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63화
20. 피니어스의 날개
“그럼 피니어스 씨, 버나드 씨,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제이든 씨, 전시회까지 보고 가시면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왕! 왕!”
“잘 가, 아실리, 포이, 안녕. 제이든, 서화에 대해서 뭔가 알게 되면 꼭 연락할게.”
다음 날 아침, 제이든은 피니어스와 버나드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베로의 마차를 몰아 브리오를 떠났다.
좀 더 머물면서 전시회까지 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날짜가 많이 남았고, 전시회에 걸릴 작품은 이미 모두 보았기에 그만 떠나기로 했다.
다음 일정으로 잡아 놓은 세렌토의 의뢰자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고.
“삐이익!”
마차를 몰아 브리오를 벗어나는 제이든 일행의 머리 위에서 푸른 매가 인사하듯 두어 번 원을 그리며 맴돌더니 동쪽으로 날아갔다.
피니어스의 편지를 가진 핀이었다. 핀이 날아간 하늘 아래로 푸른 깃털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졌다.
“다시 여자친구분께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이든이 떨어지는 깃털을 손으로 받았다.
“예쁜 깃털이네, 안쪽은 푸르고 바깥쪽은 밝은 하늘색이고.”
그가 깃털을 옆에 앉은 아실리의 앞에 대고 흔들자 아실리가 냥! 소리를 내면서 앞발로 날쌔게 깃털을 낚아챘다.
“오, 우리 아실리도 역시 고양이야. 이거 나뭇가지 끝에 달아줘야겠다. 고양이들이 이런 거 엄청 좋아한다던데.”
제이든은 지구에서 본 고양이용 낚싯대 장난감을 떠올리면서 적당한 나뭇가지가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막대 끝에 줄을 달고 그 끝에 깃털을 단 장난감을 고양이들이 엄청 좋아하던데.
-하지 마, 피니어스의 깃털인데. 나 아기 고양이도 아니고 그런 장난감 없어도 돼.
“조금 전에 막 좋아하면서 깃털 붙잡았잖아?”
제이든이 다시 한번 깃털을 흔들다 아실리의 머리 위로 휙 날리자 아실리가 자신도 모르게 폴짝 뛰어올라 깃털을 붙잡았다.
-아이 참, 이건 그냥 고양이의 본능이야. 자, 어디다 넣어 놔.
“그래, 핀의 깃털인데 함부로 버리기도 그러니까 기념으로 보관하자.”
제이든은 순순히 깃털을 배낭 안에 넣으면서 말했다.
“이제 한참 가야 할 텐데, 실리, 그 피니어스의 날개라는 옛날이야기나 한번 해봐.”
“미이야옹.”
아실리는 조금 귀찮다는 듯이 코를 긁적이면서 제이든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드러누웠다.
“포오이!”
제이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포이가 깡충 뛰어내리더니 아실리의 목을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이것 봐, 포이도 듣고 싶어 한다. 응?”
-냐아웅. 아이, 포이 때문에 할 수 없네.
아실리는 귀찮은 듯이 꼬리를 길게 빼고 울긴 했지만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옛날 옛적 카이엔 북부의 어느 도시에 부유한 상인이 살았어.
그에게는 아름다운 딸 세 명이 있었대. 그중에서도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막내딸의 이름은 마류시카라고 했지.
상인이 멀리 상행을 나가면서 딸들에게 물었어.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고.
큰딸이 말했어.
“저는 비둘기의 발처럼 붉은 산호 목걸이를 사다 주세요.”
둘째 딸이 말했지.
“저는 첫눈처럼 뽀얀 진주 목걸이를 사다 주세요.”
늘 그렇듯 잘 나서지 않는 막내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대.
그래서 아버지가 물었어.
“마류시카, 너도 하나 얘기해 보렴.”
아버지가 묻자 막내딸은 입을 열었어.
“아버지, 저는 피니어스의 날개가 갖고 싶어요.”
상인은 상행을 떠났고 장사가 잘 되어 이익을 많이 얻었어.
돌아오는 길에 그는 산호 목걸이와 진주 목걸이를 샀으나 막내딸이 원하는 피니어스의 날개, 즉 푸른 매의 깃털은 구할 수가 없었대.
목걸이를 받은 언니들은 기뻐하면서 매의 날개 같은 걸 원한 동생을 비웃었지.
다음번 상행 때도 상인은 딸들에게 원하는 선물을 물었어.
큰딸과 둘째 딸은 말했지.
“저는 털이 따뜻하고 반질반질한 담비 모피를 사다 주세요.”
“저는 눈처럼 하얀 은여우 목도리를 사다 주세요.”
언니들의 청에 이어 막내딸이 머뭇거리며 말했어.
“아버지, 저는 피니어스의 날개가 갖고 싶어요.”
상인은 돌아오는 길에 담비 모피와 은여우 목도리를 구했지만 이번에도 피니어스의 날개는 구하지 못했대.
아끼는 막내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아쉬웠던 상인이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길에서 한 노파가 노점을 펴놓고 앉아 잡동사니를 파는 것을 보았어.
그녀가 팔고 있는 값싼 목공예품이며 구슬 목걸이들 사이에 병에 꽂아 놓은 여러 가지 새의 깃털이 보였다지.
공작새의 꽁지깃 한두 개, 타조의 깃털, 이름 모르는 붉고 노란 새의 깃털 등이 여러 개 꽂혀 있었대.
“할머니, 혹시 매의 깃털도 있습니까?”
상인이 물어보자 노파는 이빨 빠진 입으로 상인을 쳐다보며 웃었어.
“모자나 외투의 장식으로 많이 쓰는 건 타조 깃이나 공작 꼬리털인데 특이한 걸 찾는구려.”
“역시 매의 깃은 없나 보지요?”
대신 공작 깃털이라도 하나 사다 줄까 하고 깃털이 꽂힌 병을 살피는데 노파가 깃털 하나를 뽑아 내밀었어.
“마침 딱 하나 있다오. 푸른 매, 피니어스의 날개깃이지.”
상인은 반가운 마음에 값을 넉넉히 치르고 매의 깃털을 샀어.
집에 돌아간 상인이 딸들에게 선물을 건네자 모피를 선물로 받은 언니들은 모피를 몸에 둘러 보고 보석 장신구를 걸어 보면서 동생을 비웃었지.
“매의 깃털은 사냥꾼의 모자에나 어울릴 텐데 그런 걸로 무슨 멋을 내겠다고. 차라리 꽃이라도 꽂으면 화사하기라도 하지.”
마류시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전해 받은 푸른 매의 깃털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미소 지을 뿐이었어.
한밤중, 모두 다 잠든 시각에 마류시카는 창문을 열고 매의 깃털을 밤하늘에 던지면서 읊조렸대.
“내 꿈속의 푸른 매, 그리운 피니어스, 내게로 와 줘요. 나의 피니어스.”
밤바람이 불고 매의 깃털이 바람을 타고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더니 어둠 속에서 한 마리의 푸른 매가 그녀의 창문으로 날아왔대.
푸른 매는 바람을 타고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푸른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청년으로 변했어.
“마류시카,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그녀가 오랫동안 꿈속에서 보아온 바로 그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마류시카의 손을 잡았대.
* * *
“그래서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나?”
-아니, 아니.
아실리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면 이야기가 너무 밋밋하잖아.
아실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 * *
피니어스는 저주에 걸려 매가 된 왕자였지.
그는 밤마다 마류시카를 찾아왔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 저주를 풀 수 있었거든.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몇 번인가의 밤을 더 함께 보내면 완전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면 왕자는 마류시카와 떳떳이 혼인하기로 했지.
그런데 기한이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남았던 어느 날 밤에 언니들이 피니어스를 본 거야.
아름답고 멋진 왕자가 동생을 찾아오는 걸 본 언니들은 샘이 났어.
그래서 언니들은 마류시카에게 잠자는 약이 든 차를 먹이고 그녀가 잠든 틈에 창틀에다 날카로운 칼과 창날을 여러 개 꽂아 놓고 창문을 닫아 놓았대.
밤이 되고 매가 날아왔는데 불 꺼진 창 안으로 들어오려다 창틀에 촘촘하게 박힌 칼날에 심한 상처를 입고 말았어.
상처 입은 매는 창을 두드리며 마류시카를 불렀지만 약을 탄 차를 마신 마류시카는 깨어나지 않았어.
마침내 밤이 지나고 새벽 닭이 울었고 슬픔에 찬 매는 외쳤대.
“마류시카, 나를 다시 보려면 일곱 켤레의 무쇠 구두를 신고 일곱 왕국을 모두 돌아야 해. 안녕히, 나의 마류시카.”
그제서야 마류시카가 깨어나 창문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매는 창틀에 피를 흠뻑 뿌린 채 사라지고 없었어.
슬픔에 잠긴 마류시카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피니어스를 찾기 위한 길을 떠났지.
대장간에 가서 일곱 켤레의 무쇠 구두를 맞춘 그녀는 피니어스를 찾기 위해 일곱 왕국을 모두 돌았어.
해 뜨는 에테노른에서 해 지는 엘데온까지, 얼음산의 다하르에서 불꽃의 아르카니오까지, 황금의 로시난트에서 금욕의 슈라이베른까지, 그리고 그 모든 나라의 가운데 있는 카이엔까지.
마침내 그녀는 일곱 번째 구두가 다 닳아갈 무렵 카이엔의 가장 깊은 산에서 피니어스의 둥지를 찾았어.
피니어스에게 저주를 걸었던 마법사는 일곱 개의 무쇠 구두가 다 닳을 때까지 일곱 왕국을 돌고 마침내 피니어스의 둥지를 찾아낸 여자를 보고 놀랐지.
대부분의 옛이야기가 그렇듯이, 진정한 사랑만이 피니어스의 저주를 풀 수 있었어.
마법사는 수백 마리의 새를 한꺼번에 하늘에 풀어놓았대.
새들의 날개가 하늘을 가리고 깃털이 비처럼 쏟아지는 사이에서 마법사는 마류시카에게 피니어스의 날개를 가려내라고 했대.
* * *
“포이잇!”
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두 앞발을 모았다.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할 텐데도 열심히 듣고 있는지 까만 귀가 쫑긋 서 있는 게 귀여웠다.
-그래, 그래, 긴장하지 않아도 돼. 포이야.
아실리가 포이를 안심시키듯 머리를 핥아 주더니 얼른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마류시카는 피니어스의 날개를 찾아냈고 피니어스는 다시 사람이 됐어.
그와 마류시카는 힘을 합해서 사악한 마법사를 무찌르고 나라를 다시 찾았지.
그들은 왕과 왕비가 됐고, 피니어스의 깃털과 함께 뿌려졌던 수백 마리 새들의 깃털을 모아서 기념으로 직물을 짰다고 해.
“어? 그거 혹시 에트루리안 박물관에 있었다는 백조군(百鳥裙) 이야기 아니야?”
제이든이 말하자 아실리는 대견하다는 듯이 제이든을 보면서 야옹 울었다.
-용케 기억하네. 세시온의 사례집 중 지난번 에테노른의 도기 항아리랑 같은 부분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산에 뿌려진 새들의 깃털을 모아 짠 직물로 한 벌의 옷을 만들었는데 그 옷에 백 마리의 새를 수놓았다고 백조군이라 불렸다고 했다. 피니어스의 날개옷이라고도 하고.
다시없이 아름다운 옷으로 중앙 부분의 푸른 매를 중심으로 백 마리의 새가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을 달리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럼 그 옛이야기가 사실이란 말이야?”
-대부분의 옛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에 살이 붙고 뼈가 더해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지. 아니면 옷이 먼저 있었고 그 옷을 본 사람들이 상상력을 더해 옷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런 옷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그 옷은 에트루리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전시회를 위해 이송되는 과정에서 분실되었고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번 글로비스에서 겪은 밤의 경매 때 첫 번째로 경매에 나왔던 에테노른의 도기 항아리와 함께 분실된 유물 중 하나였다.
-그때 분실된 유물이 이십여 점이 넘는데 회수된 건 아마 아홉 점인가 그럴걸? 그중에서도 그 도기 항아리랑 피니어스의 날개옷이 가치가 높은 유물이야. 날개옷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문제가 되었던 옷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라면?”
-그 날개옷은 떨어진 깃털을 모아 지은 옷이잖아. 그런데 그 옷이 너무 아름다워서 처음 그 옷이 공개된 이후 사람들이 그런 날개옷을 지으려고 새를 마구잡이로 사냥해서 카이에른과 에테노리움 근교에서 깃털 좀 고운 새는 씨가 마를 정도였대.
“피이잇!”
포이가 무섭다는 듯이 몸을 떨며 앞발로 눈을 가렸다.
-그래서 카이엔의 황제가 직조를 위한 새 사냥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더라고. 그런데도 그 유행이 근절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대.
“흐음.”
-그 열풍이 지나간 후로는 그냥 진귀한 유물로 박물관에서 많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했는데. 지금은 어느 지하실 구석에서 빛도 못 보고 숨겨져 있을지, 아까워.