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2화
23. 어떤 인연(7)
겨울의 여신 노스티에라의 축일.
전날부터 세렌토 성 아랫마을이 북적거렸다.
보통 축제는 여름이나 가을에 열리는 일이 많지만 세렌토 지방에서는 11월 15일을 노스티에라 여신이 겨울을 여는 날이라 해서 꽤 크게 치른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각종 공연과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장터 쪽은 아무래도 여름이나 가을 장터처럼 크게 열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각지에서 많은 상인들이 찾아왔기 때문인지 장터도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이든은 아실리와 포이, 포니를 데리고 축일 전야제 구경을 하고 들어와 늦게야 잠이 들었다.
“포잇! 포잇! 피이잇!”
아침부터 포이가 마구 잡아당기며 깨우는 바람에 몸을 일으킨 제이든이 눈을 비볐다.
“아우, 포이, 날도 추운데 우리 조금만 더 자자.”
“피이잇, 피잇!”
포이는 고무공처럼 통통 튀면서 제이든을 잡아당겼다.
포이에게 이끌려 창가로 가자 창틀에 뛰어오른 포이가 뒷발을 탕탕 치면서 창밖을 가리켰다.
“포잇!”
“아하! 눈이 와서 그러는구나?”
며칠 사이에 날이 부쩍 추워지더니 새벽에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별채 바깥의 나무들마다 눈꽃이 피고 잔디 위에도 하얗게 눈이 깔렸다.
발이 빠질 정도로 쌓인 건 아니지만 얇은 양탄자처럼 뽀얀 눈이 한 겹 깔린 것이 깨끗하고 고왔다.
“벌써 눈이 오다니, 확실히 북쪽이라서 겨울이 빠르구나. 아스토시엔 산에 눈이 오려면 12월 중순은 되어야 하는데.”
“포잇, 포잇!”
“나가 보자고? 춥지 않을까?”
“포이잉.”
포이는 짧은 앞발을 열심히 흔들면서 눈을 반짝였다.
태어나서 첫 겨울을 맞은 아기 토끼에게는 처음 보는 눈이 엄청 신기한 듯했다.
“그냥 나갔다가 감기 걸리면 어떡해, 어디 보자.”
산토끼는 겨울 눈밭도 신나게 뛰어다닌다고는 하지만 포이는 아직 어리고 밖에서 키운 토끼가 아니라 그냥 데리고 나가기엔 걱정이 되었다.
배낭을 뒤져서 폭신폭신한 수면양말 한 켤레를 꺼낸 제이든은 가위로 양말의 발끝 부분을 자르고 몸통에 네 개의 구멍을 내었다.
“자, 이거 한번 입어 보자, 포이야.”
양말을 포이의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씌우고 구멍으로 발을 꺼내니 몸에 딱 맞는다.
“이야, 맞춤이네, 맞춤이야. 진짜 귀엽다. 포이야!”
제이든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자 포이도 뭔진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지 몸을 앞뒤로 돌려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둘이 폴짝거리는 걸 보고 있던 아실리가 냐항항 웃는 듯한 콧소리를 내면서 기지개를 켰다.
“아실리는 안 나갈래?”
-추워. 난 창문으로 보는 걸로 만족하니까 둘이 산책 다녀와. 어차피 이따 성당에 가야 하잖아.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이불 속에 있고 싶은 듯 아실리는 몸을 동그랗게 말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외투를 입고 어깨에 포이를 태운 뒤 별채 앞 뜰로 나서니 눈 내린 뒤의 쨍하게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옷자락을 붙잡고 절벽에서 하강하듯 쪼록쪼록 미끄러져 내려간 포이가 눈밭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노란 양말 옷을 입은 흰 토끼가 깡충깡충 뛸 때마다 뒷발에 차인 눈이 꽃가루처럼 포르르 일어났다 가라앉고 또 포르르 일어났다 가라앉는 게 동화 속 풍경 같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토끼네.”
사람 말도 알아듣고 하는 짓도 사람 어린애 같다 보니 가끔 포이가 토끼라기보다는 사람 아기 같을 때가 있는데, 눈밭 위를 깡충거리며 이리저리 달리는 모습을 보니 정말 토끼답게 보였다.
“포리릿!”
한껏 흥이 올랐는지 휘파람 소리처럼 높은 소리를 울린 포이가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향해 힘껏 뛰어올랐다.
앞뒷발을 쭉 뻗은 걸 보니 나뭇가지 위에 살짝 쌓인 눈꽃을 건드려 볼 셈이다.
“포이야, 그거 건드리면…….”
점프가 좀 낮아서 나뭇가지에 닿지 못하고 눈밭 위로 털썩 떨어진 포이는 한 바퀴 뒤로 구르고 오뚜기처럼 다시 폴짝 일어났다.
“포잇!”
두 번째 점프는 더 높고 힘차게!
나뭇가지에 앞발이 걸렸으나 잠시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떨어지고…….
“그렇게 된단다. 포이야.”
흔들린 나무에서 우르르 쏟아진 눈가루를 뒤집어쓴 포이는 놀랐는지 나뭇가지 아래에서 뒷발을 앞으로 뻗은 채 까만 눈만 커다랗게 깜박거렸다.
까만 귀에 눈송이가 점점이 맺혀서 흰 점박이 같았다.
“아이구 우리 포이, 눈 뒤집어썼어요?”
포이를 안아 올려 눈을 털어 준 제이든은 축축해진 앞발과 뒷발을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눈을 닦아 줬다.
“발 시리지 않아? 다 젖었네.”
“포이잉.”
포이는 온몸이 차가운데도 좋다고 포잉거리며 제이든에게 머리를 비벼대더니 앞발로 기다란 귀를 앞으로 잡아 내려서 닦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몸을 핥으며 그루밍하는 것은 많이 봤지만 토끼가 귀를 접어 내려서 앞발로 귀를 손질하는 것도 볼 때마다 깜찍한 재미가 있다.
“자, 이제 가서 아침 먹자.”
외투 안에 포이를 집어넣고 단추를 잠그자 포이가 목 아래쪽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천천히 별채로 돌아가자 아실리가 창가에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실리, 춥다면서 왜 창가에 있어?”
제이든이 다가오는 걸 발견했는지 창문에 좀 더 가까이 붙은 아실리가 몸이 잘 보이도록 일어나 앉았다.
어라?
아실리가 옷을 입고 있다?
“아저씨, 어때요, 잘 어울리죠?”
거실에서 깡충거리고 있는 것은 빨간 외투를 입은 토끼……. 아니고 토끼 같은 소녀였다.
“이제 더 북쪽으로 가실 거라면서요? 그러면 진짜 추울 거예요. 그래서 제가요, 우리 아네스한테 부탁했어요. 아네스가 뜨개질을 정말 잘하거든요.”
포니는 팔짝거리며 시녀 아네스가 만들었다는 옷을 펼쳐 보였다.
따스해 보이는 빨간 털실로 뜬 스웨터는 포니의 외투와 똑같이 하얀 테두리가 둘려 있고 흰 솜방울까지 달려 있어 깜찍했다.
“아저씨랑 포이는 밖에 나갔다고 해서 아실리부터 입혀 봤어요. 따뜻한지 아실리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치, 아실리?”
아실리는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냐앙 울면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채 포니에게 머리를 콩 부딪쳤다.
“포이도 입어 보자, 우왕, 포이 노란 옷도 잘 어울리네,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응.”
사실은 양말이지만, 포니에겐 알려 주지 말아야지.
* * *
제이든 일행이 대성당에 도착한 것은 점심나절이 지난 오후였다.
안젤리카는 성당을 방문한 디안느 영애의 시녀들 중 하나로 꾸미고 이미 한참 전에 성당에 와 있었다.
그녀 외의 두 시녀는 레노아와 미나였고 오스틴과 레스틴 경은 호위병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사실 이 결혼에 있어서 제이든이 관여할 부분은 없어서 그가 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하객도 없이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쓸쓸한 결혼식에 그래도 내막을 아는 사람으로서 한 명의 하객이라도 되어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단 신랑이 도착해야 결혼식이든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어느 쪽에서 올지 몰라 산 쪽도 쳐다봤다가 거리 쪽도 내려다봤다가 했지만 이렇다 할 사람이 보이지 않고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하늘에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고 광장의 노점에서 파는 뜨겁게 끓인 과일주를 석 잔째 마셨을 때 성당 쪽에서 레노아가 나와 제이든을 불렀다.
그녀를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상인의 종자 차림을 한 소년이 젖은 외투를 벗고 있었다.
제이든이 계속 성당 앞쪽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못 본 걸 보니 아마 뒷문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종일 기다리면서 속을 태웠던 안젤리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서서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몇 번 성당 안을 들여다봤을 때 워낙 침착한 태도여서 몰랐는데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걸 보니 여간 마음을 졸이지 않았나 보다.
“미안해요. 늦었죠?”
키리안이 손을 들어 안젤리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들이 마주 보는 모습을 보니 단순히 각자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고 선택한 결혼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자, 그럼 서둘러 혼례를 진행하지. 노스티에라 여신의 축일에 눈이 오면 다음 해엔 풍년이 든다고 하니까 날도 좋고.”
아카디아 백작의 말에 키리안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기 중이던 대주교가 제단 앞에 섰고 키리안과 안젤리카가 손을 잡고 주교 앞에 나란히 섰다.
귀족의 혼례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간소한 혼례식이었지만 신랑 신부도, 그들 옆에 증인으로 선 아카디아 백작이나 디안느 영애도 진지했다.
하객석에 제이든과 함께 앉은 아실리와 포이도 분위기를 아는 듯 얌전하게 있었다.
둘 다 포니가 선물한 빨간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예복을 입은 하객 같았다.
주교의 축복을 받고, 주신 슈라의 이름 앞에 혼인 서약을 하고, 반지를 교환했다.
주교의 성혼 선언 후 두 사람이 맹세의 입맞춤을 하고 나자 레노아가 손뼉을 딱 쳤다.
차라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면서 공중에서 나타난 꽃다발이 불꽃처럼 터지더니 작은 꽃송이들이 금빛 은빛으로 빛나며 갓 결혼한 신랑 신부의 머리 위로 하늘하늘 날아내렸다.
“포잉!”
포이가 벌떡 일어서서 두 앞발을 모아 잡고 분분히 떨어지는 꽃송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축복을 기원하는 행운의 토끼처럼 보였다.
사실 행운의 토끼가 맞기도 하고.
“자, 이제 혼례는 끝났습니다. 두 분 앞으로의 거취는 어떻게 하실 건지요?”
디안느 영애가 묻자 키리안이 대답했다.
“저는 센디니온 영주의 정당한 계승권자입니다. 다이스 남작이 섭정 자리를 차지할 때 이미 제가 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섭정을 한다고 공언했습니다. 제가 정월생이라 이제 만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 달이 남지 않았습니다.”
“흠, 그러면 한 달 뒤에는 현 섭정이 무난히 영주 자리를 돌려줄 거라 보시오?”
아카디아 백작이 묻자 키리안은 씩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전에 절 없애려 할 겁니다.”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는 저를 자기 딸과 결혼시키려고 기를 썼습니다만 제가 끝끝내 피했거든요. 이번에 센디니온에서 빠져나오고 보니 그자의 의도가 확실해졌습니다.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요. 영지 밖에 있을 때 죽여 없앨 셈이더군요.”
“그럼 어쩔 셈이오? 혹시 세렌토의 도움을 기대하는지?”
아카디아 백작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묻자 키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시고 증인을 서 주신 것만도 은혜가 차고 넘치는데요.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지요. 저도 그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가신들 간에 다이스 남작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중도 입장을 취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
“저는 이제 스무 살을 앞두고 있고, 세렌토 영애와 아카디아 백작님을 증인으로 세렌토 대성당에서 콜레디오바의 공녀와 혼인했습니다. 이 소식을 먼저 센디니온에 퍼뜨리고 신부와 함께 큰길로 당당히 입성할 겁니다. 올 때는 몸을 숨기고 왔지만 돌아갈 때는 최대한 드러내고 가야죠.”
키리안의 자신 있는 태도를 본 아카디아 백작과 디안느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군요.”
“예.”
“그럼 언제 센디니온으로 떠날 예정이신가요?”
“사흘이면 됩니다. 혼례가 끝나면 바로 연락할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답신이 오는 대로 떠날 겁니다.”
“그럼 그때까지는 세렌토 영주관의 별채에 머무시지요.”
디안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당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면서 기사 한 명이 달려 들어왔다.
“디안느 아가씨, 콜레디오바의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작가의 말
토끼는 아니지만, 아기 고양이에게 양말로 옷을 만들어 입힌 모습은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