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71화 (71/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71화

22. 붉은 손의 단검(6)

포니는 천진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이거요? 장난감 통에 있었어요.”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제이든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허리에서 신중하게 칼집을 끌러 냈다.

색이 고운 허리띠에 달린 자그마한 가죽 칼집, 그 위에 예쁘게 수까지 놓여 있어서 누가 봐도 아가씨들을 위해 만든 물건 같았다.

포니에게는 좀 크기도 하고 생뚱맞아 보였지만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정도의 아가씨가 소지했다면 호신용 단검이나 액세서리로 잘 어울렸을 것이다.

칼집 위로 보이는 손잡이에는 심지어 가느다란 레이스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지난번에 본 단검과는 전혀 다른 꾸밈새여서 바로 앞에서 봐도 같은 단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계속 단검을 생각하고 있었던 제이든으로서는 칼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걸렸다.

“왜요? 역시 디안느 언니 건가요? 내 장난감 통에 있어서 그냥 한번 차 봤는데. 나중에 언니 갖다 주려고 했어요.”

포니는 울상이 되었고 로이드도 서둘러 말을 보탰다.

“아까 제가 확인해 봤는데 날이 서 있지 않았습니다. 여자용 장신구라서 디안느 아가씨 건가 했는데 포니 아가씨의 장난감 통에 있어서……, 잠시만 차 보겠다고 해서 그냥 채워 줬는데요.”

제이든은 포니의 허리에서 끌러 낸 칼집을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단검을 빼 보았다.

리본 달린 손잡이 아래에서 딸려 나온 단검은 역시 지난번에 감정했던 동방의 단검이었다.

원래 칼집은 없었고 날을 세우지 않은 단검이었다. 리본에 가려진 손잡이의 이국적 세공을 보니 기억이 새로웠다. 분명히 그때 그 단검이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진짜 악당이네. 이런 어린아이한테 해코지를 하려 들다니!’

제이든은 속으로 화를 내면서 단검에 시선을 집중했다.

단검 주변에서 파르스름한 빛무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라?’

그는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이상한데?

이렇게 공들여 꾸며서 본모습을 가려 놓았는데……, 이게 붉은 손의 단검이 아니라고?

지난번에 단검을 보았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감정을 위해 단검에 집중했을 때 처음엔 진품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단검 주변에 떠돌았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그중 하나가 갑자기 피처럼 붉어지기 시작했었지.

-제이든, 왜 그래?

손에 든 단검에 한참이나 집중한 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제이든은 아실리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붉어지거나 뭔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건 붉은 손의 단검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걸 이렇게 공들여서 아이의 장난감 통에 숨겨 놓았단 말인가?

“레노아 양과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로이드 씨는 포니를 본채로 데려가 주세요. 혹시 모르니 단단히 잘 지키시고요.”

그때 제이든이 감정했던 단검은 여섯 자루였다.

모두 한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았다. 같은 공방의 같은 장인이 만든 물건이라 해도 이렇게 똑같을 수 있나 싶게 신기할 정도로 똑같았다.

그중 한 자루에서 피처럼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지 않았다면 제이든도 그 단검을 구별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탁자 위에 뛰어올라 창문을 깨고 도망칠 때 단검은 어떻게 됐더라?’

탁자를 발로 찼을 때 그 위에 있었으니 단검 여섯 자루는 아마 흩어졌거나 뒤섞였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그들은 어느 것이 붉은 손의 단검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제이든이 레노아에게 말하자 레노아는 소녀의 장신구처럼 꾸며 놓은 단검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포니 아가씨에게까지 손을 뻗친 거로군요. 정말 악랄한데요. 여섯 자루라……, 성을 다 뒤져 봐야겠네요. 그리고 최소한 2인 1조로 움직여야 하고요. 사용인 중 누군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포니의 방은 손님용 객실 중 하나인데 어린이 손님이 올 경우를 대비해 어린이용으로 꾸며 놓은 방이었다.

영주와 그 가족의 방보다는 외부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쉽게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부인의 도움이 없다면 포니의 장난감 통에 단검을 넣을 수는 없을 거였다.

“포니의 장난감 통에 넣어 두면 디안느 영애에게 갈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확실히 포니보다는 디안느에게 잘 어울리는 물건이니까.

디안느의 방보다는 포니의 장난감 통이 더 접근하기 쉬웠을 테고.

치안대에서도 사람이 나왔고 영주관의 본채 수색은 한밤중까지 걸렸다.

당일 포니의 방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모두 취조를 받았다.

“디안느 아가씨의 방 앞 복도에 있는 화병에서 한 자루, 영주님의 서재 책상 서랍에서 한 자루, 그리고 포니 아가씨의 장난감 통에서 한 자루가 나온 거지요?”

“예.”

영주가 손님을 맞는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이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단검 세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화병에 있던 단검은 꽃과 어울리는 장식이 되어 있었고, 서재의 단검은 편지봉투를 열 때 쓰는 페이퍼 나이프처럼 보였다.

“그리고 또 한 자루는…….”

레노아가 창문 가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람을 힐끗 보았다.

“내 물건이 아니라니까. 나도 포니와 마찬가지로 그 단검이 내 방에 있길래 누군가 선물로 보냈나 싶어서 품에 지녔을 뿐이라니까!”

크리스토 행정관이 얼굴이 붉어진 채 항변했다.

“포니 아가씨는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만 행정관님이 누가 보냈는지도 모를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지하셨다고요?”

“방에서 발견하셨다면 누가 갖다 놨는지 시녀나 하인에게라도 묻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도 행정관님이 그 단검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사람이 없다는데요?”

“나, 난, 그러니까…….”

치안대원과 레노아의 말에 대답을 못 하고 말을 더듬는 크리스토에게 딜런 경이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라, 크리스토. 형님이나 디안느 모두 이해해 줄 거다. 어디서 그 단검을 구했느냐? 여기 감정사님 말을 들으니 위험한 물건이라는데, 나머지 단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모른다니까요! 애당초 제가 구한 물건이 아니에요! 전 이게 저주받은 물건인지도 몰랐다고요!”

크리스토가 언성을 높이는데 방 한쪽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났다.

세렌토 백작의 뒤에 서 있던 에머리 자작이었다.

“몰랐다고요? 알고 계셨잖습니까? 왕좌의 주인을 결정하는 단검 이야기 말입니다.”

에머리 자작은 크리스토를 향해 경멸하는 듯한 눈길을 던지고는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자질하는 것 같아 아무 말 않으려고 했었습니다만 크리스토 씨가 저렇게 잡아떼시니 말을 안 할 수 없군요. 실은 며칠 전 성 아랫마을에서 크리스토 씨와 외부 상인이 단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이, 이! 거짓말 마!”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거리는 크리스토 행정관을 모른 척하면서 말을 이었다.

“열흘 전 영주님의 명으로 성 아랫마을의 양조장을 시찰하고 돌아오던 길입니다. 목도 축일 겸 양조장에서 납품하는 와인도 맛볼 겸 재키네 펍에 들렀습니다.”

“아!”

크리스토가 신음하더니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구석 자리의 칸막이 뒤에 누가 앉아 있는데 처음엔 누군지 몰랐습니다. 저도 그날 피곤하던 차라 사람들의 방해를 받기 싫어서 구석에 가서 앉았지요. 그런데 등 뒤 칸막이 너머로 크리스토 행정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에머리 자작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못 들었습니다만 센 왕조 때 왕좌를 바꾸었다는 전설의 단검을 갖고 있다는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더군요. 후계 구도에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만만해 하던데요. 아무래도 흑마법이 걸린 물건 이야기인 것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제가 끼어들 일도 아닌 것 같고, 괜히 거기서 얼굴을 보였다간 서로 난처한 상황이 될 듯해 저는 먼저 나왔습니다.”

“흑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아셨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레노아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양손을 펼쳐 보였다.

“사기꾼인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 전설의 물건이 아무 데나 돌아다니겠습니까? 사기를 잘 당하는 게 크리스토 씨 집안 내력이긴 하지만 어린애도 아니고 서른일곱이나 먹은 사람이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줄이야 몰랐지요.”

그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오른 크리스토를 힐끗 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데 제가 틀렸네요. 진짜 흑마법 걸린 단검이 이렇게 나타나다니.”

“엄밀히 말하면 흑마법 걸린 단검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이든이 말했다.

“지금까지 나타난 네 자루의 단검은 모두 정상적인 단검입니다. 흑마법 걸린 물건이 아니에요. 붉은 손의 단검은 아직 이 근처 어딘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크리스토 행정관을 향했다.

“아니, 난 모릅니다.”

크리스토는 목소리를 떨다가 털썩 무릎을 꿇고 세렌토 백작을 향했다.

“숙부님, 전 정말 모릅니다. 사실 에머리 자작 말처럼 사기가 아닌가 생각도 했는데 그냥 행운의 부적 같은 마음으로 산 거예요.”

“자, 크리스토, 진정하고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봐라. 그래야 무슨 일인지 알지.”

딜런 경이 그를 다독이자 세렌토 백작도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크리스토,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라.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을 해 보렴.”

많이 놀라고 화가 났는지 세렌토 백작의 목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디안느가 얼른 숙부의 뒤에서 어깨를 쓰다듬었고 백작은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크리스토 행정관 역시 몇 번 숨을 고르더니 진정이 됐는지 비교적 조리 있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3주일쯤 전,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백작의 후계 경쟁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물건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방 대륙 센 왕조 시대의 물건인데, 왕자의 난 때 처음 후계로 내정되었던 태자와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3왕자가 모두 의문의 사고를 당하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여섯 번째 막내 왕자가 왕이 된 것이 그 물건 덕분이라고 했다.

“처음엔 물론 저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인이 제이든 로스 씨의 이름을 언급하더군요.”

크리스토는 제이든 쪽을 보았다.

“2급 감정사 제이든 로스 씨가 그 물건을 감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탑과 치안대에 신고했으니 기록이 있을 거라고 했지요. 신고된 물건이라 정상적인 경로로는 판매할 수 없어서 밤의 경매에 내놓으려고 했는데 얼마 전 글로비스 시에서 밤의 경매가 풍비박산 난 일이 있어 그 경로도 막혀 버렸다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물건이 꼭 필요한 구매자를 찾고 있었는데 제가 바로 그런 구매자라 연락했다는 거였습니다.”

크리스토는 세렌토 영지의 행정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치안대의 기록을 열람해 보았다.

과연 제이든 로스가 붉은 손의 단검을 감정하고 신고한 기록이 있었으며 날짜나 정황, 단검의 묘사까지 무명의 상인이 말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단검이 이렇게 여러 자루인 건 몰랐습니다. 신고된 내용은 붉은 손의 단검 하나뿐이었고 센 왕조 왕자의 난 때 왕좌를 바꾼 단검이라는 것뿐 상세한 내용이나 사용법 같은 건 없었고요.”

“그야 저도 모르니까요.”

제이든이 헛웃음을 웃었다.

“어쨌든 한번 만나서 실물을 보기로 하고 열흘 전에 상인을 만난 겁니다. 물건이 물건이니만큼 사람 없는 곳에서 만나기는 불안하고, 그렇다고 사람 눈에 띌 곳에서 만날 수도 없어서 재키네 펍에 손님이 없을 시간을 고른 건데 하필 에머리 자작이 바로 뒷자리에 앉았었군요.”

크리스토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서 산 겁니까?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어마어마한 가격을 부르더군요. 저는 그런 돈이 없다고 했더니 일단 선금을 내고 보름 정도만 지니고 있어 보라고 하더군요. 이 물건의 가치를 알게 될 거라면서, 보름이 지나면 이 단검을 살 만한 돈이 생길 거라고 했습니다.”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을 했다면 혹해서 받아들기가 쉬웠을 것이다. 당장 대금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일단 몸에 지니고 있으면 가치를 알게 된다고 했으니…….

그리고 크리스토 행정관은 부친이 사기를 당해 광산 사업을 말아먹었다고 하더니만 에머리 자작의 말대로 사기당하기 쉬운 유전자를 가진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나머지 두 자루의 단검은 어디 있을까?

그중에 붉은 손의 단검이 있을 텐데.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다들 무슨 일입니까? 성안이 왜 이리 어수선하지요? 디안느와 포니는 괜찮습니까?”

금발에 푸른 눈, 포니를 꼭 닮은 전형적인 동부 미남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웃 영지로 일을 보러 갔다던 아카디아 백작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탁자 위에 나란히 놓인 네 자루의 단검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왜 이 단검이 여기 있는 거죠? 그것도 이렇게 여러 자루가 있다니.”

“백작님, 이 단검을 아십니까?”

아카디아 백작은 대답 대신 품에 손을 넣더니 똑같은 동방 단검 한 자루를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

제이든이 즉시 안력을 집중해 단검을 살폈다.

“디안느에게 선물하려고 구했는데, 센 왕조의 진품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여러 자루가 있다면 아무래도 제가 속은…….”

아카디아 백작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푸르스름한 안개가 제이든의 시야를 가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