그 뒤쪽으로 반원형으로 가족과 내빈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과 마주 보는 객석 쪽으로는 신분과 지위에 맞게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제이든과 레노아는 꽤 앞쪽 자리를 배정받았다.

원래라면 제이든은 한참 뒤쪽의 일반석에 앉았을 텐데 레노아가 디안느 영애의 위임장을 지참한 덕분에 그녀의 동행으로서 함께 앞쪽에 앉을 수 있었다.

아실리와 포이는 동행할 수 없어서 숙소에 남겨 두었다.

손님들이 모두 착석한 후 한동안 지난 후에야 미켈레가 대공비와 셀리나, 어린 사비나를 데리고 함께 입장해 중앙 윗자리에 앉았다.

안젤리카와 키리안은 그 뒤의 가족석에 앉았고 셀리나는 그들보다 하나 뒷자리에 앉았다.

“나이가 이제 서른 남짓이라 하지 않았어요?”

미켈레를 본 제이든이 놀라서 레노아에게 소근거렸다.

“예, 이제 서른 하난가 둘인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왜 저렇죠?”

“그러게요…….”

미켈레의 이목구비는 안젤리카와 비슷하게 단정했으나 서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초췌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지만 몸은 구부정했고 눈은 퀭한 데다 입꼬리는 처져 있고 낯빛이 푸르죽죽한 것이 생기가 전혀 없었다. 건강한 사십 대 남자보다도 나이 들어 보일 정도였다.

“건강이 나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하지만 그냥 건강이 나쁘다고 저렇게 나이 들어 보일 수가 있나…….”

레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미켈레를 올려다보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콜레디오바의 대주교가 젊은 사제 두 명의 보좌를 받으며 책봉식을 시작했고 어린 사비나는 복잡한 절차를 얌전하게 잘 따랐다.

“공녀가 엄마를 닮았네요. 크면 미인이 되겠어요.”

제이든의 뒤쪽 자리에서 누군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또 누군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흠, 그런데 부친은 전혀 안 닮았는데요. 콜레디오바의 특징이 전혀 없어요.”

“상관없지요, 뭐. 대공이 죽고 못 사는데.”

단상 위의 미켈레 대공과 안젤리카, 그 옆의 안드레아인 듯한 소년은 모두 닮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린 사비나는 확실히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뭐, 친족이라도 닮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하필 출생에 대해 의심이 있는 경우다 보니 아직까지도 뒷말이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콜레디오바의 혈통만이 열 수 있다는 도장 상자를 열게 되면 이제 더 이상은 뒷말이 나오지 않을 거였다.

그런데……, 제이든은 안젤리카의 뒤쪽에 앉은 셀리나 부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저 부인은 모든 것에 저렇게 시큰둥한가? 외동딸의 후계 책봉식인데 어떻게 저렇게 무표정하지?

그녀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그 건조한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던 제이든은 대주교의 목소리에 다시 단상 아래로 눈을 돌렸다.

“자, 이제 콜레디오바의 상자를 공개하겠습니다.”

상자의 관리를 맡은 원로 가신 세 명이 나와 상자를 대주교에게 건네주었다.

대주교가 검은 벨벳 방석 위에 올린 흰 상자를 들고 객석 앞을 한 바퀴 돌면서 앞쪽의 내빈들에게 상자를 보여주고는 단상 위의 대공과 가족석 앞도 지나갔다.

안젤리카가 주의 깊게 상자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대주교가 단상 아래로 내려와 사비나의 앞에 섰다.

“대공과 안젤리카 공녀께서 상자를 확인하셨습니다. 이제 사비나 공녀가 콜레디오바의 상자를 열어 보이시겠습니다.”

상아로 만들어진 상자에는 마법 문양처럼 보이는 복잡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사비나가 상자의 뚜껑에 손을 얹자 뚜껑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떠올라 점점 크게 퍼졌다.

홀 안에서 낮은 감탄 소리가 파도처럼 퍼져가는 가운데 사비나가 뚜껑을 열고 대공의 상징인 주먹만 한 도장을 꺼냈다.

“공녀께서 콜레디오바의 상자를 열고 도장을 꺼내셨습니다. 이제 정식 후계자의 자격을 얻으셨음을 만인에게 선포합니다. 이견이 있으신 분은 나팔이 세 번 울기 전에 말씀해 주십시오.”

대주교의 말이 떨어지자 벽 쪽에 서 있던 나팔수가 뿔고동을 불었다.

책봉식의 절차로서 후계에 이견이 있다면 뿔고동을 세 번 부는 동안 발언해야 한다고 하는데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뿌우우우!”

나팔수가 두 번째 뿔고동을 불었다.

한동안 간격을 두었다가 마침내 세 번째 뿔고동을 불기 위해 나팔수가 뿔고동에 입을 가져다 댄 순간.

“이의 있습니다.”

다소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한 장내에 울렸다.

“제이든 씨?”

바로 옆에 있던 레노아가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홀로 일어선 제이든에게 수백 명의 눈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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