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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72화 (72/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2화

22. 붉은 손의 단검(7)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귀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형님, 형님!”

앳된 목소리가 제이든의 귀를 울렸다.

“둘째 형님, 거기 서서 뭐 하세요? 같이 가요.”

금박무늬를 넣은 군청색 두건 뒷자락을 머리 뒤로 팔락거리는 소년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조선 시대 복건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색감도 모양도 좀 다르다. 옷 형태는 더 많이 다르고.

센 왕조 왕실 소년들의 옷차림을 한 소년이었다.

“마마, 마마, 그리 뛰시면 넘어지십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이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왕궁의 보모상궁쯤으로 보였다.

소년은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왕자인가. 그런데 왜 내게 달려오지?

“형님!”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그에게 달려오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리 뛰어오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제이든의 뒤에 있던 사람이 그의 몸을 슬쩍 통과하며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를 본 게 아니었구나. 제이든은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은 여기에 없었다. 의식만 있을 뿐.

그의 의식이 있던 자리에 서 있던 청년이 보였다.

머리를 반쯤 틀어 올리고 반쯤은 등에 드리운 청년은 센 왕실의 성인 남자들이 입던 평상복 차림이었다.

“어마마마가 부르셨잖아요. 같이 가요. 형님.”

청년과 소년이 함께 회랑을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 뒤로 보모상궁과 내관이 따랐고 형태가 없는 제이든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 * *

“현 마마와 신 마마 드셨습니다.”

“그럼 이제 다 모였구나.”

왕비는 앞에 나란히 앉은 아들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장성해 자식을 본 큰아들부터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막내아들까지, 여섯 명의 아들들을 찬찬히 훑어보니 든든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다들 잘 지냈느냐.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은 어미가 선물을 주려고 함이다.”

“선물이라니요? 음……,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누구 탄일도 아니고 명절도 아닌데?”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는 막내의 표정이 귀여웠다.

“특별한 날은 아니다만 어미가 전부터 준비했던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불렀지. 그걸 이리 다오.”

옆에 시립해 있던 상궁이 길쭉한 상자를 왕비에게 건넸다.

반들반들한 흑단 상자의 뚜껑에 조각된 용봉 무늬를 손으로 쓸어 본 왕비는 뚜껑을 열었다.

막내가 목을 빼면서 안쪽을 먼저 보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양쪽에 앉은 둘째와 셋째에게 제지당하면서 낼름 혀를 내미는 모습을 보며 왕비는 웃음을 머금었다.

“어마마마, 그게 무엇입니까?”

“자, 보거라.”

왕비는 아들들이 잘 볼 수 있게 상자를 앞쪽으로 내밀었다.

검은 공단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단검 여섯 자루가 왕자들의 눈에 들어왔다.

단검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정교한 세공이 한눈에 보아도 명품이었다.

“명장으로 이름난 도공 수리 탄에게 반년 전부터 부탁해 만든 것이다. 여섯 자루 모두 일호의 차이도 없이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장수를 비는 자물쇠를 지니게 하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아기 때부터 팔찌나 목걸이를 채우기도 한다.

센 왕조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단검을 지니는 풍습이 있었다.

살상을 위한 단검이 아니라 호신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날을 세우지 않고 신관이나 사제의 축복을 받는다.

왕자들도 아기 때 이미 손가락만 한 단검을 제작해 목에 걸었다가 자라면서 조금 더 큰 것으로 바꾸곤 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단검들을 꺼내 보아라.”

여섯 명의 왕자들이 각자 호신부로 지니고 있던 단검을 꺼내 놓았다.

장자인 태자의 단검은 크기가 작은데도 장중한 멋이 있었다. 장식이 많지 않았지만 매우 고급스러웠다.

“이것도 탄 도공의 작품이지?”

“예, 관례를 치렀을 때 어마마마께서 주신 것입니다.”

센에서는 만 열다섯 살이 되면 관례를 치렀다.

“관례 전까지는 유리 도공이 만들었던 단검을 지녔었습니다.”

“그래, 여자들의 은장도 같다고 네가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는구나.”

왕비는 빙그레 웃었다.

유리 도공의 단검은 태자가 열 살 때 만든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아이에게 어울릴 만한 앙증맞은 단검을 지니다가 열 살 때 소년에게 어울릴 만한 크기와 모양새로 새로 만들었다.

유리 도공의 작품은 우아하고 섬세한 기풍이 돋보이는데 그 후 태자가 기골장대한 장한으로 자라는 바람에 남이 보기에도 좀 어울리지 않기는 했었다.

15세 때 관례를 치르고 나서 태자의 취향에 맞춰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단검으로 바꿔 주었더니 꽤나 좋아했었다.

“관례 치른 지도 벌써 십 년이나 되었구나. 이제 새 단검으로 바꿀 때도 되었다.”

둘째 왕자 현이 내놓은 단검은 태자가 싫다 했던 바로 그 유리 도공의 단검이었다.

역시 열 살 때 만든 것인데 둘째는 태자와 달리 그 단검을 좋아해서 관례 때도 새로 만들지 않고 그 단검을 그냥 지녔다.

버드나무처럼 우아하고 선이 가는 둘째 왕자와 유리 도공의 섬세한 단검은 서로 잘 어울리는 바가 있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저도 이번에 형님들과 같은 것으로 바꾸옵니까?”

셋째, 넷째, 다섯째의 차례가 지나기를 기다리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던 막내가 제 차례가 되자마자 신이 나서 물었다.

올해 열 살이 된 막내 왕자 신은 터울이 큰 늦둥이라 왕자들 중 유일하게 아기 때 맞춘 유아용 단검을 아직 지니고 있었다.

형님들의 단검을 볼 때마다 빨리 유아용 단검을 형님들 것처럼 크고 멋진 단검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이제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여태까지 내가 너희들을 위해 만들었던 단검 중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삼백 년 이래 가장 신력이 뛰어나다는 제사장이 축복한 물건이지.”

왕비는 아들들을 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똑같은 단검을 여섯 자루 만들어 너희들에게 나눠 주는 것은 너희들이 이 단검처럼 한배에서 나온 형제임을 잊지 말기를 바라서이다.”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여섯째는 형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 막둥이일 뿐이라 마음에 걸릴 것이 없었지만 장성한 아들들을 보는 왕비의 눈에는 걱정이 어렸다.

어릴 때는 다들 사이가 좋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형제들 사이에 조금씩 긴장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친인 왕은 형제들 간의 적당한 긴장감이나 경쟁은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고 했고 때로는 경쟁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왕비는 가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한 대 위의 선왕, 왕자들의 조부만 해도 이복형제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거친 후 친형제마저 발아래 누르고 왕위에 올랐던 선례가 있지 않았던가.

조부까지 가지 않더라도 왕 자신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이복형제의 끊임없는 암습에 시달려야 했다.

현 왕과 왕비는 그런 선례를 경계해서 형제간 서열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장자를 태자로 책봉했고 형은 아우들을 아끼고 아우들은 형을 돕고 따를 수 있도록 교육했다.

이복형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왕은 후궁에게서 자손도 보지 않았고.

“부디 서로 아끼고 의지하여라. 내부가 흐트러지면 외부의 적이 안쪽을 넘보는 법이다.”

왕비는 단검을 한 자루씩 아들들에게 나눠 주면서 신신당부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마마마, 심려 마십시오, 말씀을 잘 받들겠습니다.”

아들들은 저마다 다짐했고 막내도 새로 받은 단검을 손에 쥔 채 씩씩하게 말했다.

“어마마마,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열 살이나 됐으니 얼른얼른 커서 형님들의 힘이 되겠습니다. 누구라도 우리 형제들을 해친다면 이 단검에 맹세코 용서하지 않겠어요!”

막내의 씩씩한 말에 형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왕비도 웃으면서 막내를 끌어다 품에 안았다.

* * *

“둘째 형님, 뭘 읽고 계세요?”

“신이냐? 서방의 지리지를 읽고 있다.”

“정말요? 저도 좀 보여주세요!”

여섯째 왕자 신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정자 위에 깔린 대나무 자리 위로 뛰어 올라왔다.

“어허! 점잖지 못하게!”

신의 뒤를 따라오던 다섯째 왕자 운이 그를 나무라며 뒤따라 올라왔다.

“둘째 형님, 서방 대륙의 지리지를 또 읽고 계십니까? 이제 다 외우지 않으셨어요?”

“낯선 곳의 이야기라 그런지 자꾸 봐도 재미있구나. 이 책도 오래된 것이라 서방 대륙에 그동안 바뀐 것도 많을 텐데, 이번에 온다는 서방 사신이 새로운 책을 좀 가져오면 좋으련만.”

둘째 현과 다섯째 운의 이야기를 듣던 막내 신이 얼른 물었다.

“형님, 서방인을 보신 적 있어요?”

둘째가 대답하기 전에 다섯째가 약간 뻐기듯이 대답했다.

“난 본 적 있다. 삼 년 전에 서방 사신들이 왔을 때 봤지. 머리가 밀처럼 노랗고 눈이 유리 구슬처럼 파란 자가 왔었어.”

“거짓말!”

신이 외쳤다.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랗다니!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어요? 둘째 형님, 다섯째 형님이 날 놀리는 거죠?”

“아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단다. 그냥 머리나 눈 색이 다를 뿐 우리와 같은 사람이야.”

현은 웃으면서 막냇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너도 그때 봤으면 알 텐데!”

열다섯 살짜리 운이 불퉁하게 말했다.

“너 수린 이모님이 키우는 고양이 봤지? 털이 하얗고 눈이 파랗잖아. 그 고양이도 그때 사신들이 데려온 거야. 그런 고양이 다른 데선 못 봤지? 걔를 데려온 사람도 눈이 그렇게 파랬다고.”

신은 왕비의 여동생인 수린이 키우는 고양이를 떠올려 봤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 고양이는 정말로 눈이 크고 파랗다. 유리 구슬이라기보다는 보석 같은데 사람 눈이 그럴 수가 있다고?

3년 전 서방에서 사신이 왔을 때 신은 일곱 살이었고 마침 풍한에 걸려 앓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 조정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아프지만 않았다면 몰래 숨어서라도 서방에서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신은 하필 그때 아팠던 것이 두고두고 억울했다.

형님들은 모두 서방 사람을 봤는데 자기만 못 봤다.

“둘째 형님, 서방에 가고 싶다고 하셨죠? 가실 때 저도 꼭 데려가요. 네?”

현의 소맷자락을 잡아 흔드는 신을 보며 운이 깜짝 놀라 자신도 현의 소매를 잡았다.

“둘째 형님, 서방에 가시려고요?”

현은 가볍게 웃으며 동생들을 떼어 놓았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야 있겠냐마는, 아바마마께 부탁드려 볼 생각이다. 서방과 교역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라 하니 사신들이 다녀가면 우리도 아마 사신을 보내지 않겠느냐? 이번에 오는 서방 사신의 신분이 낮지 않다더라. 사신단에 나를 보내 달라고 아바마마께 청해 보련다.”

“하지만 뱃길로 몇 달이나 걸린다던데! 위험한 물길도 있고 물짐승도 있다고 했어요. 아바마마나 어마마마가 윤허하실까요?”

운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형을 보았다.

“형님이 서방 대륙에 관심이 많은 건 알지만, 형님처럼 학문도 깊고 인망이 높은 분이 서방에 간다고 하면 신료들이 분명 반대할 텐데요. 다들 형님이 국가의 동량이 될 인재라고 칭송하는데.”

그러니까 더 가야지.

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권력에 욕심이 없고 나서지 않으려 해도 자꾸 그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을 모으려 하지 않는데도 자꾸 따르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 또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외교가 하고 싶다. 서방에 대해 공부도 나름대로 많이 한 편이니 그쪽으로 내 재주를 발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이 나라를 좀 떠나 있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일 수 있고.

“형님, 저도 꼭 데리고 가셔야 해요. 저요, 지난번에 주신 책에서 커다란 짐승 이야기를 봤어요. 날개가 달리고 입에서 불을 뿜는다는데요. 우리 대륙의 용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겼다지요? 이름이 뭐라더라? 드, 드, 뭐였는데.”

“드래곤.”

“맞아요. 드래곤! 형님, 서방에 가면 드래곤을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서방에서도 전설의 동물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용이나 주작과 마찬가지로.”

신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더니 다시 흥분했다.

“그럼 낙타는요? 등에 혹이 있다면서요? 낙타도 전설의 동물이에요?”

“바보! 낙타는 전설이 아니야, 진짜 있는 동물이라고. 나도 그림을 봤어. 사람이 타고 있던데.”

“다섯째 형님도 진짜 본 건 아니잖아. 그림을 봤다면서 어떻게 알아요?”

현은 티격태격거리는 두 아우를 뒤로하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래곤과 낙타가 있고 이곳과는 전혀 다르다는 서방 대륙,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도 꼭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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