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78화 (78/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8화

23. 어떤 인연(3)

“오스틴 아저씨, 여기서 만날 줄은!”

소녀가 금방 눈이 그렁그렁해졌고 오스틴도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둘 다 금방 자신을 추슬렀다.

오스틴은 뒤로 물러서서 낮게 숨을 내쉬었고, 소녀는 침착하게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디안느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렌토 영애. 안젤리카 데 콜레디오바입니다.”

* * *

안젤리카 데 콜레디오바는 옛 다하르와 엘데온의 국경 지역, 레타논 바로 아래쪽 콜레디오바 영지의 공녀로 태어났다.

쿠르토스크라든가 예프닌그라드라든가 하는 북부 지역 영지들과 엘로이드라든지 센디니온이라든지 하는 서부 영지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남동부 아르카니오 식 이름의 영지가 끼어 있는 것은 콜레디오바 공국을 세웠던 선조가 대상단을 이끌고 엘데온으로 이주했던 아르카니오 귀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후일 콜레디오바가 엘데온으로 흡수된 이후에도 엘데온은 콜레디오바의 자치를 최대한 인정해서 콜레디오바의 영주는 대공이라는 직위를 유지했고 대륙이 카이엔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그 전통은 이어졌다.

북서부에서도 부유하기로 이름난 콜레디오바 영지의 공녀로 태어난 안젤리카는 공주 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 * *

“아, 추워!”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던 안젤리카는 전담 시녀를 불렀다.

“제나! 제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잠이 깨고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면서 소녀의 목소리가 금방 가라앉았다.

그렇지. 제나는 이제 없지.

유모도, 제나도, 곁에서 안젤리카를 보살펴 주던 다정한 사람들은 이제 없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오스틴 아저씨는 남아 있어.

안젤리카는 그렁그렁해지려던 눈을 얼른 손등으로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작은 방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썰렁했다.

본성의 화려한 내원에서 이 서쪽 별채로 옮긴 지도 벌써 달포가 넘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방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변했고 어린 안젤리카는 변해 버린 환경이 낯설기만 했다.

반년 전 콜레디오바 대공이 낙마 사고 후 한 달쯤 앓다가 사망한 후 그녀의 주변 환경은 소용돌이처럼 정신없이 휘몰아치며 바뀌어 갔다.

대공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다.

소년 시절 맞이했던 첫 아내에게서 본 아들 미켈레, 그녀와 사별한 후 두 번째로 맞은 대공비 줄리아나가 낳은 딸 안젤리카와 아들 안드레아였다.

사고 후 병석에 누웠던 대공은 미켈레에게 동생들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안젤리카는 여덟 살, 안드레아는 네 살이었으므로 이미 스물이 넘었던 미켈레가 대공위를 잇는 것에 이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미켈레가 모친을 병으로 잃은 것은 여덟 살 때였고 줄리아나가 대공비가 된 것은 그가 열한 살 때였다.

그때부터 10년간 줄리아나는 미켈레를 친자식처럼 키웠고 이복형제들 간의 사이도 좋았기에 미켈레가 대공위에 오른 후 그처럼 달라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미켈레는 대공이 되고 두 달도 되기 전에 요양을 빙자해 줄리아나와 안젤리카, 안드레아를 구석진 서쪽 별채에 연금했다.

그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가차 없이 처벌했고 줄리아나의 친정 가문은 거의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서쪽 별채에는 시녀와 시종들도 데려갈 수 없었고 감시하는 경비병만 몇 명 남겼을 뿐이었다.

반년 전 선대 대공이 안젤리카와 안드레아의 경호를 위해 직접 붙여 주었던 젊은 수습 기사 오스틴이 그들 곁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에 가까웠다.

“시종 한 명 정도는 남겨도 된다 하셨지만, 자네 정말 아가씨 옆에 남겠나? 굳이 자네가 남을 필요는 없네. 정규 기사가 될 기회를 포기해도 좋은가?”

오스틴은 물론 갈등했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옆에 없는 대공비와 어린 두 아이를 남겨두고 자신마저 떠날 수는 없었다.

그는 기사가 되려던 목적을 포기하고 안젤리카의 옆에 남았다.

“오스틴 아저씨, 어머니는 일어나셨나?”

“…….”

어린 안젤리카는 재빨리 옷을 입으면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귀족 가문에 태어나 곱게 자라서 대공비가 된 후에도 평탄하게만 살아온 줄리아나는 금슬 좋던 대공이 사망한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후 벌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해 반쯤 정신을 놓고 말았다.

하루 종일 무력하게 허공만 바라보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 사이에서 여덟 살의 안젤리카는 몇 달 만에 훌쩍 조숙해져 버렸다.

“어머니, 일어나셨어요?”

옆방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는 잠옷바람으로 침대 위에 앉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네 살짜리 동생 안드레아가 칭얼거리고 있었다.

“누나, 누우나!”

안드레아가 안젤리카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었다.

안젤리카는 동생의 손을 잡고 욕실로 데려가 씻는 것을 도와준 뒤 다시 방으로 데려가 옷 입는 것도 도와주었다.

더운물이라도 잘 나오면 좋을 텐데 욕실의 마정석은 구형인 데다 오래된 것이라 미지근한 물이 나올 뿐이었다.

“누나, 배고파!”

안드레아는 누이의 얼굴을 보면서 종알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오늘 식료품 오는 날이야.”

원래는 어제 왔어야 한다.

닷새에 한 번 식료품을 가지고 오는 본성의 하인이 게으름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본성 측에서 그들을 괴롭히려고 그러는 건지.

안젤리카는 안드레아를 데리고 별채 뜨락의 작은 그네에 앉아서 다리를 동동 흔들었다.

별다른 놀잇감도 없는 별채에서 오스틴이 만들어 준 그네는 그나마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아가씨, 이거라도 조금 들고 계세요.”

오스틴이 다가와서 그녀에게 종이에 싼 것을 내밀었다.

“어제 남겨 놨던 빵입니다.”

식료품이 최근 제때 오지 않는 게 신경 쓰여 빵이라도 조금 남겨 놓았던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오스틴은 아이들에게 빵조각을 내밀었다.

“오스틴은?”

“전 배 안 고픕니다. 그리고 좀 있으면 식사가 올 거니까요.”

손바닥만 한 굳은 빵조각을 세 조각으로 쪼갠 안젤리카는 가장 큰 걸 안드레아에게 주고 중간 것을 오스틴에게 내밀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경비병들 식사는 꽤 괜찮게 나옵니다.”

별채를 지키는 다섯 명의 경비병들에게 따로 나오는 식사가 대공비 가족에게 나오는 것보다 푸짐했다.

오스틴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기에 눈치를 보아 가며 조금씩 음식을 빼돌리려 해 봤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굳은 빵조각을 먹고 난 안젤리카가 동생을 오스틴에게 맡기고 방으로 갔다.

“어머니, 이거라도 조금 드셔 보세요.”

초점 없이 공중을 헤매고 있던 줄리아나의 초록 눈이 안젤리나의 목소리를 듣고 서서히 내려와 딸의 얼굴에 맺혔다.

힘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는 괜찮다. 너 먹으렴.”

“조금이라도 드셔야 힘이 나지요.”

줄리아나는 힘없이 손을 저었다.

조그만 어깨를 늘어뜨리고 머리를 숙인 채 방을 나오는 안젤리카를 보면서 오스틴은 마음이 아파서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아가씨도 그렇고 대공비님을 보살피려면 아무래도 여자 손이 필요할 텐데, 제가 본성에 하녀 한 명만이라도 보내 달라고 다시 부탁해 보겠습니다.”

풀이 죽어 있던 안젤리카는 깜짝 놀라며 작은 손으로 오스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괜찮아……. 어머니도 내가 돌보고 안드레아도 내가 볼게. 오스틴 아저씨 너무 애쓰지 마. 그러다 오스틴 아저씨까지 쫓겨가면 어떻게 해. 그러면 정말 아무도 없어지잖아.”

“너무 걱정 마세요. 아가씨. 지난번에 본성의 집사장에게 부탁했을 때 집사장이 어떻게든 하녀 한 명 정도는 보낼 수 있게 애써 보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안젤리카는 오스틴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 난 괜찮아. 난 혼자서 옷도 입을 수 있고 씻을 수도 있어. 나 청소도 할 수 있고 안드레아도 돌볼 수 있어. 그치만 어머니는……, 어머니는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대공 생전에는 응석받이 고명딸로 귀하게 자란 아가씨였다.

아직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부친을 잃고, 믿고 따르던 오빠에게 버림받고,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고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훌쩍 자라 버린 아이가 애처로웠다.

나이 터울이 많이 지니 후계에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미켈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무리 친형제처럼 자랐다 해도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안젤리카의 경호를 맡았던 반년 동안 보았던 대공 가족은 모두 화목해 보였는데.

웃는 얼굴 뒤에 그토록 깊은 증오를 감추고 있었던 미켈레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계모 밑에서 크는 게 서럽다지만 미켈레 공자, 아니 이제 대공이지, 미켈레 대공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요!”

빨래를 하던 미나가 분개했다.

대공비의 침실에도 드나들고 하려면 아무래도 여자 손이 필요하다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한 명 허락받은 하녀였다.

그나마도 미나 이전에 처음 왔던 하녀는 심술궂고 게을러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아이들을 괴롭혔다.

신임 대공의 눈 밖에 난 안젤리카 가족을 돌보는 일을 맡은 게 못마땅하고, 서쪽 별채에서 나가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내던 그녀는 미나가 오자마자 신이 나서 인사 한마디 없이 내뺐다.

“오스틴 씨는 콜레디오바에 오신 지 몇 년 안 되니까 잘 모르실 거예요. 전 어릴 때 대공저에 들어와서 내원의 잔일부터 시작했고 지금까지 쭉 내원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미켈레 공자님이 크는 것도 계속 봐 왔는데…….”

그녀는 비누거품 묻은 손을 앞치마에 대충 문지르고 이마의 땀을 씻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미켈레 공자가 원래 까칠하고 예민한 면이 있지만 그런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세상에 못된 계모가 많다고 하지만 줄리아나 마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거든요. 안젤리카 아가씨나 안드레아 공자님보다 미켈레 공자님을 더 아끼면 아꼈지 조금도 다르게 대하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대공 각하도 아이들 간에 차별을 두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요. 예전에 내원에서 일하던 시녀들은 다 그만두거나 쫓겨나고 미켈레 공자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만 남았어요. 저 같은 하녀들이야 아무 힘도 없고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니까 그냥 뒀나 보지만.”

미나가 대야에 담긴 빨래를 거칠게 건져내자 비누 거품이 장작을 패고 있던 오스틴 쪽으로 튀었다.

“어머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있으나 없으나라뇨. 미나 양이 와 줘서 얼마나 힘이 되는데요. 저 혼자 있을 때는 뭘 좀 도와드리고 싶어도 대공비님 방에 들어갈 수도 없고 여러모로 난처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건 없어도 경력은 제법 길어서 하녀들 사이에선 그래도 말발이 좀 서거든요. 제가 오겠다고 나섰더니 쉽게 보내줬어요.”

오스틴은 그녀를 힐끔 보았다.

대공의 냉대를 받는 서쪽 별채에는 물자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고, 감금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해야 하는 데다 한번 오면 언제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녀들도 다들 기피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냥 내원에 있었다면 부하녀장이 되었을 거라는 말이 있던데?”

“됐어요. 됐어. 까짓 하녀장이나 부하녀장 하면 뭐해요. 골치만 아프지.”

미나는 물 묻은 손을 흔들며 생긋 웃었다.

“오스틴 씨도 정규 기사가 될 기회를 포기하고 아가씨 옆에 남으신 거잖아요. 똑같죠 뭐.”

“…….”

“안젤리카 아가씨 혼자 대공비님 수발들고 안드레아 공자님 챙기고 하는 거 보면 너무 안됐어요. 예전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어리광만 피우는 게 철모르는 아기 고양이 같은 아가씨였는데.”

오스틴도 그렇게 생각했다.

부친 사망 전의 안젤리카는 또래에 비해서도 더 어렸다.

공부하는 것도 늘 꾀를 피웠고 가정교사를 따돌리고 정원의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시중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아기자기한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애였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까부는 아이여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금방 울음을 터뜨리고 주저앉아 버릴 줄 알았는데, 정작 집안에 환난이 닥치자 가장 야무지게 버티는 것이 안젤리카였다.

* * *

‘그런 아가씨가 저렇게 컸구나.’

오스틴이 그녀의 옆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일 년에 불과했다.

대공비 가족에게 지나치게 충성한다는 이유로 결국 미켈레 대공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콜레디오바 영지의 출입을 금지당하고 중부 지방을 떠돌다 리마타운의 치안대에 입대한 후 바쁜 생활 속에 시간이 흘렀다.

가끔 북쪽 소식을 전해 들어보면 몇 년은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지만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세월이 지나면서 미켈레 대공도 조금 관대해졌다는 것 같았다.

전 대공비와 그 자녀들에게 이전처럼 혹독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해서 조금 안심이 되긴 했으나 안젤리카는 오스틴의 가슴속 한 모퉁이에 숨어 있는 가시처럼 깊이 박혀 있었다.

어쩌다 예전의 안젤리카와 비슷한 여자아이를 보거나 문득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가슴속의 가시가 찌르르 울리면서 통증이 오곤 했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유폐되어 있지는 않고 대공의 누이로서 조용히 살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저런 모습으로 여기까지 오신 거지.’

딱 봐도 몰래 나와서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세렌토까지 온 게 분명했다.

오스틴의 궁금증에 대답하듯 디안느 영애가 물었다.

“콜레디오바 공녀. 저를 만나고자 하셨다던데 연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안젤리카는 자세를 바로 하고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디안느 세렌토 영애와 제라르 드 아카디아 백작님께 부탁드립니다. 제 결혼의 증인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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