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80화 (80/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80화

23. 어떤 인연(5)

“그렇습니다. 결혼 상대자는 지금 세렌토 인근 지역으로 오고 있습니다.”

콜레디오바에 외부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 미켈레의 엄격한 관리하에서 안젤리카는 가끔 그들에게 나와 인사를 하고 다과나 산책에 함께하는 일이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병약한 대공비 대신 대공의 누이로서 손님 접대를 하거나, 공녀에게 안목을 넓혀 준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물건을 판매하려면 홍보를 해야 하니 미켈레의 기준에 맞는 자들에게 안젤리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엘로이드의 영주 역시 미켈레의 초대를 받고 콜레디오바에 왔을 때 안젤리카를 본 후 마음에 들어 혼담을 넣었던 것이고.

미켈레로서는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상대에게 안젤리카를 팔려고 한 것이었다.

왕가나 귀족 여인들이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하지만 안젤리카는 평범한 귀족 소녀가 아니었다.

역경이 닥치면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더 강인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후자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귀염만 받고 살던 어린 나이에도 역경에 빠지자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 버텨낸 안젤리카였다.

온실에서 자라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약이 되었는지 그녀는 순순히 미켈레가 정해 준 사람에게 시집가서 그에게 힘을 더해 줄 생각은 없었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숙이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그녀는 암암리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겨울이 깊어도 매화는 피고 돌밭의 바위틈에서도 민들레는 자란다.

성안에 갇혀 사는 안젤리카에게는 길고 어두운 겨울처럼만 느껴지는 세월이었지만 그중에도 잠깐 찾아온 봄은 있었다.

일 년 전, 미켈레의 딸 사비나가 다섯 살을 맞아 대주교의 집도하에 성대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콜레디오바의 귀족 자녀들은 보통 태어나서 한 달 정도 후에 유아 세례식을 하지만 그때는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만 참석해 조촐하게 치른다.

별일 없이 무사히 유아기를 넘겨 자라나면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사이에 정식 세례식을 치르는데 이때는 가세에 따라 친지들을 불러 잔치를 여는 게 관행이었다.

미켈레는 사비나의 세례식을 빙자해 주변 영주들을 대거 초대했다.

그가 대공이 된 후 영지의 세가 많이 약해졌기에 친분을 쌓으면 도움이 될 만한 영주들을 신중하게 골라 초대했는데 예년 같으면 대부분 참석했을 영주들 중 오지 않았거나 대리를 보낸 사람도 꽤 되었다.

콜레디오바의 서쪽으로 티아룬 호수를 끼고 이웃한 센디니온에서는 영주가 병사한 후 공석으로 원로 가신이 섭정 중이라 후계자가 왔다.

센디니온의 공자 키리안은 안젤리카보다 한 살 위의 따뜻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안젤리카는 미켈레의 명으로 귀빈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중 몇 사람과는 다과를 나누거나 산책을 하도록 지시받았는데 키리안은 원래 그중에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귀빈들 중에서 또래의 소년과 소녀가 서로 호감을 가지고 다소나마 가까워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키리안이 콜레디오바에 머문 것은 일주일에 불과했지만, 접대로 바쁜 미켈레가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안젤리카는 키리안과 몇 번의 산책을 같이했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진중한 성품이고 항상 누군가 따르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서로 극히 예의를 차리면서 만났을 뿐이지만, 센디니온으로 돌아가던 날 키리안은 그녀의 손등에 작별의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공녀, 언젠가 꼭 다시 뵐 기회가 있기를 빕니다.”

그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제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이런 것밖에 드리지 못하지만 기념으로 받아주십시오.”

그녀의 손바닥에 놓인 것은 흰 자작나무로 깎은 작은 새 모양의 펜던트였다.

* * *

산책 중에 보기 드문 흰 새가 정원에 날아왔을 때 그가 말한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작은 새를 키웠는데 저 새처럼 온몸이 흰 새였습니다. 길이 잘 들어서 제 손에서 모이를 먹곤 했답니다. 아주 귀여웠지요.”

그는 안젤리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동물을 좋아하십니까?”

“…….”

안젤리카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동물을 좋아했던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살아남기 바빠서 동물을 키우거나 귀여워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키리안의 말을 듣고 나니 기억이 났다.

여덟 살 이전의 그녀는 나비를 따라다니거나 작은 새들에게 모이를 주며 즐거워했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였다.

어느 날 성의 정원에 들어온 노란 들고양이에게 먹던 간식을 나눠주었더니 배가 고픈 것 같은데도 먹질 않았다.

유모에게 말해 고양이가 먹을 만한 것을 구해다 놓고 다음번에 고양이가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가 주었더니 잘 먹는 걸 보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었다.

그 노란 들고양이는 몇 번 낯을 익히더니 안젤리카가 정원에 나갈 때마다 나타나서 졸졸 따라다니다가 성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안젤리카를 정말 잘 따르는 고양이여서 처음에는 들고양이라 더럽다고 밖에 내보내라던 대공이나 대공비도 결국 실내에서 키우도록 허락해 주었다.

“버터컵, 내가 버터컵을 잊고 있었구나.”

처음 고양이를 만났을 때 노란 고양이는 저보다 더 노란 꽃무더기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안젤리카를 향해 야옹 울었었다.

그 꽃의 이름을 따서 버터컵이라고 불렀는데.

고양이는 목욕을 싫어한다던데 같이 자려면 목욕을 시켜야 한다고 해서 처음 목욕을 시켰던 날.

시녀들이 해준다는 걸 내 고양이니까 내가 한다고 직접 목욕을 시켜주는 안젤리카의 서툰 손길에도 버터컵은 꾹 참고 얌전하게 목욕을 했었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같이 먹으며 지냈던 버터컵.

온순하기 그지없던 버터컵은 안젤리카 모녀가 서쪽 별채로 끌려나가던 날 안젤리카를 지키겠다고 그녀를 끌고 나가는 병사에게 덤벼들었었다.

난생 처음 듣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병사의 발에 채여 나동그라지는 버터컵을 끌어안고 어린 안젤리카는 함께 가게 해 달라고 울었었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전속 시녀도 다 쫓아내고 맨몸만 가는 판에 고양이를 어떻게 데려가요?”

안젤리카가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면서 버틴다는 말을 들은 미켈레는 고양이를 죽여 버리라고 했다.

“죽이지 마, 죽이지 마! 안 데려갈 테니 죽이지 마!”

몽둥이를 들고 온 병사에게 안젤리카는 울면서 사정했고 전속 시녀였던 제나가 버터컵을 안고 가면서 말했다.

“아가씨, 제가 데려갈게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대신 제가 돌볼게요.”

그 이후 제나도 버터컵도 보지 못했다.

성에서 쫓겨난 제나는 고향으로 갔다던데, 나중에 서쪽 별채에서 본성으로 돌아온 후 조심스럽게 제나의 소식을 알아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공녀, 왜 우십니까?”

키리안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을 때에야 안젤리카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울지 않았는데, 서쪽 별채의 그 힘든 상황에서도 울지 않고 견뎠고 본성에 돌아와서 하루하루 바늘방석에 앉은 듯 살아가면서도 울지 않았는데.

“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당황한 키리안은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함부로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댈 수도 없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양새였다.

“이,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쓰십시오.”

그는 서투른 손길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사절로 와서 계속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느라 계속 어른스러웠던 그가 그날은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요.”

안젤리카는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어렸을 때 키웠던 고양이 생각이 나서 그만.”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소년 공자는 다 이해한다는 듯 얼른 말했다.

“저도 페이가, 페이는 제가 키웠던 새 이름입니다. 페이가 하늘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사내자식이 새 한 마리 때문에 운다고 아버님은 혼을 내셨지만.”

그는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어머님이 이걸 주셨지요. 페이가 즐겨 앉던 흰 자작나무로 조각한 새입니다. 상하지 않도록 마법 처리를 한 거예요. 이걸 걸고 있으면 페이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무, 물론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지금이야 그런 일로 눈물을 흘리진 않겠지만 공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안젤리카의 눈물이 꼭 버터컵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조용히 산책을 끝내고 정중하게 헤어졌다.

* * *

손바닥에 놓인 작은 새의 펜던트를 보면서 안젤리카는 그에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그 이후 키리안을 다시 볼 기회는 없었다.

두 번 정도 안부 편지가 왔지만 미켈레의 엄격한 감시하에 있던 안젤리카는 극히 단순하고 형식적인 답장을 보냈을 뿐이었다.

미켈레가 안젤리카의 상대로 저울질하는 혼담 상대들 중에 센디니온은 들어 있지 않았고 센디니온 역시 내정이 불안한 상태여서인지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 상태로 소식이 끊겼다.

하지만 엘로이드의 영주와의 결혼이 결정된 후 안젤리카가 스스로 결혼 상대를 찾을 결심을 했을 때, 가세로나 권력으로나 좀 더 나은 몇 명의 후보를 제치고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버터컵처럼 노란 금발의 소년, 키리안이었다.

“아가씨, 센디니온 공자는 아가씨께 혼담을 넣은 일도 없고 그쪽 후계 구도도 불안정한데 괜찮겠습니까? 제 생각엔 하르카의 영주 쪽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미켈레 대공이 거절하긴 했지만 아가씨께 마음이 있어 혼담을 넣기도 했고요. 센디니온이나 콜레디오바보다 무력이 있는 영지라 혹시 일이 성사되면 미켈레 대공도 별말 못할 겁니다.”

가신들 중 몰래 안젤리카를 돕고 있는 레스틴 경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센디니온에 먼저 의사를 타진해 보고 싶어요. 콜레디오바의 공녀와 결혼하게 되면 센디니온의 후계 문제도 정리되지 않겠어요? 만약 센디니온에서 거절하면 그때 하르카에 사람을 보내죠.”

사랑으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엘로이드의 세 번째 후처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고른 사람에게 혼담을 넣어 보고 싶었다.

센디니온은 그리 큰 영지가 아니고 현재 후계 문제가 불안한 와중이지만 안젤리카 생각에는 그래서 더 자신에게 적당한 곳 같았다.

콜레디오바는 현재 내실이 약해져 있기는 해도 전통 있는 명문으로 근동에서 대공 칭호를 허락받은 유일한 곳이었다.

안젤리카에게 혼담을 넣은 사람들 중에는 콜레디오바의 공녀라는 이름값을 보고 데려가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센디니온은 키리안의 부친인 전대 영주가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원로 가신인 다이스 남작이 영주 대리를 한 지가 오래되었다.

작위는 남작에 불과했지만 그가 전대 영주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며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세월이 길어 센디니온에서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삼 년 전 영주가 병사하고 나서 키리안이 당시 열여섯 살이라 어리다는 핑계로 섭정을 계속하면서 스무 살이 되면 영주 직을 넘기겠다고 했다.

이후 센디니온에서도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기 시작했고 남모르게 세력을 구축 중인 키리안은 이제 열아홉이 되었는데 다이스 남작은 2년째 자기 딸과 혼인을 시키려고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키리안이 과연 안젤리카의 제안을 수락할지는 모르나 안젤리카의 생각에 이 혼담은 서로에게 활로가 되어 줄 수 있었다.

밀서를 가지고 떠날 때까지도 레스틴 경은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얼굴이 밝았다.

기꺼이 수락하겠다는 답서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생각보다 훌륭한 공자였습니다. 아가씨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서로 뜻이 통했다지만 이제 혼례가 문제였다.

양쪽 다 대공과 섭정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이라 내놓고 혼례를 치를 수는 없었다.

비밀리에 혼례를 집도해 줄 주교와 증인, 그것도 권위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북부 지방은 남자의 권위가 강하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나 오빠의 뜻에 반하는 결혼을 하는 것이 인정받기 어려운 풍토였다.

아무나 찾아갔다가는 되레 꽁꽁 묶여 미켈레나 다이스에게 넘겨질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세렌토에는 부친과 친분이 깊었던 대주교가 계십니다. 그리고.”

안젤리카는 생생한 초록 눈을 치켜들며 말했다.

“세렌토는 주변에서 가장 공정한 영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연인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었던 디안느 영애라면 저희를 도와주실 거라고 믿고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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