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9화
22. 붉은 손의 단검(4)
오스틴은 제이든을 한 번 보고, 제이든의 다리 뒤에 숨어서 얼굴만 내밀고 눈을 반짝거리는 포이도 한 번 보고는 싱긋 웃었다.
“음, 지금은 젓가락이 없는데…….”
그는 뭔가 던질 만한 것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쇠젓가락이 무게도 괜찮고 던지기 딱 좋긴 했는데, 나뭇가지는 너무 가볍고.”
“기를 실어서 던지면 되지 않을까요?”
레노아의 말에 오스틴은 눈에 이채를 띠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노아 양, 기를 다룰 수 있습니까?”
“조금요. 예전 제게 무술을 가르쳐 주셨던 노사님은 나뭇잎에도 기를 실어서 날리실 수 있었거든요. 나뭇잎이 날아가서 판자벽에 박히는 걸 보고 놀란 기억이 있어요. 저는 물론 그렇게는 못 하고요.”
“대단한 분께 사사하셨군요.”
오스틴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바닥에서 자그마한 돌조각 두어 개를 주워 들었다.
“저도 그런 수준은 못됩니다. 이걸로 한번 보여드리죠.”
그가 주워 든 돌멩이는 큰 돌의 모서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삼각형의 납작한 돌조각으로 한쪽 면이 뾰족했다.
비슷한 모양새의 돌조각 두어 개를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하나를 골라 들었다.
왼손을 앞으로 뻗어 균형을 잡으며 오른손을 어깨 뒤로 넘겼던 오스틴이 야구의 투수가 공을 뿌리듯 오른손을 앞으로 휙 뿌렸다.
마치 채찍질하듯 날카롭게 공기를 가른 팔에서 돌조각이 핑 하고 날아가더니 저만치 떨어진 나무줄기에 푹 박혔다.
“와!”
제이든의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돌조각이 화살처럼 날아가서 먼저 꽂힌 돌조각의 바로 옆에 나란히 꽂혔다.
“우와! 구속도 구속이지만 제구가 칼이네!”
“예?”
“아, 아닙니다. 속도도 빠른데 겨냥이 정말 정확하시다고요.”
카이엔에는 야구가 없다.
투창 던지기와 창 던지기 경기는 있던데. 축구와 비슷한 경기도 있고.
고교 야구를 보며 자란 한국 청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공 대신 돌멩이라도 한번 던져 볼까 싶어 저도 적당한 돌멩이를 하나 찾아들고 와인드업을 했던 제이든은 아이고 소리를 내며 팔을 떨어뜨렸다.
팔을 뒤로 젖히자 화살 맞은 가슴이 욱신 쑤셨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아직 그렇게 큰 동작을 하시면 안 됩니다.”
오스틴이 제이든을 나무라는데 따악! 돌 맞는 소리가 나면서 돌멩이 하나가 나무 밑으로 떨어졌다.
레노아가 아쉬운 듯 손을 털었다.
그녀가 던진 돌멩이가 오스틴이 꽂아 놓은 돌멩이를 맞추고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돌조각을 하나 더 고르더니 신중하게 조준을 하고 길쭉한 팔을 시원스럽게 휘둘렀다.
“타악!”
이번에도 돌조각은 오스틴이 꽂아 놓은 돌멩이의 바로 근처에 맞았지만 나무에 꽂히지 않고 그냥 떨어졌다.
“정확도는 굉장히 좋으신데 힘이 조금 모자라는군요. 돌이 아니라 표창이었다면 분명히 꽂혔을 겁니다.”
오스틴이 감탄하면서 레노아를 칭찬했다.
“문관국 소속 마법사 아니십니까? 제가 아는 마법사는 대개 몸을 쓸 줄 모르는 분들이 많던데, 레노아 양은 마법사라기보다는 무술가 같으신데요? 대련 때도 느꼈지만 재능도 있으시지만 한두 해 훈련하신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레노아는 나무를 향해 걸어가더니 나무에 꽂힌 돌조각을 뽑았다.
그녀가 돌에 패인 나무의 몸통을 쓰다듬자 하얀빛이 그 자리에 잠깐 떠돌다가 사라졌다.
돌에 패인 자리가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아물어 있었다.
“어릴 때 노사님과 인연이 되어 계속 체술을 배웠어요. 적성에 맞아서 저도 무술가가 될 줄 알았는데 스무 살 때 갑자기 마법의 재능이 발현했거든요.”
“스무 살이라면 마법사치고는 늦은 편이죠?”
“많이 늦죠. 보통 마법사는 십 대 초중반에 마법의 재능이 발현하는 게 일반적이고, 더 빠른 아이들도 가끔 있고요. 그때부터 꾸준히 수련하고 마법 공부를 하게 되는데 저는 굉장히 늦게 마법에 눈을 떠서 처음엔 많이 방황했어요.”
레노아는 제이든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전에 경매장에서 잠깐 꿈을 꾸신 적이 있죠?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해 봐서 제이든 씨의 상태를 알 수 있었어요. 저한테 찾아온 마법의 재능은 예지몽부터 시작했거든요. 제이든 씨는 감정사니까 꿈의 형태는 다르겠지요?”
“예, 저는 유물의 과거를 보는 꿈이랄지 환각이랄지 그런 상태를 겪습니다. 아직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고요.”
“1급 감정사들이 그런 꿈을 보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 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때 경매장에서 낙찰받으신 회색의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가에 보냈어요. 리카노스 섬에. 아마 회색의 소녀도 고향에 가게 되어 기뻤을 거예요.”
레노아는 살짝 웃으면서 손을 탁탁 털었다.
탁, 탁!
응? 레노아가 손을 털지 않는데도 어딘가에서 탁 탁 소리가 들렸다.
제이든이 돌아보자 조그만 앞발로 돌멩이를 집어서 나름 힘껏 팔을 뻗은 자세로 탁 탁 던져보고 있던 포이가 깜짝 놀란 듯 앞발을 뒤로 감췄다.
볼록 튀어나온 동그란 배 때문에 앞발이 등 뒤로 다 돌아가질 않았지만.
* * *
“아실리, 우리 포이는 아무래도 무술에 취미가 있는 것 같아.”
“먀옹?”
무슨 소리냐는 듯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실리에게 제이든은 진지하게 말했다.
“저번에 다린토스 산 아래에서 노숙할 때, 내가 체술 연습을 하니까 포이가 따라 했었잖아. 그땐 그냥 날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스틴 씨가 젓가락 던지는 걸 보더니 그것도 관심 잔뜩이야. 막 따라 하고 싶어 한다니까.”
“냐옹?”
“정말이야. 넌 못 봤지? 아침에 우리 잘 때 포이 혼자 창가에서, 커튼 뒤에 숨어서 오스틴 씨랑 레노아 양이 대련하는 걸 아주 눈 빠지게 보고 있었다고.”
정말이냐는 듯 아실리가 포이를 바라보자 포이는 조금 부끄러운 듯 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을 앞발로 비볐다.
-그랬어, 포이? 뭐가 제일 재밌었어?
아실리가 묻자 포이는 얼른 얼굴을 쳐들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앞발을 앞으로 휙 내젓는 흉내를 내 보였다.
휙, 휙, 짧은 앞발을 머리 위까지 쳐들었다가 힘껏 앞으로 휘두르는 오동통하고 복슬복슬한 아기 토끼를 보면서 제이든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실리도 아닌 척하고 있지만 웃음을 꾹 참는 눈치였다.
“아니 발이 그렇게 작고 짧은데……, 뭘 던지고 싶은 거야, 포이야? 표창?”
말을 하고 나니 제이든의 머리에 까만 닌자 옷을 입은 아기 토끼가 짜리몽땅한 앞발에 수리검을 들고 던질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영상처럼 떠올랐다.
마치 만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에 제이든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이거 시청각 연상이 너무 잘 되는 것도 병이야.
침대 위를 구르며 웃다 보니 아실리와 포이가 이상한 걸 보는 얼굴을 하고 제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든, 어디 아파?
“포잉?”
* * *
세렌토 영주관 별채에서의 하루는 의외로 즐거웠다.
화살 사건도 있었고 젓가락 사건도 있어서 처음엔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영주의 성내라 그런지 외부 침입자도 없는 것 같았고 조용한 하루였다.
경호를 맡은 오스틴과 레노아는 계속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이든은 다소 태평한 성격 덕분에 아실리와 포이를 데리고 간만의 휴식을 즐겼다.
본성의 하인이 가져다준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도 맛있었고 별채 주변의 잘 정리된 숲은 포이가 특히 좋아했다.
역시 토끼라서 숲에서 노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오후 낮잠을 자고 나서 또 숲에 가자고 보채는 포이를 데리고 나온 제이든은 아실리와 함께 설렁설렁 걷다가 적당한 풀밭에 앉아 있었다.
따라 나온 오스틴이 약간 뒤쪽에 서 있었고 포이는 주변을 깡충거리고 뛰어다니며 놀았다.
“저희가 방에 있는 게 더 편하실 텐데, 밖에 나와 신경 쓰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제이든이 미안해하자 오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정도 경호는 힘든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토끼가 노는 걸 보는 것도 귀엽네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던 오스틴이 갑자기 살짝 표정을 굳혔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포이!”
제이든이 부르자 포이가 깡충깡충 제이든을 향해 뛰어왔다.
잠시 후 숲속에서 노란 원피스를 입은 병아리 같은 소녀가 포이처럼 깡충깡충 뛰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포니 아가씨.”
깡충깡충 뛰어오는 포니의 뒤에서 젊은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아가씨, 혼자 막 뛰어가시면 안 됩니다.”
남자와 오스틴은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치면서 기세를 교환하더니 곧 기운을 풀고 머리를 까딱해 보였다.
서로 경호원인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포니 아가씨를 경호하는 로이드라고 합니다.”
“오스틴입니다. 이쪽 분을 경호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수인사를 한 두 남자는 알아서 적당히 거리를 벌리며 자리를 잡았다.
“아실리, 안녕? 포이도 안녕. 같이 놀아도 돼요?”
제이든이 아실리를 보자 아실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포이도 두 번째 봐서 그런지 별로 낯을 가리지 않는 듯했다.
포니가 어려서 그럴 수도 있지만.
“멀리 가면 안 되고 여기 보이는 데서만 놀아요.”
“네!”
포니와 포이는 두 마리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놀기 시작했고 아실리는 느긋하게 그 뒤를 따라가서 감독하듯 둘을 지켜보았다.
“토끼와 고양이도 경호하시는 건가요?”
로이드의 말소리에 제이든은 농담인가 싶어 그를 쳐다봤는데 표정이 의외로 진지했다.
“비슷합니다. 이분의 경호를 맡았지만 토끼와 고양이가 항상 이분과 같이 있으니까요.”
대답하는 오스틴 역시 진지했다.
제이든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로이드가 그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제가 예전에 강아지를 경호했던 적이 있어서 혹시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치안대원인 오스틴과는 달리 로이드는 경호회사 소속 경호원이라고 했다.
“강아지, 말, 고양이는 물론 알도 경호해 본 적 있습니다.”
“알이요?”
“예, 대형 다하르 도마뱀의 알이었는데 의뢰인은 그 알이 드래곤의 알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거든요.”
“아…….”
제이든은 뭐라 말을 못 하고 입을 벌렸지만 오스틴은 소리를 죽여 쿡쿡 웃었다.
“그 드래곤의 알 이야기 들은 적 있습니다. 그때 담당 경호원이 로이드 씨였군요.”
“뭐, 경호하기는 편했습니다. 어디 가지도 않고 뛰어다니지도 않고. 깨어난 뒤가 큰 문제였지요.”
“깨어난 뒤는 왜요?”
제이든이 묻자 로이드는 지금 생각해도 난처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제가 어미인 줄 알고 졸졸 따라다녔거든요.”
로이드는 말을 하면서도 눈은 계속 포니를 좇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 경호도 쉽진 않죠?”
“원래 아이들 경호가 쉽지 않은데 포니 아가씨는 어렵지 않습니다. 온순하고 철이 든 아가씨라서요. 막무가내 어른보다 백 배 낫습니다.”
오스틴도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예전에 저만한 어린 아가씨를 경호했던 적이 있는데, 포니 아가씨 정도면 정말 협조적인 경호 대상으로 보입니다.”
마침 포니가 깡충거리며 그들 쪽으로 뛰어왔다.
아이는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면서 그들 앞에 자랑했다.
“아저씨, 아저씨, 고양이가 만지게 해 줬어요. 정말 착해요.”
아저씨라니! 제이든은 조금 내상을 입었지만 포니의 나이를 생각하고 진정했다.
포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토끼가요. 열매를 줍더니 홱 던졌어요. 나뭇가지도 홱 던지고. 왜 그래요?”
그건 저 아저씨 때문입니다요, 아가씨.
제이든은 오스틴을 바라보았다. 우리 포이에게 저 아저씨가 엄청 멋지게 보였나 봅니다.
* * *
이틀 동안 포니는 매일 놀러 왔다.
아실리도 포니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고 포이와도 제법 친해져서 사이좋게 놀곤 했다.
그리고 사흘째, 상단에서 상품을 가지고 온다는 날이 되었다.
제이든은 아침 식사 후 접견 장소인 본채의 넓은 홀로 갔고 레노아와 오스틴도 함께 갔다.
아실리와 포이를 동반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 두었다.
“상인들의 신체검사는 철저히 했겠지요?”
“그렇다고 합니다. 안전을 위해서 영주님과 디안느 아가씨가 보시기 전에 집사장이 먼저 보기로 되어 있고, 감정이 필요하다 싶은 물건은 제이든 씨가 봐주셨으면 합니다.”
제이든 일행이 자리를 잡고 나자 세렌토 백작과 디안느 영애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