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4화
22. 붉은 손의 단검(9)
어쩌면 그때, 그 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때, 그 마지막 전투에서 태자 형님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지만 않았다면.
훗날 신은 가끔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3년간의 치열한 전쟁 동안 센과 시타는 많은 피를 흘리고 피폐해졌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누가 이기고 지고도 없이 싸우고 또 싸우다 흐지부지 끝난 싸움이었다.
전쟁 말기에 시타에서는 내란이 일어나 왕위가 바뀌었다.
전 왕은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왕위를 박탈당하고 폐서인되었다고 들었다.
시타의 새 왕은 휴전 가능성을 타진했고 센에서는 둘째 왕자 현이 휴전 회담의 책임을 맡아 여러 번 시타의 대신들과 회담 자리에서 마주한 끝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공시키고 전쟁을 끝냈다.
전쟁의 상처는 컸지만 센 왕실 입장에서 가장 큰 피해는 휴전이 성립되기 전 마지막 전투에서 태자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타고난 무인으로 군을 이끌고 앞장서 전투를 지휘하던 태자는 그동안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오랜 치료 끝에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일어난 그가 잃은 것은 신체의 일부만이 아니었다.
팔 하나를 잃고 걸음도 부자연스러워진 그는 예전의 호탕하고 넉넉하던 그가 아니었다.
왕은 그가 받을 충격을 감안해 태자 자리를 그냥 두었으나 조정에서는 태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고 결국은 그렇게 될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시원스럽고 호탕한 성격이었던 태자는 음울해졌고 차차 아우들을 질시하고 비뚤게 대하게 되었다.
아우들 역시 기왕 태자가 바뀔 거라면 내가 못 될 건 무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전장에서 태자 못지않게 큰 활약을 했던 셋째나, 후방 보급을 맡고 내정 안정에 최선을 다했던 넷째나 다섯째 모두 스스로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자 자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직 어린 여섯째 신과 둘째 현 정도였지만 현은 가만히 있어도 그가 다음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또 문제였다.
“둘째 형님은 그렇게 사람 좋은 척, 아무 욕심 없는 척하면서 인망을 얻는 게 더 비겁합니다. 차라리 내놓고 경쟁에 뛰어드시는 게 더 떳떳할 텐데요.”
“외교적 수완이 좋다고는 하지만 안전한 후방에 계셨잖아요. 군을 이끌고 전장의 선두를 달렸던 큰형님만 안됐지요.”
“셋째 형님, 후방 일은 뭐 쉬운 줄 압니까?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장병들이 어떻게 버텼겠어요?”
싸움터를 구르다 온 형제들은 예전 같지 않았고 서로 날을 세우곤 했다.
전쟁을 겪고 저마다 소중한 것을 잃어 본 사람들은 어딘가 한 군데씩 망가져 있는 것 같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후계 경쟁에 말려들다 보니 상처가 더 악화되는 듯했다.
조정의 대신들 역시 패가 갈렸는데 둘째 현과 셋째 원을 지지하는 세력이 가장 많았다.
대신들의 논쟁은 점점 드세졌고 서로 경원시하는 형들을 보는 신의 마음은 암울했다. 누가 되든 빨리 태자가 결정되었으면 했다.
신의 마음으로는 온화하고 경영 능력이 뛰어난 둘째 형이 더 나은 듯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떤 형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어마마마가 우리에게 단검을 주신 뜻은 이런 날이 오는 것을 경계해서였을 텐데.”
형들은 그 단검의 뜻을 모두 잊은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셋째 원을 향한 독살 시도가 일어났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셋째를 따르는 사람들은 흉수로 둘째 현을 지목했고 모든 증거 역시 그를 가리켰다.
태자나 넷째 역시 둘째를 의심했고 국왕 역시 그를 의심하여 빠져나갈 길이 없을 듯했다.
얼마 후 비가 몹시 오던 날 밤, 현이 술에 잔뜩 취한 채 신의 방을 찾아왔다.
언제나 단정하고 흐트러지는 일이 없는 현으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형님, 이 밤에 이렇게 약주를 많이 하시고!”
현은 신의 부축도 마다하고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뜬금없이 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신아, 우리 서방으로 갈까? 아무도 모르게 배를 타고 둘이서. 날 따라가겠느냐?”
신은 형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마음이 울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디를 가든 형님 곁에 있겠습니다. 예전부터 제가 서방에 가 보고 싶어 한 거 아시잖아요?”
“너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우리 막내. 기특하구나.”
별말도 없이 잠시 앉았다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우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는 비틀비틀 비 오는 뜨락으로 사라져가는 형의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았다.
신은 세상 모든 것을 버린 듯 허망해 보이던 형의 눈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다음 날 아침 일찍 현을 찾아갔다.
“마마는 아직 주무십니다. 어제 약주가 과하시더니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신은 불안한 마음에 내관을 밀치고 현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침상 위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현, 미처 감지도 못한 그 눈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형의 목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형님!”
신이 울부짖으며 뛰어들어 형을 끌어안았을 때 현의 목에서 흐른 피가 그의 얼굴과 손을 적셨다.
목에 꽂혀 있던 것은 모친으로부터 받은 바로 그 단검이었다.
얼마나 세게 찔렀는지 날을 세우지 않았던 단검의 무딘 날이 그 목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자진이라고요? 형님이 자진할 리가 없어요! 나와 같이 서방 대륙에 가자고 했다고요!”
“마마, 이제 그만 손을 놓으십시오. 이렇게 우시면 형님이 마음 편히 세상을 못 뜨십니다.”
“그래, 막내야, 이제 그만 형님을 보내 드리자.”
신은 자신을 부축해 현의 시신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형제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까짓 왕좌가 무엇이라고, 형제를 저승으로 보내니 좋습니까? 그래요, 어디 두고 봅시다. 둘째 형님을 해친 게 누군지 내가 밝혀내고 말 테니!”
소년의 눈은 슬픔과 분노로 번들거렸다.
신이 너무 흥분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태의가 와서 마음을 진정시킨다는 약을 먹였다.
한밤중, 약에 취해 억지로 잠이 든 신의 귓전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네 형을 죽인 자가 누군지 알고 싶으냐?”
신은 잘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잠 오는 약을 먹은 탓인지 구역질이 자꾸 났다.
“네 형을 죽인 자에게 벌을 내리고 싶으냐?”
몸을 일으키자 말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누구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여기다.”
목소리는 신의 머리맡에서 울렸다.
머리맡의 문갑 위에는 몇 년 전 현이 서방에서 선물로 사다 준 수정구가 있었다.
수정구 안의 눈 덮인 산꼭대기가 지금은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메마른 사막의 붉은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드래곤의 형상이 그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용의 푸른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다시 묻는다. 사막과 바다를 건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자, 그의 죽음에 복수하고 싶으냐?”
수정구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용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신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를 내게 다오. 너에게 힘을 주마.”
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자기 것이 아니었다. 현의 목에 박혔던 단검이었다. 그가 그 단검을 안고 통곡할 때 아무도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했다.
신은 그 단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날이 무뎌서 쉽지 않았지만 힘을 주니 단검은 단검이라 손이 베어지면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단검의 날로 손바닥을 누른 채 수정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가늘게 이어진 피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칼끝으로부터 수정구 위로 선을 그으며 흘러내렸고 수정구는 마치 받아마시듯 그의 피를 빨아들였다.
단검과 수정구가 서로 다투듯 그의 피를 빨아들였고, 마침내 신이 의식을 잃고 툭 쓰러졌다.
채 감기지 않은 그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로부터 2년 후.
열여덟이 된 그는 냉혹한 눈으로 발아래 꿇어앉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산발한 채 무릎을 꿇은 것은 그의 넷째 형이었다.
유순한 게 장점일 뿐 무골호인이라 우유부단하고 형제들에 비해 뛰어난 점이 없다는 평을 받아 막내 신과 더불어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로 제쳐놓아지곤 했던 넷째 정.
태자를 바꾸어야 한다고 조정이 들썩거릴 때 새로운 태자로 물망에 오르지도 않았던 왕자였다.
높게 쌓은 단 위 의자에 앉은 신이 그에게 뭔가를 툭 던졌다.
넷째의 무릎 앞에 떨어진 것은 단검이었다.
“기억하죠? 둘째 형의 목숨을 가져간 그 단검입니다.”
소년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틀렸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 단검이 당신의 피를 먹는 날을.”
넷째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이리 해야겠느냐? 유배 간 다섯째를 제외하면 이제 너에게 남은 형제는 나밖에 없는데.”
“당신이 둘째 형과 셋째 형 사이를 이간질하고, 셋째 형에게 독을 먹이고 둘째 형에게 누명을 씌우고, 자진한 것처럼 꾸며 살해했을 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을 몰랐겠지요?”
신은 광기가 엿보이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 손으로 하세요. 그 무딘 날이 목을 뚫는 통증을 참을 수 있는지 어디 봅시다. 둘째 형과 내 피를 먹은 단검입니다. 당신의 피로 이 은원을 끊도록 하지요.”
신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더 험한 꼴을 보고 싶다면야.”
넷째는 지친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광적으로 신을 따르는 병사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말 한마디만 떨어지면 그들이 자신의 목에 단검을 박아넣을 것이었다.
아니, 사지를 찢을지도 몰랐다.
독을 먹인 것이 둘째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둘째를 쳐낼 기회로 생각해 둘째의 죽음을 방조했던 셋째의 참혹한 최후가 떠올랐다.
앞에 있는 소년은 이미 예전의 귀염둥이 막내가 아니었다.
피 한 방울도 보지 못하던 소년은 가장 사랑하던 둘째 형이 형제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후로 귀신에라도 씐 것처럼 냉혹하고 잔인한 악마로 변해 버렸다.
왕위를 노리고 암투를 벌이던 큰형과 셋째가 모두 막내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다섯째는 유배를 갔다.
둘째의 죽음 이후로 치열해진 형제들 간의 싸움에 마음병을 얻은 왕비는 이미 사망했고 얼마 전 국왕마저 승하하여 내일이면 새로운 왕이 즉위한다.
나를 일부러 마지막으로 남겨둔 거였구나.
어디로도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넷째는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집어 들었다.
“가세요. 저승에 가서 둘째 형님에게 용서를 비세요.”
소년의 냉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단검을 목에 가져갔다.
신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닥에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신의 눈빛을 붉게 물들였다.
“단검을 가져오너라.”
아래쪽에 시립해 있던 무사 한 명이 쓰러진 자의 목에서 단검을 뽑아 왔다.
신은 손을 내밀어 단검을 쥐었다. 단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피가 흘러나오며 그의 손을 붉게 물들였다.
“붉은 손의 단검이구나. 혈육의 피를 먹은 이 단검이 결국 나를 왕으로 만들었구나.”
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수정구의 용과 붉은 손의 단검이 그를 왕으로 만들었지만 과연 기쁜가?
그는 알지 못했다. 둘째 형이 죽던 날, 그 피를 뒤집어쓴 채 오열했던 그 날 이후로 신은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넷째의 주검을 뒤로하고 돌아선 그의 눈에서 그제야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 * *
-제이든, 왜 울어?
“응?”
제이든은 아실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십니까?”
레노아가 물었고 제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주먹으로 눈을 한 번 문지른 후 좌중을 돌아보았다.
세렌토 백작, 디안느 영애, 딜런 경, 크리스토 행정관, 에머리 자작, 아카디아 백작 등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든은 그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