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9화
23. 어떤 인연(4)
“결혼이라고?”
제이든은 그녀의 뒤쪽을 넘어다보았으나 신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야아옹.”
-아무래도 콜레디오바 공녀의 사정이 들리는 것보다 더 나빴나 봐.
제이든의 옆에서 살짝 고개를 빼고 있던 아실리가 중얼거렸다.
“자, 콜레디오바 공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볼까요?”
디안느가 차를 내오게 하고 안젤리카 일행에게도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경비병들을 나가게 하고 포니도 로이드를 붙여서 옆방으로 보내고 나니 방 안에는 안젤리카 일행 외에 아카디아 백작, 디안느 영애, 제이든과 오스틴, 레노아, 아실리와 포이만 남았다.
“이제 듣는 귀는 우리뿐입니다.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이니 안심하고 이야기해 보세요.”
뜨거운 차를 한두 모금 마신 안젤리카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계신 오스틴 아저씨가 아시는 것처럼 저는 부친이 돌아가신 후 이복오빠인 미켈레 대공의 핍박 속에 살았습니다. 오스틴 아저씨나 여기 미나, 그리고 암중에서 몰래 도움을 주었던 몇 분의 가신들이 아니었다면 저희 모녀와 안드레아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살아남기 위해서 공녀의 신분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스틴이 쫓겨난 후 미나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안젤리카는 팔을 걷어붙이고 일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방 일도 하고 세탁이나 바느질 등의 살림은 물론 가구를 고치거나 집을 다듬는 일도 했다.
가끔씩 바뀌는 경비병들이나 본성에서 그들의 상황을 살피러 오는 시종들은 대부분 무덤덤했고 드물게 다소 친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리 심한 대우를 받아도 안젤리카는 묵묵히 견뎌냈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반쯤 정신을 놓아 버려서 일상생활에도 안젤리카와 미나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어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몸과 마음의 병이 깊었다.
안드레아는 남자아이라 더 위험해서 눈에 띄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그렇게 죽은 듯이 살았음에도 안드레아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미켈레는 안드레아를 죽이려고 했다.
가신들 중 일부가 미켈레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안드레아를 대공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이유였다.
안드레아나 안젤리카는 얼굴도 모르고 말 한번 섞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안드레아는 어느새 불온 세력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누나, 살려 주세요!”
미켈레가 보낸 병사들은 병든 줄리아나의 품에서 안드레아를 억지로 빼앗아 끌고 갔다.
반란의 주도자들은 사흘 뒤 성 앞 광장에서 참수하기로 되었으나 안드레아만은 어린 나이에다 선대 대공의 적자임을 감안해 대중의 눈앞에 내세워 모욕을 주지 않고 감옥에서 교살한다고 했다.
선처는 무슨!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를 광장에서 참수했다가 영지민들의 반감을 살까 봐 그런 거면서.
이를 꽉 물었던 안젤리카는 안드레아를 끌고 가는 병사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대공을 뵙게 해 주세요. 제발, 대공을 뵙게 해 주세요.”
유폐 초기에 몇 번 대공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리 간절히 부탁해도 거절당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만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음 날 알현 허락이 떨어졌다.
안젤리카는 대공저의 내실로 불려갔다.
5년 만에 보는 이복 오라버니는 그동안 호의호식했을 것에 비해 얼굴이 좋지 않았다.
몸은 예전보다 불었으나 낯빛이 파리했고 눈빛도 맑지 못했다.
“대공 각하.”
안젤리카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자 미켈레는 짐짓 당황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저런, 저런, 안젤리카, 그러지 말고 일어나 앉아라. 누가 보면 내가 아주 야박한 사람인 줄 알겠구나.”
“…….”
그녀가 순순히 일어나서 준비된 의자에 앉자 미켈레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눈길이 어쩐지 뱀의 것처럼 차가워서 안젤리카는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투명할 정도로 옅은 갈색 눈, 머리와 눈 색은 다르지만 이목구비는 그녀와 꽤나 닮은 얼굴의 오라버니는 어렸을 때 손을 잡고 따라다녔던 오빠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꽤 많이 컸구나. 네가 이제 몇 살이지?”
“열세 살입니다.”
“벌써 그렇게나 됐나? 그래서 슬슬 아가씨 꼴이 나는구나.”
미켈레가 그녀를 훑어보는 동안 안젤리카는 목이 바싹 마르는 것을 참았다.
안드레아의 구명을 부탁해야 했지만 말을 꺼낼 틈을 잘 봐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이복 오라버니는 자칫 잘못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그래, 알현을 청한 이유는?”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지만 안젤리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공 각하. 안드레아의 구명을 청합니다.”
뭔가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미켈레는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그래, 나도 용서해 주고 싶다만 신하들이 난리여서 말이지. 반역도들을 모두 처형하면서 그 수장을 살려 놓을 수가 있겠느냐.”
미켈레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각하도 아시잖아요. 우리는 5년 동안 한 번도 서쪽 별채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안드레아가 어떻게 그들과 연관될 수 있겠어요?”
“…….”
“정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유배를 보내 주세요. 어머니와 저도 같이, 멀고 험한 땅으로 우리 셋만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없는 듯이 살 테니까 안드레아의 목숨만은 남겨 주세요. 쓸모도 없는 어린 동생을 죽였다고 괜히 평판이 나빠지시면 안 좋잖아요.”
그녀가 간절히 애원하는 동안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똑 똑 두들기면서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미켈레는 잠시 후 그녀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말을 꽤 잘하는구나. 목소리도 호소력이 있고.”
“?”
“한번 일어서 보아라.”
그녀가 일어서자 한동안 그녀를 뜯어보던 미켈레는 머리를 옆으로 비딱하게 기울이면서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비쩍 마르긴 했지만 어미를 닮아서 예쁘게 자랐구나. 네 어미가 얼굴은 꽤나 봐줄 만했었으니까.”
당신이 십 년이나 어머니라고 불렀던 사람이야.
어릴 적 당신이 아프면 당신 침대 옆에서 밤을 새웠던 사람이고, 당신이 먹고 싶다는 거, 당신이 갖고 싶다는 거 뭐든지 챙겨주지 않은 적이 없었지.
친자식인 우리보다 당신을 더 아꼈던 사람이야.
안젤리카는 목구멍 안에서 울컥 치솟아오르는 뭔가를 삼키느라 고개를 숙였다.
불안하게 팔걸이를 따닥거리던 미켈레가 짐짓 다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이, 네 말이 맞다. 괜히 어린 아우를 죽인 형이라는 말을 들을 필요는 없겠지. 안드레아는 유배를 보내도록 하마.”
“정말요?”
설마 이렇게 쉽게 말을 들어줄 리가?
깜짝 놀란 안젤리카가 미켈레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깜짝 놀라니까 겨우 제 나이처럼 보이는구나. 너무 어른스러운 걸 보니 오라비 마음이 안 좋았다.”
미켈레는 등받이에 늘어져 있던 몸을 앞쪽으로 세웠다.
“이렇게 하자. 안드레아는 죄를 지어 원래 사형을 당해야 할 걸 유배를 가는 것이니 가족을 달고 갈 수는 없다. 혼자 가도록 하고 네 어미는 원래대로 서쪽 별채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너는…….”
그는 손가락을 딱 쳐서 소리를 내었다.
“내가 그리 자비 없는 오라비는 아니다. 너도 고생깨나 했으니 너 하나 정도는 이제 용서해 줘도 되겠지. 너는 그만 본성으로 들어오너라.”
“예?”
갑자기 본성으로 들어오라고?
“그래, 안드레아는 어쩔 수 없지만 넌 여자앤데 계속 밖에서 키울 순 없지. 네가 어릴 때 날 잘 따르기도 했고 돌아가신 아버지께도 죄송하니 그만 들어오너라.”
“하지만 안드레아를 혼자 보내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를 혼자 두는 것도…….”
“항명할 셈이냐? 버르장머리 없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미켈레의 언성이 높아졌다.
안젤리카는 입을 다물면서 생각했다. 인질인가 보다. 셋을 모두 흩어 놓고 서로가 서로의 인질이 되게 하는 것.
어쩌면 나를 다른 데 쓰려고 하는 걸까?
어린 마음에도 조금 의심이 들었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안드레아와 어머니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래야 착한 아이지. 말만 잘 들으면 공녀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마. 네 어머니와 동생의 목숨도 살려 주고.”
그 후 안드레아는 감시병과 함께 북쪽의 험지에 보내졌고 안젤리카는 성에 들어와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며 살았다.
말은 대공의 누이라고 했고 의식주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가시밭길을 걷듯 눈치를 보는 생활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서쪽 별채에 어머니를 보러 갈 수 있었으나 아들과 딸을 모두 빼앗긴 줄리아나는 그 후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미켈레 콜레디오바가 영주가 된 후 콜레디오바 영지의 세가 많이 약해졌다는 말은 들었지. 후계자로는 아마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카디아 백작이 디안느에게 말을 건네자 안젤리카가 말했다.
“예. 그러나 그 후계 건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미켈레는 정비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두지 못했고 애첩에게서 한 명의 딸을 보았다.
그러나 그 딸의 출생에 대해 가신들 간에 암암리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그 아이는 미켈레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켈레의 애첩인 셀리나는 원래 약혼자가 있었는데 변방 지역 파견 근무를 나갔다가 의문의 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다.
항간에는 그녀의 미모에 반한 미켈레가 그녀를 빼앗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셀리나는 미켈레의 애첩이 되자마자 회임하여 아홉 달 후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이제 여섯 살이고 미켈레의 유일한 자식으로서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저러나 내부 문제라서인지 안젤리카는 말을 아끼고 입을 다물었지만 그 딸에 대해 왜 말이 나오는지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눈을 찌푸렸던 디안느가 물었다.
“내가 듣기로 콜레디오바의 영주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가 있다던데, 직계만 열 수 있는 열쇠라던가, 혈통을 증명하는 유물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예. 견문이 넓으시군요. 사실은 열쇠가 아니고 상자입니다.”
안젤리카가 눈을 반짝였다.
콜레디오바 가문에는 선조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상자가 하나 있다.
상자 안에는 영주의 도장을 넣게 되어 있는데, 이 상자가 콜레디오바의 직계 혈통이 아니라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당한 직계 혈통이 없을 때는 상자가 영주로 인정하는 자의 손에만 열린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항상 직계가 영주에 올랐기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콜레디오바는……, 꽤나 혈통에 집착하는 모양이군요.”
디안느가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세렌토는 혈통보다 능력을 더 평가하는 분위기라 조금 이질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미켈레의 딸은 그 상자를 열지 못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몇 년 더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 아이가 상자를 열지 못한 것 때문에 더 말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혼인 이야기는?”
디안느의 물음에 안젤리카는 하기 싫은 이야기를 하는 듯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제게 결혼을 명하셨습니다. 엘로이드의 영주와.”
제이든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오스틴이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그럴 수가! 엘로이드의 영주는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안젤리카의 뒤에 서 있던 여자, 미나가 오스틴에게 답하듯 분개한 어조로 말을 토했다.
“게다가 세 번째 결혼이에요. 그런 자리에 우리 아가씨를 팔아넘기는 대신 금전적 지원을 받기로 했답니다. 자기가 통치를 잘못해서 영지 살림을 망쳐 놓고 이제 아가씨를 팔아서 엘로이드의 지원을 받겠답니다.”
겸사겸사 후계자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직계 혈통도 치울 셈이겠지.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부탁해 봤는데.”
미켈레는 그녀의 턱을 받쳐 들면서 비웃었다.
“뭣 때문에 너를 열여덟이 되도록 키웠다고 생각하느냐? 이제 밥값을 해야지.”
잠시 생각하던 디안느가 말했다.
“그럼, 나와 제라르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결혼이 그 결혼은 아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