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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81화 (81/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1화

23. 어떤 인연(6)

디안느는 안젤리카와 잠시 눈을 맞추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이건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선 백부님의 허락을 구해야 하니 영주관으로 함께 가시죠.”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안젤리카는 후련한 표정으로 일어서다가 비틀거렸다.

“아가씨!”

그녀의 뒤에 있던 미나와 레스틴 경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들보다도 빠르게 안젤리카를 붙잡은 것은 제이든의 뒤에서 튀어나간 오스틴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요.”

이마에 배어나온 진땀을 손등으로 닦은 안젤리카는 오스틴의 나무 둥치 같은 몸통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파묻었다.

“오스틴 아저씨,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이렇게나 많이 자라셨네요. 제가 옆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항상 죄송했습니다.”

안젤리카 일행과 오스틴이 회포를 푸는 동안 디안느와 아카디아 백작은 광산 사람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했다.

그들이 안젤리카가 누군지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찾아왔다는 말이나 그들의 인상착의가 밖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한 후에야 광산을 떠나 영주관으로 돌아왔다.

디안느가 세렌토 백작에게 먼저 이야기를 전하자 세렌토 백작은 대주교와 먼저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주교에게 사람을 보냈다.

안젤리카 일행은 기다리는 동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간단한 식사를 했다.

“키리안 공자와는 연락이 닿습니까?”

“닷새 전까지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계속 이동하는 중이라 전서구가 왕래하기도 쉽지 않고요.”

“만나기로 한 날짜와 장소는요?”

“11월 12일에서 17일 사이, 가능하다면 15일 노스티에라 여신의 축일에 세렌토 대성당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날을 맞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누구든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성당에 연락을 해놓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성당과는 이야기가 되었나요?”

“미리 서신을 보냈었는데 혼례 진행을 수락해 주셨습니다.”

안젤리카는 간절한 눈빛으로 디안느를 보았다.

“다만, 세렌토 성당에서 진행하려면 영주님의 허락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당이 왕권과 마찬가지의 권력을 갖고 있던 슈라이베른이 아니라면 성당 역시 해당 지역 영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두 군데 영지 후계자의 비밀 혼인이라는 것은 자칫 영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만큼 민감한 일이다.

설령 주교가 그들에게 호의적이라 할지라도 이런 일을 관할 지역 영주에게 비밀로 집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그래서 안젤리카도 혼인에 필요한 두 명의 증인을 아카디아 백작과 디안느 영애에게 부탁하려고 하는 걸 테고.

“어린 아가씨인데 대단하네요.”

레노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안젤리카를 보면서 중얼거렸고 제이든도 동의했다.

과감하고 단호한 데다 생각도 야무진 게 어린 아가씨 같지 않았다.

“혹시 우리 백부님이 허락해 주지 않거나 내가 증인을 서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쩔 생각이었어요?”

디안느 영애가 안젤리카에게 묻자 안젤리카는 그것도 이미 생각해 놓았던 듯 막힘 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주교님과 함께 티아룬 호수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쪽은 아마 미켈레 대공이나 다이스 남작도 짐작하고 사람을 보낼 확률이 높지만, 바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혼인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안젤리카는 대답하면서 제이든의 목에 걸린 은화에 눈길을 주었고 왠지 모르지만 디안느와 아카디아 백작까지 동시에 제이든의 목을 쳐다보았다.

“?”

제이든이 영문을 모르고 목에 걸린 은화를 만지작거리자 아실리가 살짝 꼬리로 제이든을 건드리면서 냐앙 울었다.

-나중에 내가 말해 줄게.

“?”

-그, 카티야 양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서 사람들이 아마릴리스 은화를 쳐다본 거야.

아하! 그럼 옛이야기에 나오는 그 호수가 티아룬인가.

황제 카이엔 6세가 아직 황태자 시절, 북부 순행 중에 어느 호수에서 미녀 아마릴리스를 처음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게 바로 티아룬 호수인 모양인가 보다.

제이든은 그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아실리에게 들으니 북부 지방에서는 티아룬 호수가 단순히 카이엔 황태자와 아마릴리스가 만난 곳 이상으로 특별하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티아룬 호수는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큰 호수다.

그 호수 가운데는 거북이를 닮은 작은 섬이 있다. 황태자는 처음 아마릴리스를 만났던 섬에 그녀를 기념하는 작은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고 정자에는 매년 황태자비 부부가 한두 번 올 뿐인데도 정자가 낡지 않고 그대로 있더니 후일 그들 부부가 차례로 사망한 후 수십 년이 지나도 누가 손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폭풍이라도 불지 않는 한 물결이 거칠지 않은 호수인데도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배를 저어 섬 가까이 가면 묘한 소용돌이가 배를 밀어낸다는 소문이 있었고 겨울에 호수가 얼어도 섬 주변의 얼음이 미끄러운 유리산처럼 솟아올라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차차 섬과 정자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도 멀리서 보기나 하지 섬에 오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양가에서 허락받지 못한 젊은 연인 한 쌍과 그들을 딱하게 여긴 수습 사제 한 명이 호수를 건너 섬으로 갔다고 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아마릴리스와 황태자의 전설이 있는 정자에 축복을 비는 기원을 드리고 싶었다는데,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이 그 섬에서 함께 죽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숙덕였다.

사제는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 줄 사람으로 동행한 것이고.

어쩐 일인지 소용돌이가 그들의 조각배를 밀어내지 않았고 연인들은 아마릴리스의 정자에서 수습 사제의 축복하에 결혼 서약을 했다.

그동안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양가 어른들이 그 소식을 듣고 아마릴리스가 허락한 혼인이니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물러섰고, 젊은 부부는 그 후 아들딸 낳고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잘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북부에서는 이 이야기가 상당히 신빙성을 갖고 있어서 현재까지도 가끔씩 호수 가운데의 섬에서 결혼하려고 나서는 연인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섬까지 가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대부분 실패하고 돌아오지. 안 좋은 경우는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고.”

디안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안젤리카가 대답했다.

“예. 하지만 아주 가끔 성공했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지난 백 년 동안 서넛뿐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거기서 혼례 서약이 있었던 게 삼십 년 전이었지요. 성공할 수만 있다면 나쁜 생각은 아니에요. 그 호수에서 혼례 서약을 했다면 어쩔 수 없이 모두 인정할 테니.”

디안느가 안젤리카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 당찬 소녀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티아룬의 정자에서 아마릴리스 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안젤리카는 말하면서 생긋 웃었다.

“그래도 저는 세렌토 대성당에서 디안느 영애와 아카디아 백작님, 그리고 오스틴 아저씨의 축복을 더 받고 싶네요.”

디안느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녀를 영주의 접견실로 안내했다.

“자, 가서 백부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죠. 지금쯤이면 세렌토 대주교도 소식을 듣고 왔을 거예요.”

* * *

세렌토 백작은 원래 신중한 사람인데 바로 얼마 전 딜런의 일을 겪었기에 낯선 사람을 쉽게 만나려 들지 않고 세렌토 대주교를 먼저 불러들였다.

“예. 혹시 찾아온다면 제가 혼례를 맡겠다고 했습니다.”

대주교는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도 설마 정말 찾아올까 했는데 대단한 아가씨군요. 콜레디오바를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열 살인가 그랬는데 벌써 그렇게 자라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 드는군요. 부친을 닮았나 봅니다.”

그는 안젤리카의 부친인 선대 대공과 친분이 있었다.

세렌토의 주교가 되기 전 젊었을 때 콜레디오바 성당에서 몇 년 일했는데 그때 대공의 눈에 들어 성에 자주 불려 갔었다.

“참 모를 일이네요. 콜레디오바의 공자들과 공녀의 세례식을 모두 제가 진행했는데, 물론 미켈레 공자 때는 제가 젊어서 선임 주교님이 진행하시고 저는 돕기만 했습니다만.”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대 대공도 대공비님도 좋은 분이셨고 미켈레 공자도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사람이 변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제가 콜레디오바를 떠나게 된 것도 미켈레 공자가 대공이 된 후 선대가 아꼈던 사람들을 거의 내쫓는 바람에 자리가 가시방석이 된 탓이 큽니다.”

“그 영애 말이 사실이란 말이군?”

“예. 제가 알기로 다 사실입니다. 저는 또 제 나름대로 얻어듣는 소식이 있어 내심 안타깝기도 했었습니다.”

“내가 허락을 안 해 주면 티아룬 호수로 갈 참인가?”

세렌토 백작이 넌지시 묻자 주교는 머리를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지의 주인으로서 영지에 혹시 분란이 생길까 우려하시는 거야 당연하지요. 백작님이 거절하신다 해도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야 옛 인연도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안쓰러우니 노구를 끌고라도 티아룬에 가서 혹시 아마릴리스 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을지 시험해 볼 생각입니다.”

“이런, 이런,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겠군.”

“영주님이 관대하신 거야 세렌토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주교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특히 연인들에게 관대하시죠.”

* * *

그 무렵 센디니온의 공자 키리안은 비단 상인으로 꾸민 마차 한 대를 몰고 티아룬 호숫가를 돌아서 세렌토로 향하는 산길로 접어든 참이었다.

센디니온 쪽에서 오다 보니 안젤리카가 넘어온 산봉우리와는 반대쪽 산봉우리를 택하게 되었고, 거리는 훨씬 더 멀지만 좀 덜 험하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길이었다.

노스티에라 여신의 축일에는 그러잖아도 큰 장이 열리는데 올해는 디안느 영애의 혼례를 앞두고 있어서 세렌토로 상인들이 몰리고 있어 키리안은 그들 틈에 섞여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상단에 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우리끼리 움직였으면 아무래도 눈에 띄기 쉬웠을 거예요. 다이스 남작이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까마귀 숲에서 살아나온 게 천행입니다.”

키리안의 호위 기사인 니코스가 속삭였고 키리안도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응. 안젤리카 공녀가 여러모로 생각하고 만날 장소를 세렌토로 정한 것 같아. 그나저나 데메티스가 무사해야 할 텐데.”

키리안이 측근 몇 사람을 데리고 센디니온의 성을 빠져나오고 반나절이 못 되어 항상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다이스 남작에게 꼬리를 밟혔다.

그가 혼인 때문에 세렌토로 가는 건 몰랐지만 남작의 추적대는 호숫가의 까마귀 숲에서 키리안 일행을 따라잡았고 단순히 잡아서 성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이려고 들었다.

“내가 외딴 곳으로 나온 참에 사고사로 위장할 셈이었던 것 같아.”

두어 번의 격돌 끝에 쌍방 모두 부상자가 생겼고 키리안은 기사 데메티스가 몇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추적대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동안 몸을 뺄 수 있었다.

“노스티에라 여신의 축일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무사히 세렌토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안젤리카 공녀는 무사할지 모르겠군.”

“닷새 전 소식으로는 그쪽도 추적대가 붙었지만 일단은 무사히 따돌렸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수군거리고 있는 동안 그들이 섞여 있던 상단의 마차들이 차례차례 섰다.

“어이, 거기, 뭘 쑥덕거리고 있어. 잠시 쉬어 갈 참이다.”

상단의 차석 행수쯤 되는 장한이 그들을 향해 외치자 그의 뒤에서 키리안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는 청년이 키리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상단에 끼워 줬으면 알아서 눈치껏 일을 거들어야지.”

욱해서 몸을 일으키려는 니코스의 팔을 꾹 누른 키리안이 재빠르게 말했다.

“티 내지 마, 자네는 지금 상인이야.”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예, 지금 갑니다.”

비단 상인으로 분한 니코스의 옆에서 일을 거드는 종자로 분한 키리안이 일꾼들 쪽을 향해 뛰어갔다.

“나이도 어린 게 게으름을 부리고, 그래선 상단 일 못 해!”

아까의 청년이 키리안을 윽박질렀고 키리안은 싹싹하게 웃으며 굽실거렸다.

“예, 뭐든지 시켜 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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