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84화 (84/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4화

23. 어떤 인연(9)

오스틴이 말하면서 한 손으로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포이의 뒷덜미를 잡았다.

“썰매는 역시 내리막길이 제맛이지요. 이 썰매는 마차 형태라 느낌이 좀 덜하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내리막길이 나오면 마차와 확실히 다른 감각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포이가 자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싶어 해서 제이든은 포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창문 곁에 붙어 앉았다.

일반 마차보다 창이 낮아서 포이가 제이든의 무릎 위에 뒷발로 서면 딱 밖을 보기 적당한 높이였다.

눈 쌓인 풍경이 신기한지 제이든의 무릎 위에 뒷발로 서서 앞발로 창틀을 붙잡고 조그만 턱을 창틀에 걸친 채 바깥 구경을 하는 포이를 보면서 맞은편의 레노아가 웃었다.

“아실리도 포이도 빨간 옷이 아주 잘 어울리네요.”

“냐앙.”

제이든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던 아실리가 대답하며 살짝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시미타 일행은 며칠 전에 먼저 콜레디오바로 돌아갔고 오늘 세렌토를 떠난 썰매는 모두 네 대였다.

세렌토의 축하 사절인 루센시오가 호위 두 명과 함께 탄 썰매가 가장 앞에서 달리고, 두 번째 썰매에는 안젤리카와 키리안, 미나와 레스틴이 탔다.

제이든과 레노아, 오스틴이 세 번째 썰매에 탔고 마지막 썰매에는 일행의 짐과 식량, 콜레디오바에 보내는 선물 등을 실었다.

썰매 옆으로는 키리안의 호위 기사인 니코스와 세렌토에서 붙여 준 병사 네 명이 말을 탄 채 따르고 있었다.

“거리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열흘 정도 걸립니다. 후계 책봉식이 정월 초하루라고 하니까 그 이틀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오스틴 씨는 리마타운에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나요?”

“치안대에 연락해서 허가를 받았습니다. 콜레디오바 일까지 끝난 후에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듣자니 미켈레 대공의 딸은 지금 여섯 살이라던데, 그 정도 나이에 후계 책봉을 하는 일이 흔한가요?”

“음, 영지마다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좀 이른 편이긴 한데 상황에 따라서는 서너 살에도 후계로 정해지는 일이 있으니까요.”

제이든과 오스틴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실리가 머리를 들고 야아옹 울었다.

-그 대공 건강 상태 좀 물어 봐.

제이든이 티 안 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혹시 콜레디오바의 미켈레 대공 건강 상태에 대해 들은 게 있으신지요?”

“아, 맞아요.”

레노아가 눈에 이채를 띠며 대답했다.

“안젤리카 공녀에게 들었는데, 미켈레 대공의 몸 상태가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것 같다더군요. 그래서 후계 책봉식을 서두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안젤리카 공녀가 키리안 공자와 혼례를 치름으로써 무게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지만요.”

세렌토 영주관에서 점심 먹고 출발했는데 저녁이 되자 거리를 벗어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기슭에서 저녁을 먹고, 아카디아 백작의 광산을 지나 계속 산을 오르니 점점 길이 험해졌다.

“산봉우리를 넘지 않고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겠지만 그래도 꽤 높이 올라갑니다.”

오스틴의 말처럼 썰매 행렬은 산모롱이를 끼고 돌면서 꾸준히 위쪽으로 올라갔다.

아실리와 포이는 담요를 덮고 제이든의 무릎을 벤 채 잠들어 있었고 제이든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깐 지붕을 열어 달라고 할까요?”

레노아의 말소리에 제이든이 머리를 들었다.

“마부에게 들으니 이 썰매는 일반 마차와는 달라서 지붕을 열 수 있다고 합니다. 잠깐 걷어서 바람 좀 쐴까요?”

오! 지붕을 걷을 수 있다고? 제이든이 반색을 했다.

“정말요? 한번 걷어볼 수 있을까요?”

레노아가 마부석과 이어진 휘장을 걷고 마부에게 지붕을 걷어 달라고 말하자 마부가 안쪽을 돌아보면서 외쳤다.

“자, 지붕을 걷겠습니다. 토끼랑 고양이 잘 잡아 주세요.”

아실리야 잡을 필요가 없고 제이든은 포이를 껴안았다.

마부가 뭔가를 잡아당기자 지붕과 위쪽 벽이 한쪽에서부터 두르르 말리면서 밤하늘이 드러났다.

싸늘한 겨울 바람이 썰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우와!”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고 자다 깬 포이가 보슬보슬한 앞발로 눈을 비비며 위를 올려다보다가 피이잇 소리를 질렀다.

썰매 위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드러났다.

썰매 앞쪽 마부석에 걸린 램프 외에는 인공적인 불빛이 없는 산길, 검푸른 겨울 하늘 위에는 이렇게 별이 많을 수 있나 싶게 가득 박힌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아, 정말 아름답네요!”

레노아가 감탄했고 오스틴도 큰 숨을 내쉬었다.

아실리가 담요 밖으로 몸을 내밀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기다란 수염이 앞쪽으로 둥글게 펼쳐졌다.

“어때요? 좀 춥지만 볼만하죠? 이 산의 겨울 밤하늘은 장관이거든요.”

마부 역할의 병사가 싱글거리면서 마부석에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포이가 가슴 앞에 두 앞발을 모은 채 하늘을 향해 깡충깡충 뛰는 모습을 보고 오스틴이 말했다.

“제이든 씨의 토끼와 고양이는 정말 사람 같네요. 별을 감상할 줄 아는데요?”

“포이잉!”

포이가 그 말이 맞다는 듯 탄성 같은 소리를 내면서 하늘을 향해 앞발을 펼치는 걸 보고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지붕을 걷은 채 앞서가고 있던 안젤리카의 썰매에서 이쪽의 웃음 소리를 들었는지 안젤리카와 키리안이 반쯤 몸을 일으키고 손을 흔들었다.

둘 다 어른스럽기만 하더니 그런 모습은 갓 결혼한 어린 연인들다워 보여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짝도 없는데.’

두 사람을 보는 게 즐겁긴 했지만 왠지 시무룩해지는 제이든이었다.

* * *

무난히 계속되던 여정에 문제가 생긴 것은 나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두 명씩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 외 제이든 일행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흘 내내 산길을 썰매로 달리고 밤에도 노숙을 하느라 제법 피곤이 쌓이기도 했고 그동안 아무 일도 없어서 다소 방심한 참이기도 했다.

모두 조용히 잠들어 있는 가운데 뭔가 갑자기 제이든의 어깨를 눌렀다.

잠결에 몽롱한 눈을 떠 보니 아실리가 깨어 있었다.

“실리……, 왜 안 자고?”

아실리는 제이든의 어깨에 앞발을 짚은 채 몸을 일으키고 썰매 바깥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초록색 눈과 쫑긋한 귀, 앞으로 둥글게 휜 수염, 아실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아실리?”

심상치 않은 기색의 아실리를 보고 제이든이 눈을 비비는데 맞은편 의자에서 자던 오스틴이 머리를 돌리는가 싶더니 모포를 젖히면서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몸을 소리 없이 창에 붙인 오스틴이 아실리가 바라보는 쪽을 보면서 귀를 기울였다.

“오스틴 씨? 무슨 소리가 들려요?”

제이든과 레노아도 몸을 일으켰다.

오스틴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뇨, 아직 저한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고양이가 긴장하고 있는 걸 보니 이상해서요.”

아실리가 대답하듯 낮은 소리로 그르릉거리면서 숲 저편을 노려보았다.

“맹수나 다른 동물을 느낀 걸 수도 있겠지만.”

오스틴이 중얼거리면서 재빨리 썰매 밖으로 나갔다.

-아니, 사람이 다가오고 있어. 말이랑.

아실리가 긴장한 채 으르렁거렸고 제이든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포이를 아실리의 옆에 딱 붙여 놓은 후 호신용으로 준비한 삼단봉을 찾아서 길게 뽑았다.

밖으로 나간 오스틴이 돌아오기 전에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뭔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으윽!”

누군가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바로 오스틴의 외침 소리가 이어졌다.

“습격이다!”

썰매를 둥글게 세워 놓은 노숙지의 가장자리에서 격돌이 일어났다.

“실리, 포이 잘 지켜!”

숲속에서 뛰어나온 검은 그림자 중 두엇이 제이든의 썰매를 향해 곧장 달려왔고 제이든은 즉시 달려나가 문을 뒤로하고 썰매를 막아섰다.

카앙!

상대가 휘두른 날붙이를 막은 제이든의 삼단봉에서 불꽃이 튀었다.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검게 칠한 검을 든 상대가 주춤 물러섰다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제이든의 삼단봉이 낭창하게 휘어졌다가 다시 검을 튕겨냈다.

이거 대단한데?

정신없는 격돌 가운데서도 제이든은 감탄했다.

이 삼단봉은 아카디아 백작의 선물이다. 그가 자랑하는 디아니늄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오스틴과 체술 훈련을 하는 것을 본 그가 오스틴에게는 창을 선물하고 제이든에게는 봉을 주었다.

“봉을 상당히 잘 쓰시던데 이걸 한번 써보시죠. 웬만한 도검으로는 흠집을 내지 못할 겁니다.”

아카디아 백작의 말대로 디아니늄 삼단봉은 상대의 검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제이든과 상대하고 있는 자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하나 불쑥 솟아오르더니 제이든을 덮쳐왔다.

하지만 그전에 늘씬한 형체 하나가 끼어들면서 시원스럽게 돌려차기를 날렸다.

빠악!

레노아의 돌려차기에 턱을 맞은 줄 알았는데 상대도 간발의 차이로 두 팔을 교차해서 그녀의 발을 막으며 휘청 밀려났다.

여기저기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 고함 소리,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제이든은 다른 곳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바로 앞의 상대를 막는 데만 전력을 다했다.

“이쪽으로!”

오스틴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은 마지막 힘을 다해 삼단봉으로 눈앞에 있는 자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뻐억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은 상대가 짚단 쓰러지듯 넘어갔고 레노아의 지팡이에 목의 급소를 찔린 자가 그와 함께 겹쳐지듯 쓰러졌다.

“실리!”

제이든이 썰매 문을 열기도 전에 창문에서 포이의 뒷덜미를 입에 문 아실리가 바람처럼 뛰어나왔다.

레노아와 제이든이 아실리의 뒤를 따라 헐떡거리며 둥글게 세워진 썰매 가운데, 오스틴의 옆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램프를 켰는지 사람들의 얼굴 위로 불빛이 어지럽게 어른거렸다.

레노아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갑자기 공중에서 불덩이가 생기면서 주위를 환하게 비췄다. 노숙지 주변의 나무들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수가 너무 많은데.”

오스틴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뒤쪽을 맡겠습니다.”

키리안과 등을 댄 채 서 있던 니코스가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버리면서 목쉰 소리로 말하자 한쪽 어깨를 다쳤는지 피를 흘리고 있던 레스틴의 목소리가 응답했다.

“앞에도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레노아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공중에 떠 있던 불덩이에서 폭발하듯 작은 불덩이들이 숲 쪽으로 날아갔다.

가까이 오던 검은 옷의 사내들이 흠칫 놀라 몸을 피했으나 그중 누군가가 외쳤다.

“타지 않는다. 뜨겁지 않아. 밝을 뿐이니 물러서지 마라.”

레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일대일 격투라면 자신 있지만 공격형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숲속의 검은 옷들이 그녀가 뿌린 불덩이를 밟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콜레디오바는 아닌 것 같은데.”

안젤리카의 중얼거림에 이어 키리안의 맑은 목소리가 산중의 공기를 찢듯이 울렸다.

“너! 세티온이 아니냐!”

검은 옷들을 지휘하고 있던 복면 사내가 흠칫했다.

“다이스가 보냈군. 네 부친이 다이스의 편으로 돌아섰을 리가 없는데. 가문에 부끄럽지 않으냐?”

키리안이 질타하자 세티온이라 불린 사내가 소리쳤다.

“공자가 여기서 죽으면 내가 관여했다는 걸 아버지가 알 리 없지. 자, 몇 명 되지 않는다. 쓸어버려!”

이거, 잘못하면 여기서 뼈를 묻겠는데.

제이든은 레노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삼단봉을 단단히 치켜들었다.

“실리, 포이 잘 데리고 있다가 위험해지면 숲속으로 도망쳐.”

저놈들이 설마 고양이와 토끼를 쫓지는 않겠지.

-누가 또 와.

뒤에서 아실리가 야옹거렸다.

“?”

아실리의 말을 생각해 볼 틈도 없이 검은 옷의 사내들이 짓쳐들어왔고 제이든 일행도 마주 방어를 시작했다.

눈앞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삼단봉으로 흘리고 상대의 머리를 후려친다.

상대가 칼을 들어 막았다. 삼단봉을 누르면서 발을 들어 상대의 아랫배를 걷어차자 상대가 몸을 뒤로 빼면서 물러섰다.

격돌 후 제이든과 상대가 둘 다 뒤로 물러서면서 자세를 고치는데 땅이 울리는가 싶더니 검은 옷의 사내 뒤로 숲속에서 우르르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기사를 선두로 건장한 남자들이 숲속에서 달려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중과부적인데, 제이든이 눈앞이 아찔해져서 아실리를 돌아보며 도망치라고 외치려는 순간 선두에 섰던 기사가 자신의 앞에 걸리는 검은 옷의 남자를 베어 넘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가 우렁차게 외쳤고 키리안이 마주 소리쳤다.

“데메티스!”

* * *

센디니온의 다이스 남작이 보낸 습격자들은 기사 데메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온 덕분에 쉽게 정리되었다.

“공자께서 콜레디오바의 공녀와 혼인했다는 소식에 이때껏 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대거 저희에게 합류했습니다. 다이스 남작이 공자가 센디니온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발악 중이지만 이제 저희가 왔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슬아슬했어. 오스틴 씨가 적시에 사람들을 깨우고 경고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당할 뻔했네. 저놈들 무기에도 모두 검은 칠을 하고 말굽에는 헝겊을 씌웠더라고. 어찌나 조용히 왔는지 불침번도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까지도 소리를 듣지 못했고.”

“불침번도 듣지 못했는데 썰매 안에 있던 오스틴 씨가 소리를 들었다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고 있던 게 정말 부끄럽습니다.”

레스틴 경의 말에 오스틴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자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이든 씨의 고양이 덕분입니다.”

“?”

“고양이가 뭔가 들었는지 긴장해서 일어나 숲 쪽을 보는 바람에 저도 깨었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진 않았지만 고양이가 긴장한 걸 보니 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깨운 겁니다.”

“오! 아무래도 동물은 사람보다 귀도 밝고 예민하니까요. 고양이가 큰일 했군요!”

다들 경탄하는 눈으로 아실리를 바라봤지만 모닥불 곁 좋은 자리를 차지한 아실리는 모른 척 놀란 포이를 달래며 이리저리 핥아 주는 데만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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