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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76화 (76/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6화

23. 어떤 인연(1)

북쪽 탑의 작은 방에 갇힌 딜런은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후계 자리를 욕심낸 게 잘못된 걸까?

아니다. 애당초 후계 자리는 내게 오는 게 맞았는데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세렌토 백작이 잘못한 거다.

그래서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거다. 나도 형님이나 디안느를 해치고 싶진 않았다고.

딜런은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십 대 후반이었던 사촌 형이 세렌토 백작 작위를 이어받고 영주가 되었을 때 딜런은 열세 살이었다.

세렌토 백작은 딜런을 귀여워하고 아껴 주었고 딜런도 백작의 사촌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백작은 이십 대 초반에 혼인을 했으나 서른이 훌쩍 넘도록 자식을 두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백작이 딜런을 양자로 들일 가능성을 점치곤 했다.

딜런 자신도 은근히 기대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후계자로서 능력을 보일 자신도 있었다.

백작에게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라면 백작의 친아우인 프레도가 있었지만 그는 몸이 너무 약해서 후계자로는 부적합했다.

프레도가 병사하고 나서 백작 부부가 디안느를 친딸처럼 키우기 시작했지만 디안느는 너무 어리고 게다가 여자아이였다.

먼 친척까지 둘러보아도 후계자로는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백작이 디안느를 후계로 낙점할 줄은 몰랐다.

어린 여자아이 아닌가. 내가 디안느보다 모자랄 게 뭔가. 남자인 데다 나이도 경험도 더 많은데. 디안느보다 촌수가 겨우 하나 더 멀 뿐 그리 먼 친척도 아니건만.

딜런은 겉으로는 늘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쌓였다.

어릴 때부터 사촌 형의 총애를 받고 자란 탓에 배신감이 더 심했다.

하지만 디안느는 어릴 때부터 백작 부부가 직접 키우면서 교육을 받게 했고 재능이나 능력, 인품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후계 구도가 흔들릴 상황이 아니었다.

딜런이나 크리스토가 내심 불만이 있었다 해도 드러낼 수 없었고.

후계 자리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 것은 디안느와 아카디아 백작의 혼인이 정해진 후부터였다.

처음 세렌토 백작은 디안느가 그대로 영주 자리를 잇게 하고 대리자를 세워 세렌토를 통치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리도 먼 아카디아의 안주인이 될 디안느가 세렌토까지 다스리다 보면 세렌토가 아카디아에 먹히고 말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딜런과 크리스토가 반대 의견을 주도했다.

디안느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만약 다음 대에 디안느의 아이가 세렌토의 영주 자리를 잇는다면 아카디아에서 자란 영주가 세렌토를 다스리게 된다.

세렌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세렌토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영주가 나와도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디안느 스스로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마음을 많이 쓰고 있었던 터라 결국 그녀 자신이 먼저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다.

그러자 딜런과 크리스토 사이에 후계 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친족은 아니지만 가신들 간에 인망이 좋고 세렌토 백작의 신뢰를 얻고 있는 에머리 자작까지 후계 물망에 올랐다.

말이 되나? 에머리는 친족도 아니고 크리스토는 경험도 부족하고 집안도 어수선한데.

크리스토에게 후계를 맡겼다간 그 부친이 영지의 재정을 쥐처럼 파먹을 것이었다.

딜런은 저를 두고 다른 사람과 저울질하는 사촌 형이 못마땅해 속이 부글부글 끓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그 노인, 기묘한 분위기의 골동품 상인을 만났다.

여섯 자루가 한 조인 동방의 단검을 판매하러 왔던 골동품상 노인은 이 단검이 센 왕조 2차 왕자의 난 때 후계자를 바꾸었다는 전설의 단검이라는 말을 딜런에게 전해 주었다.

혈연관계가 있는 친족에 한해, 대상자의 피와 소유자의 피를 함께 묻히면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후계자는 당연히 딜런 경이 돼야지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평소 의심이 많은 편인데 노인의 말에는 이상하게 딜런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여섯 자루 중 어느 것이 그 단검인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딜런은 여섯 자루를 모두 구매할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골동품상 노인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옛 물건에 이런저런 전설이 붙는 것은 흔한 일이고, 여섯 자루의 단검은 그런 전설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구매할 만큼 좋은 물건이었다.

단검을 구매한 후 골동품상 노인에겐 재미있는 전설이라고 웃으며 돌려보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 아닌가.

딜런은 신분을 숨기고 이름 있는 감정사를 불러 단검을 감정하게 해 보았다.

처음 불렀던 감정사는 가치 높은 골동품으로 감정했을 뿐 색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역시 그냥 골동품에 불과한가 싶었는데 제이든 로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한 번 더 감정을 맡겨 보기로 했다.

반신반의했는데 정말로 제이든 로스가 기대했던 붉은 손의 단검을 찾아내 준 것이다.

혹시라도 정말 붉은 손의 단검이 나온다면 입을 막아버릴 준비를 했었는데 미꾸라지 같은 감정사가 눈치를 채고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여러모로 일이 흐트러졌다.

그 감정사가 다시 세렌토에 오지만 않았어도 일이 순조로웠을 텐데.

하필 세렌토로 올 건 또 뭔가. 그는 탄식했다.

얼굴을 알아본 측근이 세렌토에 도착하기 전에 감정사를 처리하려고 했는데 운도 좋은 감정사는 또 살아났다.

활을 쏘았던 측근은 분명 가슴을 꿰뚫었다고 장담했건만 어떻게 살아 온 건지.

감정사가 문관국 마법유물부의 마법사와 함께 오는 바람에 무리하게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를 고용해 뽑아낸 세렌토 백작과 디안느의 피를 자신의 피와 함께 단검에 묻혔다.

망할 감정사가 탁자를 차서 단검을 쏟아 버리는 바람에 어느 것이 진짜 붉은 손의 단검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어서 여섯 자루 모두에 묻혔고 가장 눈여겨봤던 단검은 자신이 지녔다.

단검의 출처에 혼동을 주고 크리스토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크리스토에게 가짜 상인을 보냈고 다른 단검은 성내에 뿌려 놓았다.

디안느에게 가길 바라고 포니의 장난감 통과 아카디아 백작에게 단검이 가도록 설계했다.

망할 감정사가 자신을 알아보지만 않았더라도 잡아뗄 수 있었는데.

딜런은 다시 머리를 무릎에 묻었다.

그 노인의 말을 들을 때는 마치 홀린 것처럼 모든 일이 그 노인의 말대로 풀릴 것 같았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됐을까.

* * *

“어우, 날이 찬데요.”

꺅꺅거리며 후원을 뛰어다니는 포니와 포이를 보며 앉아 있던 제이든이 어깨를 떨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오스틴이 맞장구를 쳤다.

“이제 11월인데 추울 때도 됐죠.”

“확실히 북쪽이고 지대도 높아 그런지 세렌토가 일찍 추워지네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하르는……, 그러니까 옛 다하르 지방은 지금쯤이면 눈이 쌓였을 겁니다. 여기도 곧 눈이 올 때가 됐네요.”

단풍 든 나무 밑에서 포이가 나뭇가지를 집어 들더니 홱 내던졌다.

포니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뼉을 치자 오스틴이 미소를 머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로이드가 포니를 주시하고 있었다.

“로이드 씨가 평소엔 싹싹하더니 오늘은 말도 없고 경호에만 집중하고 있네요?”

“아, 저한테 한 소리 들었습니다.”

오스틴은 멋쩍은 듯 턱을 긁었다.

“경호하는 자세가 너무 안이한 것 같아서요. 장난감 통에 들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단검을 아가씨가 차도록 놔둔 것도 그렇고.”

제이든은 포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오스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오스틴 씨는 포니 아가씨에게 신경을 많이 쓰시는군요?”

“음…….”

잠시 머뭇거리던 오스틴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처음 경호했던 사람이 딱 포니 아가씨 정도 나이의 어린 아가씨였습니다. 귀엽고 순진한 아가씨였어요. 그 아가씨도 저렇게 강아지나 고양이 등 작은 동물과 노는 걸 좋아했지요.”

“아, 전에도 한번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셨던 듯한데 정이 많이 드셨던가 봐요.”

“예, 그때는 저도 젊어서 아이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어린 딸이나 막내 누이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이더니 마치 잘못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커다란 발끝으로 흙을 문질렀다.

“저는 그 아가씨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오스틴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한 표정을 보고 제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오스틴 씨는 이제 리마타운으로 돌아가나요?”

“예, 붉은 손의 단검 문제는 얼추 해결이 되었으니 제이든 씨가 북쪽으로 떠나실 때 여기서 헤어지려고 합니다.”

“여기 후계 문제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세렌토 백작이 가신들과 의논해 결정한다고 하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마 디안느 영애가 후계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고 에머리 자작이 영주 대리를 하게 될 듯하더군요.”

“흠,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가.”

제이든이 고개를 갸웃하자 오스틴이 말했다.

“중부나 남부 같았으면 처음부터 별문제가 안 될 일이었는데 북부 쪽으로 갈수록 여자가 영주 직을 맡는 것에 대해 반감이 좀 있거든요. 옛날보다는 훨씬 인식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다하르가 좀 심한 편이었지. 무를 숭상하는 국가라서 그런가.

무릎 위에서 야옹 소리가 들려와서 제이든이 흠칫 놀랐다.

그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누워 있던 아실리가 하품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세렌토는 백작이나 디안느 영애 보면 가풍이 소탈한 것 같아. 혈통에도 그리 집착하지 않는 것 같고. 내가 어제 레노아 양이랑 디안느 영애가 이야기하는 거 조금 들었는데, 에머리 자작이 운영 잘하면 나중에 대리 칭호 떼고 영주 직을 아예 넘겨줄 생각도 있는 거 같았어.

“오호!”

제이든은 오스틴을 의식해서 대답은 하지 않고 끄덕거리기만 하면서 아실리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제 일어나야 하지 않아? 더스틴타운의 골동품상에 가본다며?

더스틴타운은 세렌토 영지 외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마을이라기엔 크고 도시라기엔 조금 작은 규모의 타운인데 그 뒷산에 아카디아 백작 소유의 광산이 하나 있었다.

일반적인 광산이 아니라 디아니늄이라는 특이한 광석이 채굴되는 곳인데 보석류는 아니나 활용도가 높아서 최근 점점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금속이었다.

“예전에 아카디아 백작이 디안느 영애를 만나러 와서 세렌토를 돌아보다가 우연히 그 산에서 특이한 광석을 발견했다지요. 그때만 해도 쓸모없는 광석이라고 여겨졌던 건데 아카디아 백작은 디안느 영애와 함께 발견한 광석이라고 디아니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산을 샀어요.”

연인의 이름을 붙인 광석이 쓸모없는 돌이라는 이름을 듣게 하지 않으려고 활용도를 찾다가 연마하면 독특한 광채를 띠는 데다 내구성이 좋은 디아니늄의 활용성을 개발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카디아 백작이 상당히 낭만적인 사람이네.

레노아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에도 광산을 둘러보러 더스틴타운에 갔던 아카디아 백작에게 단검을 가진 골동품상이 접근해 왔었다기에 제이든과 레노아는 북쪽으로 떠나기 전에 더스틴타운의 골동품상을 한번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딜런도 정체를 모른다고 했던 그 골동품상 노인이 아직도 거기 남아 있을 리는 없겠지만 혹시 남아 있는 단서라도 있을까 해서.

“자, 얘들아, 이제 그만 일어서자. 더스틴타운에 가서 점심 먹기로 했잖아.”

뛰어다니고 있던 포이와 포니가 돌아보더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왔다.

“아저씨, 아저씨, 포이 좀 봐요!”

포이가 입에 나뭇가지를 문 채 깡충깡충 뛰어왔고 포니가 그 뒤를 따라왔다.

“아저씨, 포이가 굉장한 거 보여줄게요!”

포니가 숨을 할딱거리며 멈춰 서더니 포이의 앞 2미터 정도의 거리에 서서 포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

토끼는 뒷발로 일어서더니 입에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앞발에 잡고는 오스틴을 쳐다보았다.

또 저걸 던질 모양이네. 토끼의 앞발로는 아무리 던져 봐야 바로 앞에 떨어질 뿐이지만 그래도 포이가 즐거워하니 제이든은 박수를 쳐 줄 준비를 했다.

제이든과 오스틴, 로이드와 아실리까지 모두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걸 확인한 포니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포이에게 신호를 주었다.

포이가 짧은 앞발로 나뭇가지를 힘껏 던졌다.

“와! 굉장하……!”

던지자마자 박수를 치면서 감탄하던 제이든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가능해?

포이 바로 앞에 떨어져야 할 나뭇가지가 포니의 머리 위를 훌쩍 넘어가서 등 뒤로 떨어진 것이다.

“!”

“?”

“!”

토끼와 소녀가 자랑스럽게 어른들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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