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3화
22. 붉은 손의 단검(8)
3년 후의 가을, 열세 살이 된 신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며 옷차림을 고치고 있었다.
“그거, 그 푸른 머리띠를 다오. 자락이 늘어지는 두건은 안 쓸 것이야.”
“마마,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두건을 쓰셔야 하옵니다.”
“너무 어린애 같지 않으냐. 나 이제 열세 살이나 되었으니 틀어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형님들처럼 머리띠로 머리를 묶을 것이야. 지난번에 어마마마도 허락하셨다.”
“그때는 들놀이 나가시는 길이니 굳이 예를 차릴 필요가 없어 그리하였지요.”
“이잉. 그러면 빨리 해다오.”
보모상궁은 신의 머리를 빗어 묶고 두건을 씌우면서 웃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럼! 둘째 형님이 돌아왔는데. 마음 같아서는 항구까지 마중을 나가고 싶었는데 아바마마가 허락하지 않으셔서 못 하였잖아.”
서방에 사신으로 떠났던 둘째 왕자 현이 돌아왔다.
이전 렌 왕조 때는 서방 대륙과 꽤나 왕성하게 교역 활동이 있었다지만 센 왕조에 들어선 후로 서방 대륙과 교역이 끊긴 지 오래였다.
하지만 십여 년 전부터 차차 다시 왕래가 시작되었고 3년 전 서방 사신들이 다녀간 후 현은 자신을 사신단에 동행시켜 서방에 보내 주길 청하였다.
낯설고 먼 길에 왕자를 보내는 게 불안했던 국왕과 왕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한 차례 사신단이 무사히 서방까지 다녀오고 어느 정도 안전에 대한 확신이 생긴 후에야 두 번째 사신단에 현을 포함시켜 보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다음 사신단은 또 언제쯤이나 가려나. 그때는 날 보내 달라고 해야겠어.”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다! 현 마마가 서방으로 떠나신 후 왕비 마마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셨는지 못 보셨습니까? 현 마마처럼 믿음직한 분이 떠나셔도 그러시는데, 우리 아기 마마가 바다 건너로 가시면 어마마마가 머리가 하얗게 세실 겁니다.”
“아기 마마라고 부르지 말랬지. 이제 곧 관례를 올릴 것인데 유모가 나를 그리 부르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예, 예, 소인이 잘못하였습니다. 마마. 이제 다 자라셔서 훤칠한 장부가 되신 것을요.”
귀밑머리가 살짝 희어진 보모상궁은 웃으며 신의 옷차림을 마무리했다.
관례를 치르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서 가자. 형님께 내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드려야지!”
사신단에 동행하여 서방으로 떠난 현은 거의 1년 만에야 센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홉 달이야, 형님이 떠나신 지 아홉 달이나 되었어.”
9개월 만에 돌아온 현은 사흘 전 항구에 도착하여 국왕이 마중 보낸 사람들과 함께 수도로 돌아와서 오늘 새벽에 궁에 도착했다.
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드린 후 조정에 참석하여 사신단의 보고를 하고 이제 늦은 오후에야 왕비의 처소로 물러 나와 형제들과 회포를 풀게 된 것이다.
“마마가 가장 따르시는 둘째 형님이 돌아오셨으니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응. 하지만 다른 데선 그런 말을 하지 마. 다른 형님들이 서운하실 수 있으니. 그리고…….”
왕자는 패를 지으면 안 된다 했어.
신은 속말을 삼키며 걸음을 서둘렀다.
어릴 때야 누구를 따르고 누구와 함께 지내든 상관없었지만 자라다 보니 알게 모르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을 눈치채게 되었다.
‘어차피 막내 왕자마마가 둘째 마마를 가장 따르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인데…….’
보모상궁은 현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신은 늦둥이인 데다 막내라 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도 아니었고, 밝고 사랑스런 성격이라 형들 모두와 사이가 좋았지만 둘째인 현이 막내를 가장 잘 보살폈고 신 역시 현을 가장 따랐다.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어느새 나름대로 중용을 지키려고 신경을 쓰기 시작한 현의 모습이 일찍 철든 아이를 보는 듯해 조금 애처로웠다.
“형님!”
왕비의 처소에서 모친의 손을 잡고 서방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던 현은 뛰어드는 신에게 밀려 휘청거렸다.
“형님, 형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우리 신이가 그새 정말 많이 컸구나. 이제 헌헌장부가 되었어!”
한창 클 나이라 못 본 동안 부쩍 자란 아우가 새삼스러운지 현은 눈을 크게 뜨며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리 좀 떨어져 앉거라, 네 형이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터인데.”
왕비도 웃으면서 막내를 잡아당겼다.
“헌헌장부는 무슨, 아직 개구쟁이에다 피도 못 보는 겁쟁이인데요.”
막 들어오던 다섯째 운이 싱글거리며 아우를 놀렸다.
“괜찮다. 우리 신이가 피를 못 보는 건 마음이 따뜻해서 그런 것이야.”
“태자 형님.”
운과 함께 들어오던 태자 경이 막내의 편을 들었다.
신은 어려서부터 피 보는 걸 싫어했고 센의 남자들이 대부분 좋아하는 사냥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형들을 따라 사냥터에 나갔을 때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토끼를 보고 구역질을 한 후 어지간하면 사냥에도 따라가지 않았다.
왕실 행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냥터에 나가야 할 때는 눈치껏 천막에만 있거나 뒤에 처져 있고 사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타고난 무인인 태자 경은 평소엔 다부지면서 사냥터에만 나가면 유약해지는 막내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드센 성격을 타고난 셋째 원과 작당해 신의 성격을 고쳐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악의는 없었고 신을 사냥에 익숙해지게 하려 한 것뿐이었지만 막내 아우를 강하게 키워보려던 경과 원의 시도는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었다.
두 형의 강권에 마지못해 사냥에 끌려가 화살에 맞은 노루의 숨통을 직접 끊어보라는 요구를 받은 신은 자존심 때문에 칼을 들기는 했었으나 목에서 피를 뿜는 노루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경기를 일으키고 말았다.
벌써 두어 해가 지난 일이지만 신은 아직도 그때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노루의 마지막 눈을, 일어서려고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땅바닥을 긁던 네 다리를 잊지 못했다.
경기를 일으키고 넘어가는 동생을 보고 기겁한 태자와 셋째 원은 궁에 돌아와 왕비에게도 톡톡히 꾸지람을 들었고, 그 이후 다시는 신을 무리하게 사냥에 데려가거나 하지 않았다.
셋째는 아직도 신이 그때만 해도 어려서 그런 것이고 좀 더 남자답게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태자는 신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냥 타고난 성격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물러섰다.
그때 한동안 잠도 못 자고 악몽에 시달리던 신의 곁에 붙어서 신을 달래고 안정을 찾도록 도와준 것은 둘째 현이었다.
그는 신처럼 예민하지는 않았지만 신이 사냥이나 불필요한 죽음을 싫어하는 것을 이해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사냥을 좋아하는 센에서 현만이 신을 이해해 주었으므로 신이 현을 더 따르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와, 둘째 형님, 좀 변하셨네요?”
오랜만에 보는 형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형의 내음을 들이마시고 난 신이 좀 떨어져 앉아서 형을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둘째 현은 원래 물오른 버드나무처럼 낭창낭창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피부가 희고 선이 가는 데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아해서 보기만 해도 문사(文士)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데 9개월 만에 보는 현은 옅은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몸도 더 단단해져 있었다. 예전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긴 항해에 뱃사람들과 섞여 지내다 보니 그리된 모양이지. 전보다 훨씬 사내다워 보여서 좋구나.”
태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새 여섯 형제가 모두 모여서 현이 풀어놓는 서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서방에서 가져온 신기한 물품들도 보았다.
“이건 우리 막내 선물이다.”
국왕과 왕비, 형제들에게 모두 선물을 가져온 현은 마지막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신에게 커다란 수정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받침대가 달린 투명한 수정구 안에는 눈 덮인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용과 그 산의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드래곤이라는 서양 용입니까?”
현은 수정구를 눈앞까지 들어 올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황금빛 용은 날개를 접은 채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 정도의 크기였지만 머리의 뿔이며 몸의 비늘, 휘어진 꼬리는 물론 눈에 박힌 깨알만 한 푸른 보석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흠, 잘 만들기는 했지만 그리 특별하진 않은 것 같은데? 조각 솜씨라면 우리 센의 장인들이 더 정교하고 섬세하지.”
신의 옆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수정구 안을 들여다본 넷째 정이 말하자 현이 미소를 지으며 신에게 일렀다.
“그거 한번 흔들어 보아라.”
신이 수정구를 흔들자 갑자기 산에 쌓였던 눈이 수정구 안으로 화르르 날리며 눈보라가 일었다.
“오!”
“와!”
눈보라가 일어난 하늘 위로, 산꼭대기에 앉아 있던 용이 서서히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손가락만 한 용은 수정구 안에서 우아한 몸짓으로 날아다녔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우와!”
한참 날아다니던 용이 다시 산꼭대기에 앉자 눈보라도 가라앉았다.
“한 번 더 흔들어 보렴.”
신이 수정구를 다시 흔들자 눈보라가 일더니 장면이 바뀌었다.
산이 사라지고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 위에는 손톱만 한 섬이 두어 개 떠 있었다.
“용이 없어졌어요. 어디로 갔지?”
“잠깐 기다려 보렴.”
물결이 출렁거리며 바닷속에서 용이 파도를 뚫고 치솟았다.
금빛 용은 물결을 스치듯 바다 위로 떠올라서 날개를 펴고 바다 위를 날아다녔다.
“카이엔에 실제로 있는 곳을 모방해 만들었다고 하더라. 굉장히 유명한 마법사가 만든 것이라는군.”
“우와!”
“마음에 드느냐?”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형님, 감사합니다!”
신은 수정구를 끌어안고 좋아서 방방 뛰었다.
“우리 막내가 드래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어렵게 구했지. 그 수정구에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한 숨겨진 마법이 있다는 말이 있던데, 어쩌면 우리 막내가 그 마법과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겠구나.”
현이 신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다섯째 운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쳇! 둘째 형님은 역시 막내를 가장 총애하신다니까. 막내 선물이 제일 좋은 거 아닙니까?”
“네 것도 정말 좋은데 뭘 샘을 내고 그러느냐?”
왕비가 웃으면서 운을 나무라자 그도 금방 웃음을 띠었다.
그가 받은 것은 시계였다. 동방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였고 양면이 서로 다른 시각을 나타내는 회중시계였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카이엔의 시각을 나타낼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운이 받은 회중시계는 한쪽 면은 동방의 시각을, 반대쪽 면은 서방의 시각을 나타내는 양면 회중시계였다.
운은 원래 시계에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 형태의 해시계며 물시계, 모래시계 등을 모으고 있었기에 실상은 제가 받은 선물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여섯 형제가 모두 모여 선물을 서로 돌려 보며 웃음꽃이 피던 날, 신은 이런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태자 형님이 다음 국왕이 되고, 다른 형제들은 그를 보좌하며 태평성대를 이어 나갈 거라고 믿었다.
전쟁이나 내란이 없은 지 오래되었고 태평성대가 길었기에 모두들 좀 느슨했던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시타와의 전쟁이 터질 줄은 당시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구김살 없이 자랐던 여섯 왕자 역시 전란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