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7화
22. 붉은 손의 단검(2)
“화살 맞으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레노아는 희로애락을 크게 나타내지 않고 늘 담담한 편이라 제이든의 안부를 묻는 말투도 담백했다.
남이 들으면 그냥 인사치레 정도로 들리지만 제이든은 그녀의 말에서 걱정을 느끼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이게 막아 줬어요.”
“아마릴리스 은화인가요?”
레노아는 제이든의 가슴에 걸린 은화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제이든은 구멍 난 은화에 굵은 줄을 꿰어서 로프 타이를 만들어 목에 걸었다. 세렌토에서의 소식을 기다리며 리마타운의 숙소에 갇혀 있던 날이었다.
카티야의 은화가 행운의 부적처럼 느껴져서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기왕 구멍이 났으니 로프 타이처럼 만들면 좋을 것 같아 줄을 꿰었다.
금화는 너무 눈에 띌 것 같아 따로 보관하고 은화만으로 만들었는데 셔츠 깃 밖으로 목에 거니까 그럴싸했다.
“감정사에게 아마릴리스 은화 타이라니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레노아를 따라 치안대의 빈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제이든은 은화를 만지작거렸다.
무려 카티야 아마릴리스 본인에게 받은 은화.
이미 한 번 생명을 구해 준 은화가 가슴 위에서 흔들리는 게 행운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든든했다.
“포잉!”
어깨 위의 포이가 제이든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 그래, 그래, 제일 좋은 행운은 우리 포이지, 포이고말고!”
“포오잉!”
손을 올려 포이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자 포이는 만족한 듯 방실방실 웃었다.
요 녀석 자기가 행운의 토끼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이야옹.”
발밑의 고양이가 꼬리를 길게 빼며 울더니 가늘게 뜬 눈초리로 그를 흘겨본다.
당황한 제이든이 얼른 말을 이었다.
“아실리도 나한테 행운이고말고, 복고양이다, 복고양이.”
“제이든 씨? 이번 일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 네, 네!”
제이든은 얼굴을 붉히며 레노아 앞의 책상에 앉았고 아실리도 냉큼 그 옆의 의자에 올라앉았다.
초록 눈에 장난기가 담겨 있는 게 좀 얄미웠다.
조용히 따라 들어온 오스틴은 제이든의 뒤를 지키듯 섰다.
“오스틴 씨도 앉으세요.”
제이든이 권했으나 오스틴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치안대 안인데도 경호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는 모양이다.
레노아가 눈에 이채를 띠고 그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살짝 숙여 보인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세렌토의 영주는 나이가 많은 데다 지병이 있어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후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보통은 영주의 자녀들이 영주 직을 세습하겠지만 세렌토 백작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가 원래 영주 직을 물려주려고 내정했던 사람은 친딸처럼 아끼며 키운 조카딸이었는데 그녀는 동부의 아카디아 백작과 혼인하게 되었다.
내년 봄에 혼례를 올리고 나면 남편의 영지로 떠나게 될 것이고 스스로 세렌토의 영주 직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로 인해 친척들 간에 암암리에 영주 직을 노리고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흑마법에 손을 대었다는 것이다.
델리움에서 세렌토로 보낸 전서구는 흑마법에 손을 댄 자가 세렌토 영주의 가까이에 있음을 알리는 서신이었다.
내년 봄 조카딸의 혼인을 앞두고 벌써부터 혼수용품을 장만 중이라는 소문이 나서 상인들이 비단이며 장신구 등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영주관을 찾고 있었다.
그중 흑마법이 걸린 물건이 있다는 정보였고 의심 가는 상단 서넛을 추려 놓고 있었다. 상단을 고용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영주의 자리를 노리는 측근 중 한 명일 테고.
“그 비둘기를 쏘아 떨어뜨린 걸 보면 그 정보가 새어나갔다고 봐야겠지요?”
제이든이 묻자 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이든 씨를 습격한 걸 보면 그 마법에 걸린 물건이 단검일 확률이 높아졌죠. 덕분에 범위를 많이 좁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제가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때 제가 감정했던 단검도 흑마법이 걸린 물건이었지만 어쩌면 이번엔 다른 물건일지도 모르겠네요.”
“예. 물론 그럴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레노아는 초상화 몇 장을 보여주었다.
정밀하게 그린 초상화는 아니고 빠르게 특징을 잡아 그린 채색 스케치들이었다.
“혹시 이 초상화들 중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있습니까?”
제이든은 몇 장의 초상화를 주의 깊게 보았지만 아는 얼굴은 없었다.
“세렌토 영애의 혼례를 위해 요즘 여러 상단에서 상품을 가지고 오는 건 알고 계시죠? 매번 영주님이 상단을 만날 수는 없기 때문에 날을 하루 잡아서 각 상단의 상품을 보는 날을 정했습니다.”
이틀 뒤에 영주관에서 상단 대표자들을 접견하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날 접견이 예정된 상단 대표는 여덟 명입니다. 여섯 명은 이미 세렌토에 들어와 있고 두 명은 내일 도착한다고 합니다. 보여드린 초상화는 각 상단 대표들의 얼굴이고요.”
혹시 제이든이 앰버타운에서 본 사람이 있지 않나 싶어 보여준 모양인데, 애당초 제이든이 그때 본 사람들은 집사와 칼잡이들뿐이었으니 초상화에 없을 법도 했다.
하긴 그 집사라면 상단 대표로 꾸미고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상단 대표들이 그날 내보일 상품들 중 골동품도 있어요. 제이든 씨는 감정사로 입회해 주시면 됩니다. 겸사겸사 상단 사람들 중 혹시 앰버타운에서 보신 사람이 있는지도 확인 부탁드리고요.”
“예, 알겠습니다.”
레오나는 초상화 몇 장을 더 보여주었다.
상단 대표들의 그림과는 달리 공들인 초상화라 인물이 훨씬 더 뚜렷하게 보였다.
차기 후계자로 경쟁 중인 친척과 가신 몇 명이었다.
“사촌 동생인 딜런 경, 오촌 조카인 크리스토 행정관, 그리고 영주의 부관으로 일했던 에머리 자작, 이렇게 세 명이 현재 유력한 후계자 후보입니다.”
딜런은 작위를 받은 상급 기사이고, 크리스토는 영지의 행정관, 에머리 자작은 부친의 자작위를 물려받은 사람이라 했다.
그때 앰버타운에서 제이든에게 단검의 감정을 맡겼던 얼굴 없는 의뢰자가 혹시 이 중에 있을까?
제이든은 일단 초상화를 보면서 얼굴을 익혀 두었다.
“숙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주관의 별채에 묵으실 수 있고 만약 불편하시면 치안대 측에서 다른 숙소도 잡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을 생각한다면 영주관의 별채가 나을 듯합니다.”
레노아의 말에 제이든이 오스틴을 쳐다보자 오스틴은 잠깐 생각하더니 영주관의 별채에 묵자고 했다.
“제이든 씨의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노리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영주관 내의 숙소가 일반 숙소보다는 안전하겠지요.”
제이든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동하시죠. 저녁 식사 아직 못 하셨죠? 바로 근처에 세렌토에서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식당이 있답니다. 반려동물 동반도 가능하다고 하니 거기서 요기를 하고 영주관으로 가시죠.”
세렌토는 파스타라든지 피자 같은, 지구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탈리아 스타일의 음식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레노아가 안내한 식당은 의외로 동방 음식을 하는 집이었다.
토끼와 고양이를 데리고 있었기에 제이든 일행은 식당 중앙을 피해 가장자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자리 뒤쪽으로는 식탁이 없고 좀 떨어진 벽에 평소 사용하지 않는 듯한 쪽문이 하나 있을 뿐이어서 아실리와 포이가 식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맘 편히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저도 여기가 처음이긴 한데 맛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전에 뵈니 제이든 씨가 동방 문화에 관심이 많으시길래 동방 음식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었어요.”
“예, 좋아합니다.”
제이든은 식기 옆에 놓인 젓가락을 보고 울컥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카이엔에 와서 젓가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옆에 포크도 함께 놓여 있긴 했지만 젓가락이라니!
“이 집은 시타식의 요리를 한다더군요.”
그렇다면 아마 중식에 가까운 요리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동파육 비슷한 고기 요리와 땅콩, 고추와 함께 볶은 닭고기 등 중화요리와 비슷한 음식들이 나왔다.
카이엔에 와서 이렇게 중화요리와 비슷한 음식을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입에 맞으시나 봐요.”
레노아가 눈꼬리가 긴 푸른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웃었다.
“예, 정말 맛있습니다.”
여기다 짜장면만 있으면 딱인데!
제이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메뉴를 슬쩍 훑어봤지만 짜장면 같아 보이는 건 없었다.
하긴 지구에서도 정작 중국엔 짜장면이 없다고 하던데, 아마 시타에도 짜장면은 없었나 보네.
“두 분 다 젓가락을 굉장히 잘 쓰시는군요. 동방 대륙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던 오스틴이 물었다.
그만 혼자 포크를 쓰고 있었다.
“아뇨, 그냥 관심이 있어서 연습을 좀 했습니다.”
제이든이 대답했고 레노아도 머리를 저었다.
“저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동방 대륙에서 오신 분이 같은 동네에 살았거든요. 그래서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체술과 전음 등을 가르쳤다는 유 노사겠군.
제이든이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레노아를 보면서 생각하는데 직원이 다음 요리를 올린 쟁반을 가지고 왔다.
“저희 가게 특식인 쌀을 넣은 닭 수프입니다.”
제이든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보글보글 끓는 국물 가운데 하얗게 잠겨 있는 닭과 그 위에 올려진 파와 대추와 밤.
어라? 이건 아무리 봐도 삼계탕인데?
자세히 보니 대추라고 생각한 건 대추가 아니고 카이엔에서 나는 소렌이라는 빨간 열매였다.
무미 무취라서 음식에는 잘 쓰이지 않는데 꼭 대추 채처럼 썰어서 올려놓았다.
닭의 배를 쪼개 보니 안에 쌀밥이 들어 있었다.
찹쌀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정도라면 인삼만 있다면 완전히 삼계탕인데?
“저, 잠깐 뭐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제이든이 손을 들어 부르자 직원이 왔다.
“이거, 이 닭 수프도 시타식 요리인가요?”
“아닙니다. 이 요리는 시타에는 없는 요리입니다. 원래 카이엔에도 없는 요리인데 저희 주방장님이 특별히 만드신 겁니다. 저희 가게만의 특별 요리로 인기가 좋습니다.”
“주방장님을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요리에 대해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직원이 주방장에게 물어 보겠다고 간 후 레노아와 오스틴은 궁금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식탁 아래의 아실리만 짐작이 가는 듯 자기 몫으로 받은 생선 토막을 먹다 말고 눈을 깜박이면서 꼬리로 제이든의 다리를 톡톡 쳤다.
“절 찾으셨다고요?”
주방장은 동방인과 카이엔인의 혼혈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키가 크고 깔끔한 생김새인데 피니어스와는 달리 동방인의 풍모가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주방장이 식탁 옆에 서자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 닭 수프 말입니다. 시타나 카이엔의 전통 요리는 아닌 것 같은데 주방장님이 개발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주방장은 사람 좋게 미소를 지었다.
“가끔 물어보시는 손님들이 계시는데요. 제가 개발했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사실 다른 곳에서 배워 온 겁니다. 닭 수프가 거기서 거긴 거 같아도 이게 또 색다른 요리거든요. 하이옌 항구의 동방 요리 전문점에서 배웠답니다. 그 댁 선대가 개발하신 요리랍니다.”
하이옌 항구의 동방 요리 전문점이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제이든은 기억을 더듬었다.
-닭꼬치!
아실리가 야옹 울면서 제이든의 다리를 쿡 찔렀다.
아 맞다! 소네트 경매를 앞두고 갔던 델리움 시 광장의 노점!
그때 그 닭고기 꼬치를 팔던 노점 주인도 하이옌 항구의 동방 요리 전문점에서 양념 비법을 배워 왔다고 했었지.
“저, 혹시 이 닭고기 수프에 원래는 재료가 하나 더 들어가지 않나요? 아마 뿌리채소의 일종일 텐데?”
제이든이 묻자 주방장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원래는 다른 재료가 하나 더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약재로 쓰이는 뿌리채소인데 카이엔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고, 원래는 그게 있어야 완성되는 요리라고 했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닭꼬치 노점에선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삼계탕을 보고 나니 부쩍 호기심이 들었다.
그 집에 꼭 한번 가 봐야겠는데?
“제가 어렸을 때 먹어 본 적이 있는 음식이라서 그렇습니다. 카이엔에선 이 탕을 다시 먹을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반갑네요.”
식사를 마치고 영주관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을 때, 제이든은 지난번 리마타운의 거리에서처럼 찌릿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이든이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뭔가 핑 소리를 내며 두 번 연속으로 날아갔다.
오스틴이 휘두른 손에서 빛살처럼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것이 하나는 쪽문을 스치듯 바깥으로 날아갔고 하나는 쪽문에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언제부턴지 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오스틴이 쪽문 가까이 걸어가더니 문에 박힌 젓가락 한 짝을 뽑았다.
문을 열고 바깥을 살핀 그가 떨어진 젓가락 한 짝을 마저 주워 와서 제이든과 레노아에게 보여주었다.
끄트머리에 살짝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오스틴이 웃지도 않고 그들에게 말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젓가락을 잘 쓴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