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3화
23. 어떤 인연(8)
세렌토 영주관에는 타 지역의 사절들을 묵게 하기 위한 객실용 별채가 따로 있다.
중요한 귀빈을 위한 영빈관급 별채와 비교적 덜 중요한 손님을 위한 작은 별채가 있는데 콜레디오바의 사신은 일단 그중 작은 별채로 안내되어 있었다.
제이든 일행이 묵고 있는 별채 근처에 세워진 몇 개의 건물 중 하나였다.
디안느가 영주관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콜레디오바의 사절이 본성으로 안내되었다.
영주의 접견실이 아니라 디안느의 응접실로 안내된 사신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주님께 드릴 예물도 있습니다만 알현할 기회도 주지 않습니까?”
“저희 영주님은 병중이셔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외부 손님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디안느 아가씨께서 나오실 겁니다.”
사신을 맞은 에머리 자작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시종에게 사신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한 뒤 나가 버렸다.
콜레디오바에서 온 사람은 미켈레의 측근인 시미타 자작이었는데 이미 기분이 상해 얼굴이 벌게졌다.
에머리 자작의 말과 태도는 그가 영주가 인사를 받을 만큼 중요한 손님이 아닐뿐더러 에머리 자작이 자리를 지킬 정도의 사람도 못 된다는 것이었으니까.
시종이 따라 준 차가 거의 식을 무렵이 되어서야 디안느 영애가 아카디아 백작과 함께 들어왔다.
간단한 수인사가 끝나고 시미타는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저희 영지의 안젤리카 아가씨가 세렌토에 들어와 혼인을 치른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설마 영주님께서 이런 일을 묵과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는 질책하듯 언성을 높였다.
“일반 가정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영주의 가문에서 가장이고 영주이신 미켈레 대공도 모르는 혼인을 누이동생이 제멋대로 치를 수 있습니까? 설마 그런 일에 세렌토가 힘을 보태 주신다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글쎄요…….”
디안느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약간 내려다보듯 하는 눈으로 시미타의 얼굴을 향했다.
“안젤리카 공녀는 만 18세가 넘지 않았습니까? 혼인 상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압니다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이미 엘로이드의 영주님과 혼담을 나눈 상태입니다. 이미 대공께서 정해 놓으신 상대가 있는데 다른 자와 결혼하겠다고 야반도주를 하다니 전통 있는 귀족 가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디안느 영애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어느 왕실이나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이렇게 제멋대로 혼인을 정한답니까?”
시미타의 언성이 높아지자 디안느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제 혼인은 제가 정했습니다만?”
옆에서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아카디아 백작을 보며 시미타는 잠시 말이 막혔다.
이 한 쌍이 아카데미 시절부터 연인이었고 디안느가 세렌토의 후계자 자리를 버리고 아카디아 백작을 선택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아무튼 세렌토에서 콜레디오바의 공녀를 숨기고 있다면 간단하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미켈레 대공이 책임을 묻겠다고 진노하셨습니다. 공녀를 속히 저희에게 인계해 주십시오.”
“나이가 이미 사십이 넘은 엘로이드 영주의 세 번째 후처로 팔아넘기기 위해서요? 선대 대공이 아신다면 눈도 못 감고 개탄하실 일 아닙니까?”
시미타가 점점 더 소리를 높이며 영지전이라도 불사할 기세로 안젤리카를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는데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콜레디오바의 사신께 급전이 왔다고 합니다.”
시종장의 뒤로 시미타와 함께 왔던 기사가 들어왔다.
손에 긴급 표시로 빨간 줄이 감긴 서신함을 든 채였다.
“자작님, 붉은 매가 왔습니다.”
붉은 매는 콜레디오바 영주의 긴급 서신을 가진 매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시미타는 디안느와 아카디아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신을 펼쳤다.
“이게 무슨…….”
서신을 읽는 그의 이맛살이 당혹스럽게 찌푸려졌다.
“…….”
다 읽은 서신을 거칠게 움켜쥔 그는 디안느 쪽을 쳐다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뭐라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콜레디오바에 무슨 일이라도 났나요?”
“휴…….”
한숨을 쉬고 난 시미타는 표정을 밝게 고쳤다.
“안젤리카 공녀께 전해 주십시오. 미켈레 대공께서 너그럽게 마음을 푸셔서 공녀의 혼인을 인정하시겠다고 합니다. 세렌토에도 누이를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흔연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시미타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내심 난감하고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것을 왜 그렇게 길길이 뛰며 자신을 세렌토로 내몰았단 말인가?
가서 무슨 수를 쓰든 안젤리카가 혼례식을 치르기 전에 잡아 오라고, 혹시 늦어서 혼례식을 이미 치렀거든 합법적 보호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 혼례니 무효라고 주장하고 반드시 끌고 오라고 영주의 집무실이 떠나가도록 소리소리 지르지 않았나!
혹시라도 세렌토 측에서 안젤리카를 보호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물었다가 미켈레가 내던진 석재 문진에 맞아 시퍼렇게 멍든 어깨가 아직도 시큰거리는데.
어깨라 다행이지 머리라도 맞았으면 자리보전하고 누워야 할 뻔했다.
아니, 차라리 그게 나았을까? 그러면 이렇게 곤혹스러운 임무를 맡아 세렌토까지 일주일 밤낮으로 말을 달려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원래 열흘 거리인데 미켈레의 닦달이 너무 심해 산길을 일주일 만에 주파했건만.
영지전이라도 불사할 각오로 최대한 압박하라고 도장을 찍어준 친필 서한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웬 변덕인가.
늙지도 않은 대공이 벌써 노망이 났나. 하긴 요즘 눈도 벌겋고 툭하면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어.
시미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한 얼굴을 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명을 받고 떠날 때만 해도 대공께서 상당히 노여워하셨는데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가라앉아 누이가 애틋해지셨나 봅니다. 엘로이드와의 혼사가 아니라도 용서하고 허락해 주겠다고 하시는군요. 그리고.”
시미타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면서 덧붙였다.
“안젤리카 공녀께서 혼인까지 하시는 만큼 콜레디오바의 후계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사비나 공녀께서 후계를 잇는 것이 기정사실이지만 공식 책봉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번에 공식 후계 책봉식을 치르기로 결정하셨답니다.”
그는 내심 미켈레가 뻔뻔하다고 생각하며 낯이 뜨거운 것을 참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안젤리카 공녀도 당연히 돌아와서 조카의 후계 책봉식에 참여하셔야지요. 늦었지만 상견례도 할 겸 혼인 상대자도 함께 오도록 하라고 하셨고, 세렌토를 비롯해 주변 이웃 영지에도 초청장을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가능하다면 디안느 영애께서 참석해 책봉식을 빛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디안느는 시미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 콜레디오바의 후계 책봉식에는 선조로부터 내려온 도장 상자를 여는 행사가 포함되어 있다던데?”
“예, 그렇습니다.”
시미타는 흔연스럽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 자신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켈레는 사실 사비나의 후계 책봉을 더 빨리 진행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직 책봉식을 열지 못한 이유가 사비나가 도장 상자를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콜레디오바의 직계라면 도장 상자를 열 수 있지만 그 나이는 고르지 않다. 작고한 선대 대공 같은 경우는 세 살 때 상자를 열었다고 하는데 미켈레는 열두 살 때 열었다.
안젤리카는 네 살 때 열었고 안드레아는 네 살 때 선대 대공이 사망하는 바람에 상자를 열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사비나가 아직 어려서 상자를 열지 못한다고 몇 년 더 기다려 보겠다던 미켈레가 이렇게 갑자기 책봉식을 연다는 것은 사비나가 상자를 열었다는 것인데……, 정말일까?
시미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안젤리카에 대한 태도를 봐도 느낄 수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미켈레의 행보는 변덕스럽고 불안정했다.
외부에는 숨기고 있으나 항상 측근에서 보좌하는 시미타에게는 미켈레의 건강 상태나 심리 상태가 고르지 못한 것이 보였다.
시미타는 사실 사비나에 대한 미켈레의 과도한 애정에도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미켈레가 가족에게 그리 애정이 깊은 성격이 아닌데 애첩 셀리나와 그 딸인 사비나에게 쏟는 애정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다.
심지어 사비나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는데도.
* * *
“안젤리카 공녀를 불러들이려는 꾐수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책봉식을 한다는 공식 초청장을 다른 영주들에게 보내지는 못했을 텐데요.”
책봉식 초청장이 세렌토뿐 아니라 이웃한 다른 영지들에도 돌려진 걸 보니 책봉식 자체가 거짓은 아닌 듯했다.
“공녀 생각은 어떻습니까?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아요?”
안젤리카는 시미타로부터 전해 받은 서신을 움켜쥐고 있다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참석해야 해요. 안드레아가 책봉식 참관을 위해 불려온답니다. 제가 안 가면 안드레아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예요.”
키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함께 가겠습니다. 이제 단순히 콜레디오바의 공녀가 아니지 않습니까? 센디니온 후계자의 정비입니다. 오빠라 해서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함부로 하게 두지 않습니다.”
한참 의논한 끝에 안젤리카와 키리안은 결국 책봉식에 참석하러 콜레디오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디안느나 아카디아 백작이 갈 것까지는 없다고 보고, 대신 레노아가 디안느의 위임장을 가지고 참석하기로 했다.
레노아가 원래 세렌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세렌토 귀족 중 한 명이 축하 사절로 가고 레노아는 그를 보좌하는 역할이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레노아의 지휘를 따르도록 정해 두었다.
제이든이 그 일행에 끼게 된 것은 콜레디오바가 레타논으로 가는 경로에 걸쳐 있기도 하지만 레노아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로스 씨는 단순한 감정사가 아닙니다. 함께 가신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제이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안젤리카나 키리안은 레노아가 왜 제이든을 꼭 일행에 끼워 가려고 하는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혼례식 하객으로도 참석해 주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어쩌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안젤리카가 제이든에게 말하면서 아실리와 포이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었다.
“사랑스러운 토끼와 고양이까지 데리고 계시는데 괜찮을까요?”
제이든도 내심 걱정이 되었기에 레노아에게 따로 의논했었다.
“이런 정치외교 쪽 문제라면 제가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요. 아실리와 포이까지 있는데 굳이 제가 함께 갈 필요가 있을까요?”
“객관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레노아는 눈꼬리가 긴 눈으로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그냥 제 감이라서 이유를 댈 수는 없는데 같이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제일 좋겠지만 왠지 제이든 씨가 같이 가주시는 게 힘이 될 것 같거든요.”
그녀는 아실리와 포이를 향했다.
“그리고 고양이와 토끼도, 제이든 씨 못지않게 같이 가면 좋을 듯한 느낌이 자꾸 들어요.”
마법사의 감은 무시할 게 못 된다.
게다가 포이는 행운의 포에니 토끼니까.
기왕 혼례식에도 참석했었는데 끝까지 행운과 함께할 수 있도록 도와줄까?
제이든의 눈길을 받은 아실리가 야아옹 울었다.
-포이도 같이 가고 싶대.
* * *
그리하여 며칠 후. 제이든과 아실리, 포이는 콜레디오바로 가는 썰매에 올랐다.
“썰매로 가다니 신기하네요.”
“그동안 눈이 더 왔잖아요. 겨울에 북부 지방은 마차보다 썰매가 훨씬 편하고 빠릅니다.”
“썰매라고 해도 생긴 건 마차랑 똑같은데요?”
말이 끄는 썰매는 마차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바퀴 대신 썰매의 날이 붙어 있었다.
일행의 선두와 후미에서 경호하는 인력들이 탄 썰매는 지붕이 없는 일반 썰매의 형태였지만 안젤리카나 레노아, 제이든이 타는 썰매는 커다란 썰매 위에 바퀴를 떼어낸 마차의 몸통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출발!”
선두의 신호에 따라 네 대의 썰매가 일제히 출발했다.
“포이잇!”
썰매가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창문에 매달려 있던 포이가 환호성 같은 소리를 내며 팔짝팔짝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