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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75화 (75/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5화

22. 붉은 손의 단검(10)

“자네, 잠시 전에 좀 이상했네, 내가 자네에게 말을 걸었는데 듣지 못하는 것 같았어.”

세렌토 백작이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예전에 들은 바가 있네. 탁월한 감정사는 유물의 과거 내력을 꿈이나 환상처럼 보거나 들을 수 있다던데, 혹시 자네도 그런 환상을 보는 겐가?”

제이든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직 초기라서 제 마음대로 보지는 못합니다만 유물에 따라 가끔 보일 때가 있습니다.”

“허! 정말인가?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하다니!”

딜런이 감탄했고 크리스토가 저도 모르게 의심 가득한 탄성을 터뜨렸다.

“거짓말! 그런 건 1급 감정사한테나 가능한 일이라던데!”

크리스토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의식하고 말을 더듬으며 한발 물러섰다.

“아, 아니, 그렇잖아요. 물건을 통해 과거를 보는 건 오랜 경험과 연륜을 가진 1급 감정사나 가능한 일이라던데 로스 감정사는 저렇게 젊고 아직 2급이니까.”

딜런도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하지. 지금 잠깐 로스 감정사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겨우 2, 3분 정도 아니었나?”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눈매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애당초 물건의 과거를 볼 수 있는 감정사는 카이엔 전체를 뒤져도 세 명밖에 없다는데, 로스 감정사가 그 셋에 들어가진 않잖나? 크리스토 말처럼 너무 젊기도 하고.”

“세상엔 천재라는 게 있으니까요.”

딜런의 말을 자른 것은 레노아였다.

“마스터 세시온 다미에르가 감정사가 되었을 때도 너무 젊다는 것 때문에 급수가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이 말이 많았다고들 하죠. 하지만 한 세기에 한 명 정도는 그런 천재가 나타나곤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제이든 로스도 그 정도로 뛰어난 천재다?”

크리스토 행정관이 비꼬듯이 입을 삐뚜름하게 비틀었으나 레노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이든 씨의 실력은 전대 마탑주인 니콜레타 아르카니오 님이 보증하고 계십니다. 감정사가 유물의 과거를 보는 능력은 감정 실력 외에도 마법과 연관이 깊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레노아의 진지한 답에 크리스토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처음 감정 때는 단검의 과거를 보지 못했잖나? 그때는 왜 못 본 거지?”

딜런이 물었고 제이든은 잠시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답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매번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게 유물의 과거가 보이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고 아직 자유롭게 볼 수 없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로스 감정사가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이 바로 그 붉은 손의 단검이란 말이죠?”

제이든이 손에 든 단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에머리 자작이 물었다.

“그건 어디서 구했나? 아카디아 백작?”

세렌토 백작의 물음을 받은 아카디아 백작은 당황한 듯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더스틴타운에 들른 골동품상에게서 구매했습니다. 델리움 시에서 온 상인이라던데 크리스토 행정관의 소개를 받았다면서 이 칼을 가져왔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크리스토가 날카롭게 외쳤다.

저 사람은 남의 말에 일단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게 습관인가 보군.

제이든이 눈살을 찌푸리는 동안 크리스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굴 소개했다니? 아카디아 백작. 당신이 세렌토로 온 이후 나와 말을 제대로 섞은 적도 없는데 왜 날 모함하지?”

그는 흥분 상태에서 아카디아 백작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렇군, 당신이야. 당신이 날 함정에 빠뜨렸군. 내게 단검 상인을 보낸 것도 당신이지? 디안느가 영주 직을 포기하는 게 못마땅한 거지. 혼인해도 영주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던 거지? 아카디아로 부족해서 세렌토까지 집어삼킬 속셈인 거야.”

“그런 말 말아요!”

디안느가 눈썹을 곤두세우면서 아카디아 백작의 옆에 가서 섰다.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되나요? 제라르는 내가 세렌토 영주 자리를 포기하는 것에 조금도 미련을 둔 적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고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카데미 시절 내가 제라르와 사귈 때부터 오라버니는 이 사람이 세렌토를 노리는 거라고 말했었죠? 그렇게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이 싫어서 나와 제라르가 혼인 말이 나올 때부터 세렌토 영주 직을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믿기 어려우신가요?”

크리스토 행정관에게 한심하다는 눈길을 던진 그녀가 일침을 가했다.

“설령 우리가 세렌토 영주 직을 노린다 해도 뭣 때문에 오라버니를 함정에 빠뜨리겠어요? 나는 원래 공인된 후계자였어요. 내가 아카디아로 시집간다고 해도 대리를 세워 세렌토를 다스릴 수도 있는데.”

세렌토 백작이 그녀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심 디안느가 혼인해서 아카디아로 간다 해도 디안느에게 후계를 넘기고 싶었던 것 같았다.

지구에서도 왕국의 상속녀가 다른 나라의 왕자나 국왕과 결혼했을 때 대리자를 세워 조국을 통치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말이 나올 수 있고 그렇다고 아카디아 백작이 데릴사위로 올 리도 없으니 디안느가 과감하게 세렌토를 포기하고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저자가 붉은 손의 단검을 가지고 있는 거야? 저걸 가지고 있는 게 증거 아냐? 저주 마법이 걸린 단검을 갖고 있으니까.”

제이든이 헛기침을 하며 크리스토와 디안느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카디아 백작님이 갖고 오신 건 붉은 손의 단검이 아닙니다.”

“?”

“아니라고요?”

“하지만……, 그 단검 때문에 과거를 보신 게 아니에요?”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제이든이 말했다.

“이 단검을 매개체로 과거를 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 단검은 붉은 손의 단검이 아니에요.”

“?”

“이 단검은 원래 센의 소년 왕이 지녔던 겁니다.”

제이든에게 과거를 보여준 것은 혈육의 피를 묻힌 뒤로 저주받은 붉은 손의 단검이 아니었다.

여섯째 왕자 신이 모친에게 처음 받았던 단검, 그의 품속에서 그 모든 비극을 지켜보며 신의 슬픔을 함께했던 바로 그 단검이었다.

“그럼 붉은 손의 단검은 어디 있는 걸까요?”

디안느가 물었고 제이든은 딜런 경을 쳐다보았다.

“왜 나를 보시나?”

제이든이 그를 쳐다보자 딜런 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딜런 경, 붉은 손의 단검을 갖고 계시죠?”

“내가?”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인가? 난 그런 단검 본 적도 없다네. 오늘 이 난리법석 때문에 처음 알게 된 건데.”

“글쎄요. 정말 그러실까요?”

제이든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딜런 경, 전에 저와 만나신 적 있으시죠?”

“무슨 말인가? 여기서 처음 인사를 나눴잖나.”

“변장을 굉장히 잘하셔서 저도 조금 전까지 몰랐습니다. 감정사는 관찰력으로 먹고사는 직업인데도요.”

머리를 한쪽으로 기웃한 제이든이 말했다.

“연기도 정말 잘하셨어요. 그런데.”

제이든은 딜런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말했다.

“좀 전에 이렇게 말하셨죠. 허! 정말인가?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하다니!”

“?”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습니다. 제가 앰버타운에서 단검을 감정할 때 제 옆에 서 있던 늙수그레한 집사가 그렇게 말했었죠. 허! 정말이오? 세상에 그런 게 끼어 있다니!”

“…….”

“목소리는 좀 다르게 변조하셨지만 말투가 지금과 똑같았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보니 그때 그 집사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때 집사로 변장하셨던 게 바로 딜런 경 본인이었죠?”

사람들이 딜런을 쳐다보자 그는 뒤쪽으로 물러서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게 무슨 억지인가? 그렇게 불확실한 걸 증거라고 내세우면 곤란하지. 말투 한 마디가 비슷했다고 그게 나라고 몰아붙이다니!”

그는 화난 얼굴로 제이든에게 소리쳤다.

“누구 사주를 받고 날 모함하는 겐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무책임한 소릴 하면 경을 칠 줄 알게!”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이든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단검을 앰버타운에서 처음 감정했을 때 저는 단검의 과거를 보지 못했습니다. 좀 전에 딜런 경께서 말씀하셨지요? 제가 그때 단검의 과거를 보지 못했다는 걸 확실히 알고 계셨지요.”

“…….”

“제가 단검을 처음 감정할 때 제 옆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이든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딜런 경을 조금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검 여섯 자루를 모으려면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하나하나 가치가 뛰어난 골동품이었고 여섯 자루 한 조를 다 모으려면 그 안에 저주받은 단검이 있다는 게 알려지지 않았다 치더라도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크리스토 행정관은 그만한 재력이 없다.

물론 빌린다거나 자금 융통을 할 수는 있겠지만 주변에 소문이 날 수도 있고 아무래도 무리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아카디아 백작은 재력은 있겠지만 동기가 부족하다.

딜런 경과 에머리 자작은 재력도 있고 동기도 있어서 둘 다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단검이 보여주는 환각을 보고 난 제이든이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붉은 손의 단검에 씐 저주는 무작위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었다.

혈육의 피를 묻히고 저주에 씐 이 단검은 혈연관계에 있는 자를 해한다.

“세렌토 백작님, 디안느 영애, 혹시 최근에 몇 방울이라도 피를 흘리신 적이 있으신지요?”

세렌토 백작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 대신 딜런 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딜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은 슬픈 듯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한 달 정도 되었나? 딜런이 의사를 바꿔 보자고 권유해서 원래 주치의 말고 새로 온 의사에게 검진을 한번 받았지. 그때 피를 뽑은 적이 있네.”

“저도 그때 같이 검진 받아보라고 권하셔서…….”

슬금슬금 문 가까이로 다가가던 딜런이 디안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와당탕 소리와 함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그 아저씨, 풍채에 비해 몸놀림이 엄청 빠르던데요.”

“예, 쫓는 사람들이 애 좀 먹었다고 하더군요.”

“밖에 몰래 대기시켜 놓은 병사도 있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저는 제이든 씨를 경호해야 해서 쫓아가지 못했지만 이미 도망칠 준비를 해놓았다더군요. 거의 영지 밖으로 빠져나갈 뻔했답니다.”

제이든은 숙소로 배정된 별채에서 오스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룻밤이 꼬박 지나 이미 날이 부옇게 밝아오는 중이었다.

포이는 제이든의 옆에서 머리를 방석에 박고 자고 있었고 아실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반쯤 자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로 제이든과 오스틴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더니 본채에 갔던 레노아가 피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심문은 끝났고 북쪽 탑에 연금되었다고 합니다. 처벌이야 집안일이니 세렌토 백작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단검은요?”

“여섯 자루 모두 회수했습니다. 저주에 씐 것은 한 자루뿐이지만 여섯 자루 모두에 백작의 피를 한 방울씩 묻힌 것 같아요. 일단 모두 마탑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세렌토 백작이 상심이 커 보이던데요.”

제이든의 말에 레노아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상심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분이시던데 특히 애정을 기울이고 오랫동안 돌봐온 사촌 동생과 조카가 저 모양이라.”

세렌토 백작에게 친형제는 일찍 죽은 디안느의 아버지 한 명뿐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디안느를 친딸처럼 키우는 한편 사촌인 딜런 경이나 크리스토의 집안까지 신경 써서 돌봐왔다.

무리한 경영과 낭비벽으로 인해 크리스토의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은 후에도 크리스토를 행정관으로 삼고 꾸준히 뒤를 봐주었다.

딜런 역시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 수십 년 옆에 두고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 왔는데 그런 딜런이 그와 디안느를 해치려 한 것이다.

“백작부인이 몇 년 전 돌아가셨는데, 이 꼴을 안 보고 떠나서 다행이라고 한탄하시더군요.”

레노아는 세렌토 백작이 안쓰러운지 낯빛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디안느 영애를 후계자로 정했던 백작이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거지요.”

곰곰 생각하던 제이든이 물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디안느 영애는 후계 자리를 포기했는데 딜런 경이 이렇게까지 손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요? 집안 사정을 보면 크리스토 행정관이나 에머리 자작보다는 딜런 경이 후계자가 될 확률이 컸을 듯한데요.”

“그게 말이죠.”

지친 듯 가라앉아 있던 레노아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무래도 누군가 부추긴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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