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5화
21. 화살 맞은 전서구(2)
정면 얼굴을 제대로 본 게 아니라 확실치는 않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없어지지 않았다.
-흠, 제이든이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하는데.
아실리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초록 눈을 깜빡였다.
-나도 봤음 좋았을 텐데 얼굴을 전혀 못 봤어.
잠시 더 생각해 보던 제이든은 포기하고 침대로 왔다.
“이러다 갑자기 ‘짠!’하고 생각이 날지도 몰라. 오늘은 그만 포기다.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고.”
포이가 꺅꺅거리며 침대에서 통통 튀었다.
토끼라 그런지 뛴다기보다는 정말 고무공처럼 잘 튀어오른다. 까만 귀와 짧은 꼬리가 깃발처럼 팔락였다.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놀랄 만큼 밝고 명랑해졌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경계하던 것도 이제 처음 보는 사람에게만 낯가림을 좀 하는 정도로 많이 좋아졌고.
“윽!”
“피이?”
침대 위에서 깡충거리던 포이가 제이든의 등을 콩 찍고 뒤로 넘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 위에서 포이가 뛰어 봐야 전혀 타격감이 없었는데, 이제 좀 무게감이 있다.
“자, 이제 그만 놀고 자자.”
“삐잇, 피잇?”
포이는 앞발을 파닥거리며 또 깡충깡충 뛰었다.
그냥 뛰고 노는 게 아니라 뭔가 말하고 싶은 것 같네?
“포이, 왜?”
“삐잇!”
평소에는 토끼답게 앞발을 몸 앞으로 모으고 뒷발만으로 깡충거리는데, 지금은 앞발을 옆으로 파닥거리면서 뛰어오르는 게 마치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삐잇?”
짧은 앞발을 열심히 옆으로 파닥거리던 포이가 동그란 눈으로 제이든을 올려다본다.
-그 비둘기, 괜찮냐고 묻는 거야.
아실리가 통역했다.
“아, 그래, 아유 우리 포이 착하기도 하지. 비둘기가 걱정됐구나. 수의사 선생님이 아마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러시긴 했는데.”
어제 비둘기가 응급처치를 받고 깁스를 하는 걸 보긴 했는데…….
날개가 다 나으려면 적어도 반년은 지나야 한다고 했고 그 후에도 제대로 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지.
이제 집배조로서의 역할은 못 할 텐데. 제이든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혹시 안락사시키지는 않을까?
제이든이 사는 아스토시엔 산의 아룬빌 마을 우편국에서는 집배조가 나이를 먹거나 아파서 더 이상 집배조 일을 할 수 없어도 안락사를 시키지 않는다.
우편국 뒤쪽에 은퇴한 집배조들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 두고 여생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돌봐 주는 걸 보았다.
하지만 그게 카이엔 전체의 공적 지침은 아닌 걸로 알고 있었다.
아룬빌 우편국의 미란다와 우편국장인 미란다의 어머니가 워낙 집배조들을 아껴서 그렇게 관리해 주는 거라 들었지, 다른 곳도 모두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카이엔은 원래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다가 통합된 제국인 만큼 지방자치제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영지마다 자치 권한도 강하고 지방색도 강한 편이었다.
은퇴한 군견이나 경찰견, 집배조 등에 대한 조치는 아마 각 영지마다 해당 관청의 재량에 맡기지 않을까?
금방 회복되는 부상이라면 모를까 회복에 육 개월이 넘게 걸리고 그 이후에도 다시 집배조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면 과연 그 비둘기를 끝까지 치료해 줄까?
그저 비둘기 한 마리라 싶어도 제 손으로 구조한 비둘기라 그런지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내일 세렌토로 떠나기 전에 한 번 보고 가자. 그냥 끝까지 치료해 주면 좋을 텐데.”
“포잇.”
포이는 안심한 듯 제이든의 옆구리에 붙으며 잠을 청했다.
* * *
아침 식사를 하고 세렌토로 향하기 전에 치안대에 들렀다.
비둘기는 장기 요양이 필요할 듯해 버드맨의 동물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입원까지 시켜 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안심하고 가려는데 포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이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비둘기 보고 가자고?”
“포잉.”
“그래 그럼 병원 들렀다 가자. 가는 길에 겨울옷도 두어 벌 사고.”
* * *
“삐이잉.”
“왜 또?”
제이든이 새로 사 입은 겨울용 튜닉이 포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포이는 뾰로통해져서 앞발로 제이든의 배를 톡톡 쳤다.
“아항, 배에 주머니가 없어서 그러는구나?”
새로 산 튜닉은 배에 주머니가 없고 가슴에 작은 주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맨날 배에 들어갈 수는 없잖아. 대신 외투에 큰 주머니가 있으니까 외투 입으면 주머니에 넣어 줄게.”
포이를 달래서 마차에 올려 놓고 자신도 마부석에 오르려던 제이든은 흠칫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금방 나온 옷가게와 그 옆의 빵집,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아직 오전 시간이라 그리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왜 그래, 제이든?
“아니, 그냥 누가 지켜보는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본 건데 정작 돌아보니까 제이든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로 리마타운의 시내를 가로지른 제이든 일행은 곧 리먼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투명한 전면 유리문에 흰 선으로 여러 가지 동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새와 햄스터, 토끼, 고슴도치, 거북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특이했다. 보통은 개와 고양이를 많이 그리는데.
“샐러맨더와 그리핀까지 그려져 있네?”
유리문은 마치 하나의 벽화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제이든은 흥미롭게 문을 바라보았다.
“아, 로스 감정사님 오셨군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누가 아픈가요?”
왕진을 다녀오는지 병원 문 앞에 세운 마차에서 가방을 들고 내리던 프랭크 리먼 수의사가 제이든을 보고 반색을 했다.
그는 얼른 제이든의 어깨에 있는 포이부터 살펴보았고 포이는 끼잉 소리를 내며 제이든의 머리에 얼굴을 숨겼다.
“아뇨, 우리 애들은 다 괜찮습니다. 다시 길 떠나려고 하는데 그전에 비둘기 한번 보고 가려고 왔어요.”
“아 그러시군요.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신경 써주시고.”
“문이 무척 멋지네요. 보통은 개나 고양이만 그려져 있던데.”
“아, 저는 특수동물 수의사니까요.”
프랭크 리먼-버드맨은 그들을 안으로 안내하며 명랑하게 말했다.
“보통 동물병원은 개나 고양이를 중점적으로 보고요. 새나 토끼 등을 잘 보는 병원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는 새, 토끼, 햄스터, 거북이나 금붕어 등 일반 동물병원에서 잘 보지 않는 동물들을 위주로 봅니다. 그래서 특수동물 수의사라고 하지요.”
“그러시군요. 하긴 소동물 봐주는 병원이 별로 없다는 얘긴 저도 들은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도 새는 집배조를 하기 때문에 따로 집배조 수의사가 있지만 토끼나 햄스터 등은 잘 봐주는 의사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림에 샐러맨더와 그리핀도 있던데요?”
“샐러맨더는 두 번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마법사들 중 키우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리핀은요?”
“그리핀은…… 그냥 제 소망사항이라 그려넣었습니다.”
버드맨은 새를 닮은 눈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웃었다.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은 동물이라서요. 소망을 담아 그려 넣었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산에서 주운 작은 새를 키운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흔한 산새였는데 저한테는 무척 귀한 새처럼 보였어요. 이름을 그리핀이라고 붙였지요. 잘 키우면 커서 그리핀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요.”
“아하.”
“정이 많이 들었는데, 어느 날 그 새가 아팠어요. 그런데 동네 동물병원에서 새는 못 본다고 안 받아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편국으로 갔어요. 그때는 우편국에 집배조만 보는 전속 수의사가 따로 있었거든요.”
그 수의사는 우편국과 치안대 등 관청에서 관리하는 새만 치료하고 일반 새는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어린 버드맨이 울면서 우편국을 나서는 걸 보고 수의사는 마지못해 아이를 불러서 새를 봐주었다.
“그때 나는 이담에 커서 수의사가 되려고 마음먹었어요. 수의사가 되어서 동물병원을 해야지, 보통 동물병원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 새랑 토끼랑 햄스터 같은 소동물들을 치료하는 수의사가 돼야지, 그렇게 마음먹었지요.”
새의 볏처럼 위로 솟은 머리카락이나 도록도록 구르는 둥근 눈, 매부리코와 길쭉한 목, 구겨진 의사 가운.
보는 사람의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인 용모는 전날 봤을 때와 똑같았지만 제이든의 눈에 그는 더 이상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따뜻하고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버드맨을 보면서 제이든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이 동네 소동물들은 복 받았군요. 보호자들도 그렇고요.”
버드맨은 쑥스러운 듯이 웃으면서 제이든을 안쪽 병실로 안내했다.
“비둘기를 보시죠. 어제보다 많이 회복되었답니다.”
전날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발을 공중으로 뻗친 채 옆으로 누워 있던 비둘기는 하루 사이에 기운을 많이 차린 듯 똑바로 앉아 있었다.
“물도 잘 마시고 모이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엔 지장 없을 것 같아요.”
“고양이랑 토끼에게 보여줘도 괜찮을까요? 얌전한 아이들이라 새를 놀라게 하진 않을 겁니다.”
버드맨은 얌전히 앞발을 모은 채 동그란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아실리와 포이를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예, 이런 아이들이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포이를 입원장 앞에 안아 올려 비둘기를 보여주자 포이는 하얀 앞발을 유리문에 대고 눈을 크게 뜬 채 비둘기를 들여다보았다.
날개에 분홍색 깁스를 하고 있어서 깜찍해 보이는 회색 비둘기는 눈에도 한결 생기가 있어 보였다.
동그란 눈을 서로 깜빡거리면서 유리문 사이로 마주 보던 포이와 비둘기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머리를 갸웃갸웃 갸우뚱거렸다.
“포이이.”
포이가 제이든을 올려다보며 눈을 반달처럼 접고 코를 발름거렸다.
“이제 안심이 되니? 자, 그럼 비둘기한테 안녕 하고 가자.”
“포잉.”
포이는 앞발로 제이든이 옆구리에 걸쳐 메고 있는 가방을 통통 두드렸다.
“이거?”
가방을 열어 주자 포이는 머리를 폭 박더니 라벤더베리 한 알을 물고 나왔다.
“이거 비둘기 줘?”
“포잉!”
제이든은 라벤더베리를 버드맨에게 내밀었다.
“이거, 우리 포이가 비둘기에게 주고 싶은 모양인데 괜찮을까요?”
“아, 물론이죠. 정말 귀여운 토끼네요.”
수의사는 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케이지 문을 열고 비둘기의 모이 그릇에 라벤더베리를 쪼개서 넣었다.
병원을 나오는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서도 기쁜 듯이 팔짝거리는 포이의 등 뒤로 비둘기가 고맙다는 듯 구구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병원 문 앞에 서서 그들을 배웅하는 버드맨을 돌아보던 제이든은 또다시 어깨를 흠칫했다.
또 그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자 토끼와 고양이를 보고 웃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포이와 아실리 때문에 자꾸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제이든은 얼른 마차에 올랐다.
* * *
“좋은 수의사 선생님이었어, 그렇지?”
“포잉.”
“언젠가 그리핀을 만나는 꿈을 이루시면 좋겠네.”
“피잉?”
-그리핀을 사람이 본 건 이백 년도 넘었다던데? 대륙전쟁 초기에 목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이후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대. 이미 멸종된 거 아닌가 몰라.
아실리가 야옹거렸지만 제이든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포에니 토끼도 있는데 그리핀도 어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안 나와서 그렇지.”
-응,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시내를 빠져나온 제이든은 리마타운 밖으로 향하는 길로 마차를 몰았다.
“빨리 가면 내일 밤 되기 전에 세렌토에 들어갈 수 있겠다.”
점심때쯤 리마타운을 빠져나와 숲길이 시작되는 초입에서 도시락을 먹고 세렌토 방향으로 길을 잡자 차차 인적이 끊어지면서 사이프러스 숲 사이로 뻗은 길이 나타났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탑처럼 빽빽이 서 있어서 마치 성벽 사이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보자, 이 숲길로 두어 시간 더 가면 강을 낀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 우측으로 돌면 되겠구나.”
제이든이 지도를 접고 베로의 고삐를 잡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마치 가늘게 휘파람을 부는 듯 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악!”
숲속에서 뭔가 날아와서 제이든의 가슴에 명중했다.
강렬한 충격에 마부석에서 뒤로 넘어간 제이든이 마차 안쪽으로 나뒹굴었고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화살 하나가 더 날아와 퍽 꽂혔다.
-제이든! 베로, 달려!
아실리가 날카롭게 부르짖었고 베로가 히히힝 소리를 지르며 앞발을 들어올렸다가 숲속에서 나와 앞길을 막는 사람을 보고 오던 길로 돌아섰다.
마차가 뒤집힐 듯 덜컹거리며 방향을 바꿨고 베로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피잇, 피잇!”
제이든의 어깨에 앉아 있다가 함께 마차 안쪽으로 굴러떨어진 포이가 울면서 정신을 잃은 제이든에게 매달렸다.
#작가의 말
사진은 혹시 분홍 깁스한 비둘기가 궁금하신 분들 계시면 보시라고 올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